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04화 (20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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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그래 비웃었다.”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끝까지 거짓말을 할 줄이야. 아니 어쩌면 이제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절정이 끝나기 직전이라서 그런 걸까.

    그녀가 조금 애처롭게 보였다. 애달파 보였다. 서글퍼 보였다.

    그래서 역정이 치솟는다. 역겨움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그리고.

    “지랄 좀 작작하고 본심을 말하지그래 쌍년아!”

    그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살기조차 없는 순수한 분노가 만들어져 데모니아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트렌세르노님이 아니라 네 죄책감에 맹세한다고 말해야지 제운에게 맹세한다고 말해야 할 거 아니야!”

    그놈의 트렌세르노님, 뭐만 하면 트렌세르노님을 위해서라고 지껄이는 그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리려면 제대로 부리던가. 어리광을 부리지 않을 거면 아예 부리지를 말던가. 저게 지금 무슨 추태인가.

    “뭐?”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거냐?

    “1순위가 트렌세르노가 아니라! 제운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하란 말이다!”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분명 마지막이라고 느끼고 있을 텐데도.

    최후의 최후에까지 핑곗거리를 대면서 자신의 본심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그 태도에 어찌 분노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이상 같은 헛소리하지 말고, 쓰레기 같은 이유 때문에 싸우고 있다고 말하란 말이다!”

    데모니아가 반란에 가담한 이유는 어릴 적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로 명예를 져버렸으니 바이올런이 데모니아를 좋게 봐줄 리가 없다.

    “크윽.”

    조금 전보다 깊게, 좀 더 깊게 살결을 파고드는 참격 난무에 라트는 신음을 삼켰고.

    “쓰레기 같은 이유?”

    데모니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니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매일 밤 시체로 변한 제온이 날 원망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나 해!”

    “그래서 네가 싸우는 이유는 쓰레기가 아니다? 너는 나쁘지 않다? 너는 정당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냐?”

    “그래 나는 나쁘지 않아. 뭐가 나빠! 도대체 뭐가 나쁘냐고!”

    “나쁘지는 않지.”

    그래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가.

    지구에서도,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고통을 지우기 위한 노력의 단편이라고 보면 된다.

    일그러진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데모니아를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나 최악이다.”

    방식은 최악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너라는 개인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서 더없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는지 생각해봤어?”

    데모니아의 입이 굳게 닫혔고, 라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없겠지!”

    라트의 말대로 데모니아는 단 한 번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악몽을 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너는 핑곗거리에 빠져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는 철없는 년이니까!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부정하고 또 부정해보지만, 그 목소리는 미약할 뿐.

    “그리고 나쁘지 않다고?”

    라트는 그 몸이 점차 찢어발겨 지는 중임에도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네가 그저 어릴 적의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를 떠받들고 신뢰하며 나아가 존재 의미를 이룩하고 있던 모든 관계를 부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애새끼라고 시인하는 꼴이잖아!”

    지금까지 데모니아가 핑곗거리에 심취해서, 그저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 때문에 벌인 짓을 꼬집는다.

    지금 웃고 있는 쪽은 누구인가. 스스로 위기라고 느끼는 쪽은 누구인가.

    “입……다물어.”

    지금까지 정신 하나로 버티고 있을 뿐 데모니아의 상태는 진즉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트렌세르노를 위해서, 이상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자신의 하찮은 이기심의 발로 때문이라는 말을 듣자,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정신이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무너지면서 깨닫는다.

    자신의 과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베면서 죄책감을 씻어내서 좋아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붕괴시키고 있음을 모른 채, 그저 좋아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충격이 격돌하여 해일을 만들어 정신을 뒤흔든다.

    “닥쳐, 닥쳐, 닥쳐, 닥치라고!”

    허물어져 가는 붙잡기 위해 데모니아는 부정이라는 이름의 방파제 뒤에 숨었다.

    자신이 실수했음을 이해했음에도, 잘못했음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쳐버렸다.

    그것이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죽어.”

    나의 본심을 알고 있는 건 눈앞의 남자밖에 없다.

    “죽어!”

    내 이기심을 알고 있는 건 라트 엔스리드 백작뿐이다.

    “죽으라고!”

    내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음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단 한 명뿐이다.

    그를 죽이면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가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죽였음을.

    “죽여버릴 거야아아!”

    그 누구도 모르게 된다.

    데모니아가 더 격렬하게 참격을 날린다. 생명뿐 아니라, 영혼의 정수까지 쏟아부어 만든 참격은 하나하나가 거대했다.

    그 공격이 절정의 막바지를 알렸고 마침내 극이 종극을 향해 달려간다.

    승자는 누구인가. 패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 라?”

    데모니아의 손이 멈춘다. 그녀의 입가에 새롭게 한줄기 핏물이 나타나 턱선을 타고 흐른다.

    기력이 다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체력은 거의 떨어졌지만, 정신은 부정이라는 방파제와 살의라는 기폭제로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

    손이 멈춘 이후에는 무릎을 꿇는다.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처절하게 움직였던 몸이 드디어 대지에 쓰러져 안식을 취한다.

    데모니아는 고개를 아래로 내려 자신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은빛을 자랑하던 묵직한 갑옷은 더러워지고 찌그러졌지만, 부서진 곳은 없었다.

    오직 단 한 곳을 제외하면.

    “으, 죽겠다.”

    데모니아는 고개를 들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라트를 바라본다.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도 승자의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는 남자를 바라본다.

    “도대…체.”

