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00화 (200/229)
  • 0200 / 0229 ----------------------------------------------

    1부

    “전군.”

    라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살펴보았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죽음보다 가족의 죽음을 근심하는 자도 있고, 다가오는 적군에 겁을 먹은 이들도 있을 터.

    “이곳이 뚫리면 전방에서 적지를 휘젓고 있는 아군의 보급이 끊긴다. 로델세나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모든 병사들이 용맹할 수는 없다. 겁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 로델세나가 뚫리면 위험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너희를 죽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말에 병사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그 누구도 죽지 않게 하겠다는 헛된 희망은 안겨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지 않겠다는 희망은 주지 못하나, 단 하나는 반드시 맹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승리하리라 약조하지.”

    지지 않을 생각이다. 이곳에서 지면 계획이 틀어져, 그렇게 되게 내버려둘 성 싶은가.

    그렇지 않아도 랜덤 NPC 출현으로 계획이 꼬였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죽을 위기라고 해도. 승리를 의심하지 말고 싸워라.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알겠습니다!”

    “검병은 전부 성문의 양옆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있다가 내가 명령하면 돌격해라. 총병은 성문에서 조금 떨어져서 혹시나 곧바로 들어올 기병을 노릴 준비를 한다. 창병은 핸드 거너 앞에서 버텨주는 방패 역할이다. 알았나?”

    “예!”

    부대 배치를 설명하고 얌전히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

    ‘슬슬 발리스타 발사 준비가 끝났을 거야.’

    “적이 발리스타가 탄환을 쏘기 시작합니다!”

    “양반은 못되네.”

    병사의 외침과 함께 상당히 거리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문에 정확히 발리스타의 탄환이 꽂혀 요란함을 자아낸다.

    “전군 신속히 전투 준비.”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급히 라트가 알려준 대로 진영을 짜기 시작한다.

    ‘적어도 30분 안에 성문은 뚫릴 거야.’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면 그 시간을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끌면 확실히 이쪽이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지는 않아.

    ‘훨씬 좋은 작전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끌었겠지.’

    문제는 지금은 라트가 병사를 지휘할 수 있지만, 잠시 후는 이야기가 또 다르다는 점이다.

    자신이 데모니아를 상대해야한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자신을 제외하면 데모니아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니까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부대를 맡겨야 한다.

    “지브레 백작님.”

    “말씀하십시오, 엔스리드 백작님.”

    지브레 백작. 오러 익스퍼드이자 라트의 부대 중에서 라트를 제외하고는 가장 작위가 높은 귀족이다. 그라면 충분히 이 부대를 지휘할 수 있을 터.

    “전투가 일어나면 백작님이 부대를 지휘해주십시오. 저는 적의 오러 마스터를 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라트가 미르차르드를 붙잡은 건 셀룬에서는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그렇기에 라트가 오러 마스터를 상대하겠다는 말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헌데 백작님. 함정은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요. 성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상대하다가 시가전으로 돌입하면 됩니다. 판단은 지브레 백작님께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성문은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 금이 가 구겨진다.

    ‘앞으로 한 발.’

    예상대로 나무를 깎아 만든 거대한 꼬챙이가 성문을 꿰뚫었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성문이 괴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자

    “온다, 총병 사격 준비! 검병은 자리를 지킨다!”

    가장 먼저 들이닥친 건 기병이었다. 기병으로 전열을 휘저을 생각이겠지.

    갖춰진 전열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렇지만 예상했다. 예상했기에 대비할 수 있다.

    “쏴라!”

    발포 명령과 함께 핸드 캐논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화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뒤덮는다.

    “이, 이게 뭐야!”

    “저, 전방에 총병! 커억.”

    말과 인간의 비명이 섞여 혼란스러운 하모니를 자아낸다.

    “겁먹지 마라! 돌격해라! 숫자로 밀어 붙여!”

    겁을 먹고 돌격을 멈출 상황이지만, 뒤이어 등장한 데모니아의 명령에 기병들은 용맹하게 돌격을 감행했다.

    “창병, 기병을 막는다!”

    총병의 앞에선 병사들이 기병의 앞을 가로막고 창을 높이 들어 올린다.

    이걸로 돌격은 한 차례 막을 수 있어. 그리고 기병의 뒤를 이어 보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쯤, 그 때까지 명령을 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라트의 눈동자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가늠한다.

    ‘이쯤이면 되겠지.’

    기병을 제외하고 성내로 들어온 병사는 이제 약 3천.

    순식간에 성문으로 들이닥치기는 했지만, 창병과 총병 덕분에 성문은 이미 포화 상태다.

    더 이상 병사가 들어올 수는 없어.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라트는 히죽이면서 손을 들더니.

    “만연하라.”

    주문과 함께 손뼉을 바닥에 내리쳤다. 발휘되는 것은 고대의 연금술사가 전선에서 사용한 힘.

    자연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다룰 수 있는 능력.

    현재는 그 명맥이 끊겨 이제는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용할 수 없는 연금술.

