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90화 (19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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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파우논을 제외한 나머지 암살자들이 모이자, 라트는 인벤토리에서 해독제를 꺼내서 넘겨주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던 독이 해독되기 시작하자 암살자들은 감탄을 마지않고, 라트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낸다.

    “자,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그러나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단주의 아들을 구출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도망치는 건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다. 모레 이 성문의 문을 여는 순간, 그 때 도망치면 된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면 이렇게 고민을 안 하지.’

    문제는 그 때 도망친다면, 단주의 아들을 빼내는 시간도 늦어지고 분탕질을 칠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지금 생각은 이렇다. 단주의 아들을 구출한 후 핏빛 그림자의 암살자들을 도망치게 만들고 난리가 난 내부에 숨어드는 거다.

    굳이 성이 아니라도 된다. 밖에 있는 민가 중 아무 곳이나 숨어있으면 되겠지. 그리고 트렌세르노가 어떻게 나올지 살피면서 성에서 난동을 부릴 작정이었다.

    ‘과연 암살자들이 도망친다면 트렌세르노는 어떻게 나올까.’

    체스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트렌세르노는 암살자들을 이용해 전쟁 중에 귀족들을 암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셀룬에 떨어진 별이 있고 오러 마스터와 루아타 공작까지 있는 이상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거다. 아마 트렌세르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군사를 물리지 않고, 이 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적을 막을 확실한 작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작전이 뭔지 알아내야 해.’

    상대의 작전이 성문을 연다고 해도 먹히는 작전이라면 아군의 피해가 꽤 커질 거다.

    “우선 단주님.”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내일 트렌세르노와 만나서 전쟁 중에 어떤 작전을 쓸 것인지 돌려서 물어보시고 저한테 알려주세요.”

    “예.”

    단주라면 트렌세르노에게서 작전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를 맡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암살자들을 통솔해야하니 단주에게까지 작전을 마냥 숨기고 있지는 않을 테다.

    지금 작전을 말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셀룬 쪽에서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떨어진 별이 라트의 말을 제대로 전달했다면 슬슬 셀룬도 움직임을 보일 거고, 트렌세르노도 자신의 작전을 말할 게 분명하다.

    “나머지 분들은 파우논의 귀를 피해서 내일 저녁 쯤 도망칠 거라고 부하들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련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들키지 않는 선에서 단주의 아들을 빼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 이 자리에서는 라트 뿐이었다.

    “아마 내일부터 셀룬 쪽 군단이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트렌세르노가 그 소식을 알게 되면 단주님이 직접 암살자들을 데리고 염탐해보겠다고 해주세요. 그 때 쯤, 아드님을 구하겠습니다.”

    “그리고 염탐하는 척 제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라는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단주를 포함한 모든 인원이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라트는 마음을 놓고 공작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위험하면 염동력을 쓰면 되니까.’

    오러 마스터 두 명을 한꺼번에 마주치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염동력으로 도망칠 수는 있을 거다.

    이야기를 끝나자, 서로가 서로의 일을 하기 위해서 흩어진다.

    라트는 이 성에 주둔중인 병사들을 살펴보며 입맛을 다셨다.

    ‘성문을 연다고 치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일어난 공성전 중에서 안으로 침투해 성문을 연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하나가 이루크 성이었고, 다른 하나가 슬렌베다.

    그리고 이곳에서까지 성공한다면 총 3번에 이르게 된다.

    ‘공성전에서 성문을 연다는 거 자체가 굉장한 메리트를 가지는 일이니까.’

    성문을 열면 성벽을 이용한 수비를 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 공성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유리한 국면에 치닫게 된다.

    문제는 다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시가전을 염려해야한다. 지휘 체계를 붕괴시킨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시니아 성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많다.

    ‘제일 베스트는 여기서 트렌세르노를 죽이는 거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현재 시니아 성에는 젠 지거와 데모니아가 같이 있다. 오러 마스터 두 명의 비호를 받고 있는 트렌세르노의 목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겠지.

