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13화 (21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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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저도 같이 가는 것이.”

    “미르차르드 후작, 조금 있으면 가을일세. 조금이라도 영지를 관리해야 할 시기야.”

    미르차르드의 말에 오케만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사라이와의 동맹은 간단히 성사할 자신이 있었다. 그저 뿌려놓은 떡밥을 회수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말고요. 저 혼자 간다고 하면 사라이의 사신으로 가는 걸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국왕 전하?”

    “오늘 중으로 연락을 취해서 포탈을 사용할 수 있게 해보겠네. 내일이면 답이 올 거야.”

    “성은이 망극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라트는 고개를 조아려 오케만 국왕에게 감사를 표했다.

    라트의 의견은 자뭇 합당했으나, 결국 결정권은 오케만 국왕에게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오케만 국왕이 그간 라트의 공을 생각해서 한 번 양보해줬다고 봐야 한다.

    이후 미르차르드와 함께 알현실 밖으로 나온 라트는 슬며시 성 안을 둘러보았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사저, 아니 글란츠 후작님도 성에 계셨다고 들어서요.”

    “같이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시종을 부를까요?”

    “아니요, 아니요.”

    미르차르드의 생각과 달리 라트는 케이네와 마주치는 걸 꺼리고 있었다.

    케이네와 글란츠 백작의 앙금은 굉장히 깊다. 정확히 말하자면 케이네가 혼자서 원망하고 있는 처지다.

    ‘속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닌데.’

    양아치 같은 오빠 새끼는 자신을 범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글란츠 백작은 그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케이네를 방관했다.

    게다가 위로는 해주지 못할망정 시집을 보내, 집에서 쫓아내려고 했었다. 그것이 싫어서 케이네는 노르스 대륙의 정 반대편에 있는 셀룬까지 도망쳐온 거다.

    ‘그런데 동맹을 하겠다고 말한다면.’

    게다가 글란츠 백작과 이야기를 하러 간다고 말하면 아주 싫어하겠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라트!”

    불행은 뜬금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트의 입에서 나지막이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케이네와 마주치고 싶었던 마음도 있기 때문이리라.

    “성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더 쉬지 않고.”

    “볼일이 좀 생겨서.”

    “무슨 볼일?”

    자신이 성에 온 이유를 두루뭉술하게 설명하자 케이네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고, 그것을 확인한 미르차르드 후작이 라트가 만류할 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라트님께서 사라이와 동맹을 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국왕 전하와 대면을…….”

    미르차르드 후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네가 평소 온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니 사라지고, 서릿발과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사라이와 동맹을 한다고?”

    “……응.”

    이렇게 되면 거짓은 말할 수 없었기에 라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래야 돼?”

    글란츠 백작에 관한 케이네의 피해 의식은 생각보다 심각했던 건가.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싫은 티를 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면에서 꼭 그래야 하느냐고 물어올 줄이야.

    “어, 그래야 돼.”

    그러나 선택지는 없다. 핀스크 왕국을 큰 피해 없이 정벌하기 위해서는 사라이와의 동맹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라이와 동맹을 하는 게 왕국 전쟁 시나리오를 빠르게 깰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나가 싫다고 하면?”

    “그래도 안 돼.”

    케이네 한 사람 때문에 사라이와 동맹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 케이네 역시 이 점을 모르고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만큼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고 있을 뿐.

    “너무 단호하네. 단호박인 줄 알았어.”

    입으로는 농담을 내뱉고 있지만 싸늘함은 여전했다.

    “사신으로 가는 거야?”

    “응.”

    “그럼 나도 같이 가.”

    “네?”

    뜻밖의 대사가 튀어나오자, 라트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고 말았다.

    “같이 가자고. 혼자 가면 길도 모를 거 아니야. 아직 지리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안내해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라트가 사신으로 가면 분명 포탈 쪽에서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리를 몰라서 길을 헤맬 이유는 없다.

    “누나 할 일 많잖아.”

    게다가 케이네는 현재 전쟁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자리를 비울 시간이 없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같이 못 가면 파업할 거야.”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따라오려고 하는데.”

    “그 인간, 아니 아버님을 뵈러 가려고.”

    “아.”

    라트는 그제야 케이네의 눈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과 달리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케이네의 목적 역시 알아차렸다.

    예전이라면 그저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다르다. 현재 케이네의 작위는 후작. 명예 후작이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후작이었다.