    감히 이르기를 무색의 연금술(마그눔 오푸)라 부른다.

    “데모니아님! 성문 쪽에 갑자기 바위가!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성문이 있던 곳에 두꺼운 바위가 치솟아 오른다.

    포화 상태였던 성문에 있던 병사들이 바위에 의해 짓눌려 뼈를 으깨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붉은 액체가 적셔진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동시에 적의 병력을 반으로 쪼갰다. 이제 성 안에 있는 병력의 숫자는 동일해.

    나머지는 성벽 위에 있는 궁병들이 얼마나 시간을 벌어줄지, 발리스타가 성문을 가로막은 바위를 얼마나 빨리 부술 지다.

    “검병 돌격해라!”

    퇴로가 막혔고 양옆에서 검병이 돌격해오자 전장은 곧바로 피와 죽음으로 물들었다.

    “지휘를 부탁합니다, 지브레 백작님.”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인가.

    라트는 대검을 꺼내들고 서서히 앞으로 거닐었다. 이 무색한 살육의 현장 사이에서도 라트의 길을 막으려는 자는 누구도 없다.

    “자연을 다루는 힘. 그게 네가 가진 힘이었나.”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 칼집에서 검을 뽑아든 보라색 머리의 여성 역시 전장을 거닐며 라트의 앞에 섰다.

    “정답이다 기사. 아, 이제는 기사라고 불릴 수 없는 몸인가.”

    포션을 마시면서 적을 비꼰다.

    “날 조롱할 셈이야? 그런 조롱에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거 같아?”

    적은 웃으면서 비꼼을 흘린다.

    이 정도 조롱으로는 도발 당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단지 내가 짜증날 뿐이야. 기사인 데모니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란군인 데모니아와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오케만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다시금 파이프를 입에 문다. 한 손으로 육중한 대검을 들어올린다.

    “트렌세르노님의 이상은 틀리지 않았음을.”

    당장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갖춘다. 살기를 내뿜는다. 이 전장, 싸우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지 않은가.

    “셀룬의 우국인 차리친에서 반란을 일으킨 네년을 처형하겠다.”

    “네가 틀렸음을 그 목숨으로 증명해줄게.”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거두기 위한 전투에서.

    “비기.”

    시작부터 전력전개인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거리를 무시하고 적을 벨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힘인가.

    그러나 그 무서운 힘에도 약점은 존재한다.

    “후우.”

    데모니아의 비기가 발동되기 직전, 라트는 생명의 연금술로 눈앞에 바위벽을 만들었다.

    무색의 연금술로도 바위벽을 만들 수는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내 비기를 알고, 있어?”

    데모니아는 완벽하게 두 쪽으로 쪼개진 바위벽 사이로 라트의 비웃음을 목도할 수 있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데모니아의 비기는 거리를 무시한다. 그러나 거리를 무시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것밖에 벨 수 없어. 그러니까 비기를 사용하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만이다.

    무색의 연금술로 바위벽을 만들었다면 바위벽이 만들어지기 전에 검격에 당했겠지만.

    ‘그리고 데모니아의 비기는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공격하려면 지금이다.

    “후우.”

    자욱하게 뿜어진 연기가 형용할 수 없는 형태로 뒤바뀌더니 어느 사이에 창의 형태를 갖췄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섯.

    “가라.”

    염동력을 사용해 허공에 떠있는 창들을 데모니아에게 날린다.

    “이 정도쯤!”

    어지러이 날아간 창을 간단하게 피해낸 여검사는 이죽이면서 돌진하자, 라트는 곧바로 손잡이 부분에 있는 방아쇠를 당겼고. 두 개의 검이 빛과 함께 격돌했다.

    “큭, 무슨 힘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만…….”

    검이 마주친 순간, 힘이 부닥친 순간, 팔에 실리는 힘의 무게에 저도 모르게 검을 놓을 뻔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가.

    분명 검 째로 라트를 베어버릴 생각이었던 데모니아는 예상 외로 라트의 힘이 강했기에 입술을 씹었다.

    “너! 오러도 다루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런 힘을!”

    서서히 대검의 칼날이 베어진다. 당연한 결과다.

    라트는 오러를 다루지 못하니까. 대검을 아무리 마력으로 강화되었다고 해도 루아타 공작 수준의 마법사가 강화 마법을 걸어주지 않는 이상 오러 블레이드를 감당할 수 없다.

    “이대로 죽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이데른과 검을 나눌 때도 대검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생명의 연금술로 쌍검을 연성해서 싸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바로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안타깝게도.”

    라트가 무색의 연금술로 날렸던 창은 되돌아오는 자다. 한 번 투창되었다면 파괴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투창한 자에게로 돌아오는 창.

    시간이 흐른다면 이대로 대검 째로 쪼개져 베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죽는 건 너다.”

    순식간에 라트의 몸 뒤에서 다섯 개의 창이 나타났다.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갑작스럽게 창이 출몰하자 데모니아의 눈동자에 순간 당황의 빛이 물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