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2 / 0229 ----------------------------------------------
1부
다시 탑으로 이동해 염동력을 사용해서 안으로 들어간 라트는 꼭대기에 있는 방에서 유유히 기다리고 있는 소년과 다시금 재회했다.
“다시, 오셨네요?”
조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이 얽혀온다. 꼴에 그래도 암살자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여기서 도망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태연하다.
“당연히 다시 와야지. 널 여기서 빼내주기로 마음먹었니까.”
“그렇게 하면…….”
“그냥 옆에 붙어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고작 한 명을 구하겠다고 이 난관을 넘어서야 하는 것에 짜증이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찌할 것인가.
엘리와 케이네의 얼굴을 떳떳하게 보기 위해서 구한다. 그것이 전부다. 그 이외의 목적은 없다. 부가적인 가치가 있다면 핏빛 그림자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정도?
‘우선 준비를 좀 해둘까.’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해서 이 방으로 올라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계단을 지웠다.
이렇게 해도 올라올 수 있는 놈들은 알아서 올라올 거다.
‘이 방에서 싸우면 위험해.’
라트와 소년 밖에 없는 방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개인이 다수와 상대하기 위한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아.
오러 마스터가 이쪽으로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쪽에 집중하겠지.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으니까.
‘문 밖에서 싸우는 게 최적.’
현재로써는 문을 등지고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널 죽이려고 안으로 들어올 거다.”
계단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이어, 몇 가지 준비를 끝낸 라트는 방으로 들어와 소년에게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말했다.
“그래요?”
소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문다.
“안 무섭냐?”
“각오했어요. 이 술식만 아니었으면 제가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저 때문에 아버지랑, 삼촌들이 붙잡혀 계신 거잖아요.”
그 얼굴에 슬며시 죄책감이 드리우자, 라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 때문에 아슬렌님이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네가 인질로 안잡혔어도 다들 독에 중독돼서.”
“그것도 아저씨가……. 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미르라고 해요.”
소년이 자신을 또 아저씨라고 부르려고 하자, 라트가 얼굴을 구겼고 그것을 포착한 소년이 라트의 이름을 물었다.
“라트 엔스리드다.”
“엔스리드님이 해독제를 만들어주셨다면서요.”
엔스리드님인가, 학교에 다녔다고 하더니 확실히 예절이 있다.
“해독제야 만들어줬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야.”
결과론만 따지자면, 미르의 말이 옳았다. 라트가 해독제를 만드는데 성공한 순간, 핏빛 그림자는 전장터로 올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다는 것뿐이다. 소년이 인질로 잡히지 않았더라도 첩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으면, 네가 인질로 붙잡혀 있지 않았다고 해도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어.”
“그렇지만.”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
라트는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려고 하는 미르의 말을 끊었다.
“몇 살이지?”
“10살이요.”
10살이라, 죄책감에 시달리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다.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지.
“그렇게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가질 필요 없어.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도 하지 마. 네가 죽으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잘도 편하게 지내시겠다.”
마지막 말에 그 전까지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소년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죽으면 부모가 슬퍼하리라는 건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대화가 빠르지.
‘참척이라고 하던가.’
분명 슬프고, 슬퍼서 참척(慘慽)이라고 했었지.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떠나가는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그 사단이 나는 건 막아줘야지.
“어린이가 어떤 말썽을 부려도 크게 혼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미르가 잠시 생각에 빠지자, 라트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려줬다.
“어려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잘 모르겠어요.”
“어려서 그런 거 맞아.”
정답이다.
“너희와 똑같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게 돼. 물론 그렇지 않은 어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어른도 있지만, 보통은 그런 어른들이 더 많다. 적어도 예전에 라트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그랬다.
문뜩, 어린 아이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던 한 연금술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지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만난 어른들도 그랬지.
“그러니까 넌 아무런 고민하지 말고 그냥 살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있어.”
그렇기에 이제는 내가 받은 만큼 해야 할 차례다. 엘리와 케이네 때문이 아니라, 이 소년을 구해야하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생기자 라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쪽으로 올 적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꽤 시간을 지체했는지, 바깥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로 나오지 마. 위험하다 싶으면 소리 지르고.”
“왜 그렇게까지 절 지켜주려고 하세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중 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트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며 확고한 뜻을 담아 말했다.
“어린아이를 지키는 건 어른이 할 일이니까.”
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바라보지 않고 타인의 손에 의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문을 닫았다.
“후우.”
나무로 만든 담뱃대가 아닌, 자신이 직접 만든 담뱃대를 꺼내든다.
‘슬슬 외모 변경 포션의 효과가 끝날 때지.’
“계단이 도대체 어디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계단이 사라져 당황한 나머지, 황망히 지껄이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윽. 우선 넌 장군께 보고를 하고 와라. 그리고 나머지는 사다리, 사다리를 가져와!”
‘수는 약 백 명.’
급하게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보다는 그 수가 적었다. 하긴 여기에 누가 숨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오히려 백 명이나 이곳에 왔다는 것에 놀라야 할 상황이다.
“백부장님. 저기 위에 누가 있습니다.”
“누구냐! 누군데 거기 있느냐!”
‘빨리도 보네.’
한참 전부터 모습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네 놈, 핏빛 그림자의 암살자냐!”
“아닌데?”