    그러니 글란츠 백작은 케이네에게 공손하게 행동해야하는 처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알겠는데.’

    자신을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은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내가 이 정도로 성공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러는 건 이해가 갔지만.

    ‘돌아버리겠네.’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가는 처지인데, 케이네가 자칫 실수라도 하면 동맹이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꼭 가야겠어?”

    “응.”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위험을 안고 싶지는 않지만, 케이네의 확고한 고집을 꺾기 힘들 것 같았기에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글란츠 백작님께 적의를 보이는 건 오로지 글란츠 백작님만 있을 때야.”

    “어머, 애도 참. 누나가 그 정도 구분도 못 할 것 같니.”

    라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준 것이 기쁜 걸까. 케이네는 한껏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다시금 화사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눈이 웃고 있지 않잖아.’

    그러나 눈만은 여전히 싸늘했기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트는 케이네와 글란츠 백작의 불화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건 자신이 나설 문제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문다.

    ‘과연 누나가 진실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실은 때때로 잔혹한 법이다. 그러나 진실이 잔혹해지기 위해서는 진상을 알아야지.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고 올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

    케이네가 자리를 떠나자 미르차르드 후작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후작님의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르차르드의 실수는 맞았지만, 어차피 언젠가 알려질 소식이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이라도 길드에 돌아오면 알려주려고 했었지만, 그때가 더 빨리 왔을 뿐이다.

    케이네가 저런 강경한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지 못한 라트의 실수였다.

    “사저랑 가게 된 이상, 미리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네요. 신병 훈련이 있으시다면서요. 먼저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미르차르드 후작이 물러나자 라트는 복도 근처에 있는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잠깐의 휴식을 맛보았다.

    ***

    다음날 오후, 포탈을 이용해 사라이의 수도 제르렐에 도착한 라트는 슬며시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당당하게 오케만 국왕에게 라트와 동행하는 걸 허락받은 케이네가 있었다.

    ‘하긴 파업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그래도 케이네에게 주어진 기간은 단 하루다. 하루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지 않는다면 라트는 제르렐에 계속 머물러야 하지만, 케이네는 파르스로 돌아가야 했다.

    “엔스리드 백작님 그리고 글란츠 후작님이시지요. 저는 안내를 그린 자작입니다. 맡은 어서 오십시오. 마차를 준비해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린 자작님.”

    “감사해요.”

    케이네는 태연하게 마차에 오르더니 창문을 통해 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직 저 가게가 남아있네?”

    “아는 가게야?”

    “어릴 적에 수도에 오면 몇 번 들렸었어. 그래도 많이 바뀌었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안내해준다고 했었잖아.”

    “당연히 따라가려고 했던 말이지. 이 나라를 떠난 지 대충 8년 정도 지났는걸. 게다가 수도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하아.”

    요망하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따라나서려고 했던가.

    “글란츠 백작님이 그렇게 싫어?”

    마차에는 오로지 자신과 케이네 뿐이기에 라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응.”

    일말의 고민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그 천사 같은 케이네가 이런 반응을 보이다는 건 그만큼 글란츠 백작과 쌓인 앙금이 쌓였다는 건가.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가 라트의 일을 엉망으로 만들 리가 없잖니.”

    “그냥 사소하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

    여자의 입장에서 사소한 복수라는 건 남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피곤한 법이다. 아마 절대로 사소한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닐 거다.

    “그리고 아버님보다는 그 새끼를 깔보려는 게 주된 목적이야.”

    “아.”

    과연 글란츠 백작보다는 그의 아들이자 케이네의 오빠인 ‘루드렐 폰 글란츠’가 주된 이유인가.

    ‘그건 뭐.’

    글란츠 백작은 그나마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루드렐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무려 친동생인 케이네를 범하려고 했으니까.

    ‘설정상 누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기지를 사용해서 벗어났다고 했었던가.’

    사실상 케이네가 적대하는 건 글란츠 백작이라기 보다는 루드렐이라고 봐야겠지.

    “물론 아버님한테 감정이 없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그렇겠지.”

    이유가 어찌됐든 케이네 입장에서 보자면 글란츠 백작은 상황을 방관한 것이다. 당연히 감정이 있을 거다. 용서할 수도 없겠지.

    “하아.”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아니, 그냥.”

    누나 때문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라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고, 그 사이에 마차는 제르렐의 왕성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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