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99화 (199/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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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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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이 다가옵니다!”

    그 목소리가 들린 건 일주일이 지난 대낮이었다. 성벽으로 가 전방을 주시하니, 떨어진 별의 말대로 대략 6천이 넘는 병력이 서서히 성벽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병 4000명에 궁병 1500명. 그리고 500은 기병인가.’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

    보라색 단발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머리색과 똑같은,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는 중이다.

    ‘정말로 데모니아가 오긴 했네.’

    친숙하다면 친숙한 NPC다. 차리친 왕국에서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보았던 NPC 중 한 명이니까.

    그러나 반대로 친숙하지 않았다.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눈앞의 여자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다. 귀족이 아니었다. 스스로 충성을 맹세한 국왕을 배신했다.

    그렇기에 친숙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백작님.”

    라트보다 한 발 늦게 도착한 쥬라스 자작이 걱정스러움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라트를 불렀다.

    무엇이 그리도 걱정스러운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로델세나 성의 영주는 무능하다.

    그러나 무능하면서 탐욕이 많은 개돼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 전하께서 내려주신 자신의 작위와 지위 그리고 임무에 충성을 다하는 자였다.

    겁쟁이지만, 용감하다. 그렇기에 과연 적의 군세를 막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겠지.

    그런 사람 싫어하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한다.

    “적이 바로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시가전을 대비해서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켜라.”

    “예!”

    자작이 옆에 있던 부장에게 급히 명령을 내리자, 부장은 그 즉시 백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함정은 전부 마무리 됐나?”

    “그렇습니다.”

    아군의 병력은 약 4천. 그 중 500은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서 급히 징집한 병사들이다. 성벽 없이 싸운다면 확실히 불리한 숫자이기는 하지만.

    ‘굳이 성벽이 있으니 이용해 먹어야지.’

    “성벽 위에는 궁병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성문으로 내려간다. 궁병들에게는 고개를 숙여서 적의 시야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으라 하도록. 그리고 언제든지 화살을 발사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전해두고.”

    “알겠습니다.”

    자작 역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라트는 한숨을 내쉬면서 적을 바라보았다.

    적은 발리스타를 만들어왔다. 아마 이곳으로 오면서 천천히 발리스타를 조립한 거겠지. 그럼에도 섣부르게 성에 접근하지 않고 발리스타로 성문을 부술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병이 좀 있었으면 편했으려나.’

    그 모습에 절로 한탄이 나왔다. 지금 기병이 있었더라면 적을 덮칠 기회인데 말이야.

    라트 쪽 부대는 기동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기병은 전부 다른 부대에게 나눠준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러나 불평을 한다고 해도 이제와서 없는 기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오로지 백병전만으로 적을 상대해야한다.

    ‘불평은 나중에 해야지.’

    “하임 남작, 슈론 남작.”

    “하명하십시오.”

    라트의 부대에 있는 마법사 중에서 귀족인 이들을 부르자, 그들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휘하의 마법사를 데리고 적을 요격한다.”

    “적이 디스펠 마법을 쓰거나, 똑같이 마법을 사용해서 상쇄시킬 겁니다만,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화살은 거리가 닿지 않지만, 마법은 또 다르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마법에 대한 대비도 확실히 해두고 있겠지만.

    “적의 마법사가 당분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만 만들면 되니까.”

    마법사의 단점. 그것은 한 번 마법을 사용하면 다음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울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런 단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멀티 캐스팅이라는 희귀 기능이 필요하지만, 이곳에 있는 마법사 중에서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바로 시작하면 됩니까?”

    “그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두 남작이 급히 마법사 부대로 가려는 순간.

    “아, 그리고.”

    라트가 급히 말을 꺼내자 고개를 두 남작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마법을 사용한 후에는 곧장 고개를 숙여라. 명령이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두 남작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걸음을 돌렸고 이내 마력이 밀집되는 기운을 느껴졌다.

    그 기운을 라트 뿐만 아니라 적 역시 감지하였는지 상대 역시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한다.

    각자의 마력이 증폭되어가고, 서로 마법을 퍼붓거나, 각자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려 한다.

    격돌이 시작되려고 하는 긴장되는 순간.

    “후우.”

    라트는 아무렇지 않게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여유롭게 연기를 입에 머금었다.

    ‘마법으로 피해를 줄 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고민을 안했겠지.’

    셀룬군이 트렌세르노군에 비해 마법사의 질과 양이 모두 뛰어나다지만, 부대를 나눴으니 당연히 마법사의 숫자도 그만큼 떨어졌다.

    그러니까 현재 적과 아군의 마법사의 숫자는 별 차이가 없어. 다시 말해 각자 보유한 마법의 화력은 비슷하다.

    당연히 마법으로는 피해를 줄 수 없겠지. 처음부터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법을 사용하라고 한 이유는.

    “만연하라.”

    과연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가 주문을 외워야하는, 빈틈을 보인 순간에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지하에 박혀있던 거대한 바위가 대지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흙으로 만들어진 손이 거대한 바위를 적군을 향해 던졌다.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고.’

