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93화 (19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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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한 모금, 담배를 흡입하며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한다. 어차피 라트가 여기 있는 게 들통 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저 남자를 죽였다면 그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

    ‘꼭 성 밖에서 적을 교란할 이유가 없잖아.’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주택가에서 소란을 일으켜 전력을 분산시키고 조금씩 그 전력을 깎아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건 무리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조금 있으면 셀룬의 군단이 성으로 침공할 거다.

    트렌세르노 역시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최대한 셀룬의 군단에 피해를 주고, 단주에게 배신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단주의 아들을 탑 안에서 빼내려고 한 거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수성전을 준비해야하는 입장에서 모든 전력을 탑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적이 인질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면 전력 중 일부를 탑으로 보내겠지.

    인질을 지키면서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즉석에서 나온 작전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오러 마스터 두 명이 한꺼번에 오지는 않을 거야.’

    조금 있으면 셀룬의 군단이 이쪽으로 오는데 오러 마스터 두 명을 동시에 탑으로 보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 라트의 힘을 모르고 있으니 한 명도 보내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최대 오러 익스퍼드나 올까.’

    한 명, 혹은 두 명 정도의 오러 익스퍼드를 보내서 라트를 끝장내고 단주의 아들을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보낸 오러 익스퍼드가 감감 무소식이라면?

    그 때는 좀 더 많은 전력을 보낼 거다. 그게 이어지고 이어지면 상대의 전력을 깎아먹을 수 있다. 어쩌면 젠 지거나 데모니아가 직접 오게 될 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충분해.’

    라트가 탑에서 버티고 있다면 적의 전력 중 하나인 몬스터 테이머의 능력을 묶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러 마스터의 발까지 묶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쪽이다!”

    고함 소리가 귀를 때린다.

    “이게, 뭐야.”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참극에 눈을 찌푸린다. 바람이 숭숭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 곳곳에 새겨진 시체의 밭. 그 광경을 보고 그 누가 참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은 어디 있나.”

    얼어붙은 병사들 사이로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기세를 보아하니 상당한 실력자처럼 느껴진다.

    ‘오러 익스퍼드. 한 명인가?’

    노인의 나이는 적어도 60은 넘어보였다. 한 평생을 다 받쳤음에도 결국 마스터의 벽에는 이르지 못한 자인가.

    그러나 그 누가 비웃겠는가. 익스퍼트만해도 재능이 없으면 절대로 오르지 못할 경지인데.

    “저기 있습니다!”

    병사 중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트를 가리킨다. 적의 모습을 확인한 노인이 검을 뽑아든다.

    그러자 병사들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 전까지는 바닥에 즐비한 피와 시체의 모습에 질겁해 마지않았던 것이 희망과 선망의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기 바쁘다.

    “네 이놈! 내 친히 목을 떨어트려주겠다!”

    이 공간에 들어온 수많은 이들의 믿음을 등에 업고 노인은 라트가 있는 곳으로 도약했다.

    ‘믿음이라.’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랴. 평균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오러 익스퍼드는 압도적인 경지,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더욱이 노인은 한평생 기사로써 지내며 수많은 이들의 선망을 얻었을 것인데.

    그래서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노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염동력으로 노인을 허공에 멈춰 세운다. 시리아나 오러 마스터라면 이 구속을 쉽게 풀어버릴 수 있을지 모르나 오러 익스퍼드는 아니다.

    “무슨!”

    허공에 떠있는 채로 몸이 움직이지도 않자 노인이 당황하여 소리를 친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당황스럽겠지.

    당황한 노인을 무심히 바라보던 연금술사는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리며.

    “만연하라.”

    죽음을 선포했다.

    바위로 만들어진 원형의 기둥 두 개가 충돌한다. 그러나 바위가 부딪치는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들린 것은 살이 으깨지고 뼈가 갈리는 소름끼치는 소리.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다가오는 두 기둥 사이에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노인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우웩.”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내장과 인분이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자, 병사들은 그것을 차마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후 구토를 했다.