    경화수월을 쓰면 트렌세르노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 도망치는 게 문제다. 오러 마스터 한 명이 따라붙는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두 명이 따라 붙는다면.

    ‘그 땐 게임 오버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트렌세르노의 목을 제외하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건 뭘까.

    ‘전력을 와해시키는 거.’

    트렌세르노를 죽일 수 없다면, 차선책은 시니아 성에 있는 병력을 말살시켜야 한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밟아놔야 해.

    “문제는.”

    라트는 입맛을 다시면서 성 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있는 남자가 과연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까? 그게 의문이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어. 단주가 조그마한 낌새를 보였다고, 라트가 여기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로브를 걷고 암살자들을 살펴보던 남자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대비책을 만들 수가 없다. 트렌세르노가 얼마만큼 뛰어난지도 모르고 있으며, 그의 작전도 모른다. 게다가 심중조차 모르고 있지.

    ‘결국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건가.’

    이래서 랜덤 NPC가 귀찮다는 거야. 다른 중요 NPC는 어지간해서는 그 의중과 캐릭터의 성격을 꿰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대비책을 생각할 수 있지만, 랜덤 NPC는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그럴 수가 없다.

    ‘질 가능성은 없지만.’

    성문을 열 수만 있다면, 정면 대결에서는 셀룬의 군단이 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라트는 다시금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엥? 또 지진인가?”

    담배를 태우던 중 발밑에서 조그마한 진동이 느껴졌다.

    ‘오늘은 조금 쌘데.’

    최근 며칠 동안 지진이 자주 일어났지만, 겨우 여진 수준이었다면 오늘 따라 지진이 조금 더 길고 쌨다.

    ‘설마 전투 중에 지진이 일어나는 걸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전투 도중 일어나는 천재지변까지 계산할 수는 없으니까.

    지진이 일어난다고 시간은 계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그냥, 여진이라고 치부해버린 라트는 계속해서 담배를 태우는데 집중했다.

    ***

    태양이 하늘의 끝에 걸려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는 오후.

    “트렌세르노님. 셀룬 측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야?”

    척후병의 정보에 트렌세르노는 의문을 표했다. 지금까지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움직이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수상하네요.”

    트렌세르노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때리며 혀를 찼다. 그 서류에 적혀져 있는 내용은 크레몬 성에 있는 셀룬의 군단이 아직까지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크레몬 성에 있는 군단은 가만히 있는데, 이쪽에 있는 군단은 움직인다.”

    두 쪽 모두 몰아치듯이 공격해도 모자란 상황인데, 한 쪽만 움직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상한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염탐을 하고 올까요?”

    “음?”

    핏빛 그림자의 단주, 아슬렌의 물음에 트렌세르노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염탐을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지금쯤 셀룬은 경비에 어마어마한 신경을 쓰고 있을 거다.

    거기에 떨어진 별까지 있으니, 염탐이 성공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봐야한다.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인 암살자를 성공하지 못할 작전에 소모할 수는 없는 일.

    “맡겨주신다면, 정보를 빼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을 보이는 단주의 말에 트렌세르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저 자신감의 발로는 무엇인가.

    같은 단주급 암살자라고 하지만, 떨어진 별과 아슬렌의 실력을 비교하자면 아주 근소한 차이로 떨어진 별이 위다. 그런데도 정보를 빼올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그렇게 해주세요. 시간은 오늘 밤이면 되겠죠?”

    “예.”

    “준비하러 가보십시오.”

    왠지 모르게 트렌세르노는 황급히 단주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지만, 단주는 그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준비를 위해 즉시 자리에서 사라졌다.

    “젠 지거, 데모니아.”

    “예, 트렌세르노님.”

    “하명하십시오.”

    단주가 물러나자마자, 두 오러 마스터가 트렌세르노의 부름에 응답했다.