    갑옷은 오로지 단 한 곳, 명치 부근에 한 자루의 창이 박혀 고개를 내리면 창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하게 구멍이 난 걸 제외면 큰 파손은 없었다.

    “도…대체, 언……제.”

    이 창은 뒤쪽, 시야에 보이지 않은 사각에서 날아왔다.

    설령 사각에서 날아왔다고 하더라도 살기라도 느꼈으면 반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심장이 꿰뚫린 이후에조차 그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참격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창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눈치챘으련만.

    그래도 참격이 만들어내는 바람 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옴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즉사는 면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했다.

    ‘있을 수 없어.’

    단 한 순간도 이 두 눈으로 라트를 놓치지 않았건만,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창이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중간에 한 번 투창했던 창이다.”

    “땅…에 떨어진 그……창이라고?”

    “그래.”

    순간이동을 사용하면서 한 자루의 창만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것이 이번 승부를 결정짓는 열쇠였다.

    “네가 피를 토하는 그 찰나의 순간, 염동력을 사용해서 창을 땅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라트가 생각해낸 비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게 네 시야에서 벗어난 창을 천천히 뒤로 이동시켰지.”

    창을 데모니아의 시야가 닿지 않는 지하로 이동시켜 그녀의 뒤쪽으로 보내 찌르는 것.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순간이동을 쉴 새 없이 쓰면서 창을 이동시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

    단 한 자루밖에 조종할 수 없기도 했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 이후로는 생명의 연금술로 창을 연성하지도 않았다.

    “그때, 였……나.”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서 창을 지하로 이동시키다니.

    피를 토하지 않았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데모니아는 곧바로 그것을 부정했다.

    라트는 공간이동을 할 수 있으니, 분명 데모니아가 창을 볼 수 없는 각도로 시야를 돌린 후 똑같은 짓을 했을 거다.

    “젠, 장.”

    데모니아의 입에서 한탄의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 창이 심장에 박히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남자를 죽일 수 있었는데.

    자신의 치부를 가릴 수 있었는데.

    “네년이 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라트를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허탈함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가리지 못한 분노와 수치스러움을 곱씹고 있던 데모니아는 표독스럽게 입을 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직 전투는 안 끝, 났어!”

    그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데모니아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겠지만, 그녀의 희생으로 성벽 밖에 있던 병력 일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위험한 공성 사다리가 아닌 성문을 계단을 이용해 성벽 위로 진입하는 중일 거다.

    “성 밖에 있는 병력이 전부 들어오기만 하면 이 성이 점령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개인이 벌인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이겼으니 적어도 무승부. 아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쪽의 승리라고, 데모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귀를 기울여서 들어봐. 이게 어느 쪽의 비명일까.”

    이렇게 도발했으니 당장 데모니아를 죽이고 아직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합류할 법도 한데 어째서 아직도 승자한테만 허락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가.

    “눈을 똑바로 뜨고 성벽을 보라고.”

    그 말에 데모니아는 한쪽 팔과 눈을 잃은 후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벽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쯤이라면 성벽 위쪽은 점령당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성벽에서는 아직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트렌세르노군이 밀리고 있다. 밀리는 수준이 아니야, 패색이 짙어져 가서 도망치는 병사도 있을 정도다.

    “학살당하는 네가 이끌고 온 병사들이 잘 보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놈들은, 저놈들은 뭐야!”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성벽 위 그리고 성문 쪽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 황색 피부를 가진 인간이었다.

    “이 근처에 부족을 이루고 사는 야만인이다.”

    “어떻게 야만인을!”

    “그건 네년이 알 바 없고. 다시 한 번 말하지. 네년이 날 이길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데모니아의 의문에 굳이 대답을 해줄 이유를 느끼지 못한 라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승리를 단언했고, 데모니아의 패배를 확신했다.

    “네년은 트렌세르노의 이상이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트렌세르노의 이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거였지.”

    “그래……. 헉!”

    (오케만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셀룬의 우국인 차리친에서 반란을 일으킨 네년을 처형하겠다.)

    (트렌세르노님의 이상은 틀리지 않았음을. 네가 틀렸음을 그 목숨으로 증명해줄게.)

    피를 너무 흘려 멍해진 머리로 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내뱉었던 말을 떠올린 데모니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상대가 이상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있는 어리광쟁이라니.”

    무릎은 꿇었을지언정 꼿꼿이 서 있던 상체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허물어져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난 그저 너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어리광을 꾸중했을 뿐이다. 애당초 싸움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드디어 상체를 가눌 힘도 없어졌나.’

    라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데모니아를 내려본다.

    차갑디차가운 백색 눈동자와 피에 젖어 엉망이 된 보라색가 서로 마주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쪽은 높았고, 한쪽은 낮았다.

    “그러니까 너는 싸우다 죽은 게 아니야. ”

    싸늘하게 고한다.

    “기사의 명예도 지키지 못한 네가, 검사의 명예조차 지키지 못하고 죽는 거다.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니가 무…슨 자격으로. 신……도 아닌…평범한 인간이.”

    “기사였었던 너의 충성을 받아줬지만, 긍지 높았던 너에게 애정을 줬지만, 귀족이었던 너를 따랐지만, 부기사단장이었던 존경 했음에도 네 손에 죽어간 사람들을 대신해서다. 인간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하…….”

    한탄, 슬픔, 수치, 분노, 후회 그 모든 감정이 섞인 탄식을 끝으로 데모니아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점차 싸늘히 식어간다.

    절정을 지나 종극에 이르렀던 기나긴 전투가 드디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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