    “겨우 이 정도.”

    오러 익스퍼드, 뛰어난 경지다. 굉장한 경지임은 인정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일 뿐이다.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의 동경과 질투에 섞인 시선일 뿐이다.

    순수하게 검으로 싸웠다면 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다. 이곳은 전장이고, 서로의 목숨을 거는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가진 힘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한다면 오러 마스터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이 현재 라트였다.

    오러 마스터와 전투를 할 수 있는 자가 오러 익스퍼드에게 질 리가 없다. 질 수가 없다. 애당초 상대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다.

    그렇기에 노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적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죽으려고 오는 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너희도 죽어.”

    이미 트렌세르노의 귀에 라트가 여기 있음은 알려졌다. 그렇다면 다른 병사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어.

    “만연하라.”

    공간이 꿈틀거린다. 변화한다. 휘몰아친다. 믿지 못할 그 광경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피로 얼룩져, 숨을 잃은 자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이걸로 약 150명. 거기에 오러 익스퍼드 한 명 포함.”

    일반적인 병사들이기는 했지만, 일단 그 수를 줄여놓으면 이어지는 전장에서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러 익스퍼드를 한 명 처리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다. 라트와 같이 익스퍼드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게 아니야. 그렇다고 전투에서 일반 병사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익스퍼드만 골라서 죽이고 다닐 수도 없다.

    이렇게 그 숫자를 한 명 줄여놓은 건 꽤나 좋은 성과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명 더 올 가능성이 높다.

    ‘이쪽 상황을 모르니까.’

    이곳에 온 모든 병사를 학살한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위에 언급했던 대로, 병사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여놓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라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알리지 않기 위해서다.

    라트가 여기 있는지는 알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지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지 상황.

    트렌세르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쪽에서 전투가 한창 이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트가 죽어가고 있을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트렌세르노가 반란에서 사용했던 정보 통제의 소규모 버전이지.’

    정보를 통제해서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든 상황.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제일 묘수는 바로 오러 마스터를 보내는 거지.’

    내부의 적을 남겨두면 위협이 도사린다. 그러니 오러 마스터를 보내서 단번에 상황을 정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트렌세르노는 지금 이 시간에도 라트를 죽였다는 보고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금술사를 상대로 오러 마스터를 보내겠다고? 만약 라트가 트렌세르노의 입장이었다면 절대로 그리하지 않았으리라.

    “실례.”

    ‘허어.’

    그러나 다음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명의 인영이 눈에 들어오자 라트는 마음속으로 감탄어린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만남이군. 엔스리드 백작.”

    “댁이 벌써 올 줄은 몰랐는데, 하이데른 공작.”

    젠 지거 하이데른, 차리친의 두 오러 마스터 중 한 명이며 트렌세르노가 가진 최강의 패 중 하나.

    “이젠 공작이 아니다.”

    확고하게 자신은 이제 귀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습에 라트는 혀를 차면서 대검을 굳게 쥐고 진지하게 상황에 임한다.

    ‘꽤 좋아하는 NPC인데 말이야.’

    노르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단을 가진 차리친. 그 차리친에서 최강의 기사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자. 그것이 눈앞의 사내였다.

    그리고 차리친 최강의 기사라는 타이틀은 다시 말해서 노르스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뜻이기도 하다.

    “트렌세르노님의 우리의 이상을 부정한 죄, 목숨으로 받겠다.”

    그 최강의 검사와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줄이야. 기사의 긍지와 충성이 이상 아래에 꺾여 더 이상 기사가 아니게 된 하이데른과 싸우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실망했나? 아니 그건 아니다. 어떻게 실망할 수 있겠는가. 눈앞의 남자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상대다. 그런 상대에게 실망을 했다고 하면 그건 주제를 넘은 발언이지.