    “오늘 밤 암살자들이 자리를 비우면 기사단을 몰래 후방으로 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방에 나서 싸워야하는 기사단을 후방으로 빼라는 명령에 두 오러 마스터는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그 둘의 눈빛에 보이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와 트렌세르노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뿐이었다.

    “크룩스,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거의 다 됐습니다.”

    “잘 됐군요.”

    크룩스의 대답에 눈빛을 빛내며 손을 비비던 트렌세르노는 문뜩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젠 지거 하이데른을 바라보았다.

    “주인 없는 산맥 쪽에 보낸 병사들에게서 엔스리드 백작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없습니까?”

    “예.”

    “흐음.”

    그 대답에 손을 비비고 있던 트렌세르노는 양손을 풀고 턱을 괴었다. 그 남자, 자신에게 감히 틀렸다고 말한 건방진 남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분명 있을 건데.’

    그리도 당당하게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박했던 이가 도망쳤을 리가 없다. 그러나 주인 없는 산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배편은 아니겠지.’

    배에 탑승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배편으로 셀룬까지 도착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을 이용했을 리가 없다는 게 트렌세르노의 생각이었다.

    ‘암살자 무리에 섞여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신입 암살자들은 물론이오 중견 암살자들로 보이는 이들의 얼굴까지 살펴봤음에도 라트와 비슷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서 무언가를 준비 중인가.’

    연금술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라트가 외모를 바꾸고 암살자 무리에 숨어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트렌세르노는 라트가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데모니아.”

    “예, 트렌세르노님.”

    “단주의 아들을 감시하는 병력을 배로 늘려주세요.”

    “예.”

    조금 전 단주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탑을 감시하는 병력을 늘려달라고 말하자, 크룩스가 웃었다.

    “어차피 아들을 구하려고 해봐야, 쓸데없는 짓임을 알게 될 뿐이지 않습니까. 굳이 감시 병력을 더 늘릴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명령에 따르세요.”

    “알겠습니다.”

    탑에 감시 병력을 늘리는 건 좋은 생각이었다, 상대가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때는 분명 통했을 거다.

    문제는 단주의 아들을 빼내려고 하는 이가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안 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네?”

    그렇기에 탑 바깥쪽의 감시가 삼엄해졌음에도 쉽사리 잠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단주의 아들은 꼭대기에 있었지.”

    며칠 전 탑을 살펴봤을 때 단주의 아들이 어디 있는지 미리 살펴보았던 라트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암살자들이 이 성을 나갈 때까지는 앞으로 20분 정도가 남아있다.

    그 사이에 단주의 아들을 구출해서, 암살자들한테 넘기고 라트는 몸을 숨겨야한다. 촉박하다면 촉박하지만, 여유롭다면 여유로운 시간.

    “안녕?”

    꼭대기에 있는 방문을 연 라트는 방에 갇혀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인 단주의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 세요?”

    갑작스러운 타인의 등장에 단주의 아들은 불안한 눈으로 라트를 바라본다.

    이런 방에서 홀로 감금당했으니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당연한가.

    “니 아버지 지인.”

    그렇지만 계속 불안해하면 데리고 빠져나갈 수 없으니, 우선을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서 입을 연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알아. 네 어머니도 알고.”

    아버지는 중독 상태에서 구해줬고, 어머니는 제정신으로 만들어줬다.

    생각해보니까, 이 정도쯤이면 눈앞의 소년은 당장 라트에게 감사하다고 절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평생 라트를 위해야 할 수준이다.

    ‘뭐 굳이 그럴 생각은 없지만.’

    “준비해. 나갈 거니까.”

    “예?”

    “나갈 거라고. 니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대화의 흐름이 너무 빨랐는지,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단주의 아들을 바라보자니 라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빨리 와.”

    순간이동은 라트 혼자서 밖에 할 수 없다. 즉 여기에 들어오는 건 간단했지만, 나가는 건 꽤 복잡한 일이었다.

    여기서 끌 시간은 없어, 라트는 단주의 아들에게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재촉하면서 탑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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