“그럼 그 로브는 뭐냐.”
“아, 이거?”
그제야 자신이 아직까지도 핏빛 그림자의 암살자들에게만 지급되는 로브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라트는 슬며시 그것을 벗어 아래로 던졌다.
“그냥 위장용으로 입고 있던 거야.”
“위장용? 네 놈, 도대체 누구냐!”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생각을 하는 게 싫은 걸까. 조금 전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그렇게 정체를 물어봐도, 누가 대답해주겠어.”
“이 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딘 줄 잘 알고 있지. 다 큰 어른들의 압력 싸움 때문에 어린애 하나가 인질로 잡힌 곳 아니야.”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린다. 나머지 병사들은 라트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나, 그는 알고 있다.
아랫놈들한테는 말하지 않은 건가. 그래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이가, 뒤로는 이런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미지가 실추될테니 숨길만도 하다.
‘그냥 백부장이 아닌가보네.’
그의 곁에 있는 병사들은 뒤뚱뒤뚱 사다리를 가져오는 모양새로 보아 어중이떠중이다. 그러나 백부장이라고 불린 병사는 달랐다. 입고 있는 갑옷도 그렇고, 눈빛도 그래.
게다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점도 미루어보아.
‘귀족인가?’
뭐, 저 남자가 귀족인 건 라트가 알 바 아니었다. 라트가 해야 할 일 오직 단 하나, 이곳을 사수하는 것뿐.
“핏빛 그림자가 아니면서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그거야 그쪽이랑 연관 돼있으니까.”
“핏빛 그림자랑 연관이 되어있다고?”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병사는 최대한 열심히 라트의 얼굴을 살펴보며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하긴 외모 변경 포션 때문에 아예 모습이 다르니까.’
“내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지.”
그렇지만 그것도 끝이지. 라트는 외모 변경 포션의 지속 시간이 끝났음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지금 모습으로는 도저히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면, 이건 어때.”
구부정한 등을 올곧게 핀다. 흉측했던 외모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 정도면 알아차리겠지, 싶었는데도 아직까지 자신이 누구운지 파악하지 못한 모양새에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쪽과 이쪽의 거리를 가늠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어때.”
인벤토리에서 염색약을 지우는 약품을 꺼내, 머리에 뿌린다. 그러자 칠흑같이 어두웠던 머리카락이 서서히 여름을 맞이한 나뭇잎과 같은 상그러운 녹색으로 변한다.
사람이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외모보다는 전체적인 이목구비와 몸의 형태 그리고 머리카락의 색이나 형태로 사람을 구별하기 마련이다.
라트의 머리색깔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병사의 눈주름이 자르르, 떨려온다.
“너, 너는!”
드디어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손을 들어올려,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본새가 귀엽게, 그리고 가엽게 느껴진다.
“라트, 엔스리드 백작.”
초록색의 머리, 새하얀 눈동자. 입에 물고 있는 담뱃대. 그 모든 인상착의가 트렌세르노가 유심히 주의를 시키던 라트 엔스리드 백작과 동일하지 않은가.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차렸어? 그런데 그건 내 이름이고, 내 정체는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냐.”
“하하하하.”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너무나 가여워서 웃었다.
트렌세르노는 예상했을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과연 예상이나 했을까? 조금쯤 의심은 했겠지. 그러니까 아이 하나 끌고 오는데 백 명이나 되는 병사를 보냈으리라.
그러나 라트의 전력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켈랑과의 전쟁이 끝난 지는 한 달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첩자는 모조리 잡아들었다. 그런데 타국에 전쟁과 관련된 정보가 나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라트를 연금술사라고만 생각했으리라. 조금 머리가 좋은 연금술사라고 그렇게 생각했겠지.
아니 어쩌면, 배틀 알케미스트라는 것까지는 유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거기까지다.
“나는 너희의 적이다.”
웃음을 멈추고 이 주변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싸늘하게, 읊조린 남자는 조용히 손을 벽에 집었다.
“만연하라.”
탑을 감싸고 있는 벽이 만연하여 시시각각 변해간다. 그 움직임에 병사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곧 사방에서 튀어나온 돌로 만들어진 가시에 온 몸이 꿰뚫려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이 들고 왔던 사다리가 허무하게 지하로 떨어져, 메마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침묵 속에서 단 한 명이 떨리는 숨을 내쉬며, 라트를 바라본다.
그래 단 한 명. 이 병사들을 통솔했던, 라트의 이름을 말했던 남자였다.
“너로는 여기 있는 적을 물리치는 게 역부족이었다고 보고해.”
순식간에 백 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연금술사가 고한다.
“나를 살려주겠다고?”
“그래.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기회야. 그래 두 번은 없어. 여기로 다시 돌아오면, 넌 죽어.”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실이리라. 남자는 자신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그 때는 정말로 죽으리라고 확신했다.
“가라.”
무색의 연금술로 탑 안 곳곳을 휩쓴 가시를 원상태로 만들어, 병사가 탑에서 나갈 수 있게 길을 터준다.
병사가 기가 죽은 강아지마냥 고개를 숙이고 탑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문으로 향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
============================ 작품 후기 ============================
약 기운 때문에 연재가 주구난방이네요.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죄송합니다.시정하겠습니다.
13일은 오후 점심 시간쯤에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