    인벤토리에서 강화 포션을 꺼내 전부 입으로 털어 넣은 라트가 비릿하게 미소한다.

    “받아가 보시던가.”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하이데른이 위로 도약한다. 그 손에 들고 있는 검에 날카로운 푸른색 빛이 머금는다.

    오로지 상대를 베겠다는 일념 하에 검을 휘두른다.

    정면승부는 무리다. 미르차르드와 싸울 때는 루아타 공작의 마법 덕분에 검을 어느 정도 겨눌 수 있었을 뿐이다.

    격돌하는 순간 라트의 대검이 조금씩 갉아 먹혀 종극에는 부서지겠지. 그러나 그 때보다 더욱 성장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음?”

    다음 순간 라트의 대검이 손에서 사라지자, 하이데른의 머리에 의문이 감돌았다. 그러나 의문과는 별개로 검은 라트를 두 쪽 내기 위해 달려든다.

    푸른 번개가 머리에 직격하려는 그 찰나의 순간. 라트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하이데른의 검을 피했다.

    “뭐, 지?”

    검이 빗나가자, 재빨리 뒤로 물러선 하이데른이 있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손과 라트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요상한 힘을 쓰는군.”

    현재 라트의 실력으로는 오러 마스터의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덕분에 미르차르드를 상대할 때도 상처투성이가 됐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힘은 바로 염동력. 조금 전 오러 익스퍼드와 달리 염동력으로 어떻게든 하이데른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그 정도면 공격을 피하기는 충분했다.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거다.”

    라트가 쓰는 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은 것보다 숨긴 힘이 많다고 판단한 하이데른의 손에 더욱 힘이 실린다.

    “후우.”

    그와 반대로 라트는 여유롭다는 듯 입으로부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여유로웠따.

    ‘염동력으로 잠깐 멈출 수는 있지만. 피하는 게 고작이야.’

    겉모습과 달리 마음은 전혀 여유롭지 않았지만 말이다.

    ‘받아쳐야해.’

    이기려면 거리를 벌려야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거리를 벌릴 수 없다. 그렇다고 대검으로 받아치자니,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시 한 번 하이데른의 검이 번뜩이는 순간. 라트는 염동력과 생명의 연금술을 동시에 사용했다.

    염동력으로 하이데른의 움직임을 막고 생명의 연금술로 잡아먹는 자를 만들어낸다. 염동력의 구속을 풀어낸 하이데른이 주제없이 검을 떨어트리자, 쌍검을 교차하여 그 공격을 막았다.

    ‘어떻게?’

    자신의 검이 막혔다는 사실에 하이데른은 두 번 놀라고 말았다. 하나는 라트의 손에 갑자기 생겨난 검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러 마스터와 오러 익스퍼드가 아예 싸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오러 블레이드 때문이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면 익스퍼드 역시 마스터를 상대로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다. 결국 마스터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를 견뎌낼 수 있는 검이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로 놀란 이유는 오러로 신체를 활성화시키고 있음에도 눈앞의 상대가 힘에서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아서다.

    “요상한 재주가 많아. 생각보다 강하군.”

    “그러는 그쪽은 생각보다 약한데.”

    말을 주고받으며 검 또한 주고받는다. 염동력으로 상대를 멈춘다. 공격을 막고 반격을 노린다. 쌍검이 사라지면 다시금 만든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대치.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황은 라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염동력도 생명의 연금술도 무한히 사용할 수 없다.

    ‘조금만 더.’

    검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지금 거리는 라트의 거리가 아니다. 어떻게든 떨어트려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지금!’

    검 하나로 하이데른의 검을 흘리고 다른 검으로 그의 심장을 노렸으나 오러 마스터는 단순히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 라트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혹자가 보자면 분명 회심의 공격이었으리라. 공격이 실패했으니 실망할 법도 하건만, 연금술사는 입가를 이죽인다.

    “만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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