    화살 범위 밖에 있으면 마법을 상쇄할 수 있으면,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데미지를 입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오산이다, 무른 판단이다.

    적의 지휘관이여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 후작이여. 아니 이제는 후작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여자여.

    “저건!”

    적들의 비명이 귓가에 들려오자, 라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쏘아올린 바위로 노리는 건 두 개의 발리스타 중 하나.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겁먹지 마라!”

    사납게 쏘아붙이며 자신의 검을 뽑아든 데모니아는 쏟아지는 바위 덩어리를 베지 않고 검면으로 밀었다. 발리스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한지 오래다.

    “시도는 좋았어.”

    바위를 베어봐야 쪼개질 뿐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밀어낸 거겠지. 생각은 좋았다. 시도 역시 좋았다. 그렇지만.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데모니아의 힘에 의해 바위가 지상으로 떨어지자 적군은 모두 안심했다. 그것이 독인지도 모르고.

    “뭐지?”

    일순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데모니아의 눈썹이 올라갔고 라트의 입가에 싸늘한 비소가 머물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수한 파편으로 변해 순식간에 전방의 적들을 휩쓴다.

    “이걸로 돌려줬다.”

    너희가 우리에게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렇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의 전법에 당한 기분은 어떨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이 자식이…….”

    입술을 악물며 자신을 노려보는 데모니아의 시선에 라트는 다시 한 번 싸늘하게 웃었다.

    분한가? 그랬겠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러나 너는 분노와 함께 굴욕 역시 씹고 있겠지.

    “부상자를 옮긴다! 공병 어서 발리스타를 준비해라!”

    데모니아가 공병에게 발리스타를 쏠 준비를 다그친다.

    확실히 발리스타의 준비가 갖춰지면 무색의 연금술로 성문을 틀어막는다고 해도 무한정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알고 있다. 떨어진 별도 성문이 뚫리는 게 시간문제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바위 파편에 당한 적의 수는 겨우 100명가량. 아직 적과 아군의 전력은 천지차이다.

    계속 바위를 날린다면 적의 숫자를 더 줄일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라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파이프를 입에서 때고는 주저앉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라트의 능력을 봤으니 데모니아 역시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고 보일 차례다. 위험하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래서 병사들과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명했다.

    ‘데모니아의 비기는 무시무시하지.’

    두 대륙을 통틀어도 굉장히 이례적인 비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엔스리드 백작님. 백성들을 전부 성으로 대피 완료시켰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고 계십니까?”

    “댁도 빨리 고개 숙여.”

    보고를 하러 온 쥬라스 자작이 라트의 말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적의 화살이 성벽에 닿지도 않는 거리입니다.”

    “저 여자의 검은 거리를 무시한다.”

    “예?”

    “말 그대로다.”

    통상 검사라고 함은 적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으면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오러 마스터가 가지는 약점이었다. 검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오러 소모가 심하다.

    그러나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는 다르다. 통상적인 검사와는 달리 그녀는 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검격을 날릴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비기. 거리를 무시하고 눈에 닿는 그 어떤 것이라도 벨 수 있는 힘.

    “자작도 알다시피, 브로켄 후작님의 비기는 무엇이든 베는 검이다. 검을 다루는 대부분의 오러 마스터가 가지는 비기지.”

    미르차르드 후작의 비기는 인지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이 막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막을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저 여자,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는 거리를 무시하고 베는 비기를 가지고 있다.”

    “거리를 무시, 한다고요?”

    “그래. 눈에 보이는 거 한정이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전부 고개를 숙이라고 있으라고 명령한 거다.”

    “과, 과연.”

    뭘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가. 라트는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발리스타가 전부 다 만들어진다면 성문은 순식간에 뚫리게 된다.

    발리스타와 라트와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무색의 연금술로 발리스타를 엉망으로 만들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날아오는 탄환에 무색의 연금술을 쓰자니.’

    그건 무리지. 라트는 피식 웃어버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동체 시력이 된다고 해도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워야한다.

    주문을 외우는 사이에 탄환이 성문에 적중할 거다.

    “쥬라스 자작.”

    “예.”

    “여기에 있다가 적이 성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궁병들에게 화살을 쏘라고 이르도록. 마법사들은 알아서 판단해서 마법을 쓰라고 하고.”

    “백작님은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아래로. 곧 적이 들이닥칠 테니 지휘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말을 남기고 성문 쪽으로 몸을 던진 라트는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염동력으로 몸을 띄워 사뿐히 착지했다.

    눈앞에 보이는 병사들은 검과 창을 들고 있는 보병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는 건 기병을 막는데 효과 핸드 캐논을 들고 있는 총병이 있다는 것 정도인가.

    “백작님이다.”

    “엔스리드 백작님이시다. 다들 경례!”

    모든 병사가 갑작스럽게 그것도 괴상한 방법으로 성벽 위에서 낙하한 라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눈에 존경이 깃들어있는 이유는 아마도 라트가 켈랑과의 전쟁에서 벌인 활약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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