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86화 (18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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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모든 것은 라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신입 암살자로 위장하여 핏빛 그림자의 본거지로 온 암살자들 사이에 숨었다.

    겔로그가 자신의 지부에 들어온 신입 암살자라고 말하자 그 누구도 라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본거지에 모인 암살자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포탈을 이용해 시니아 성으로 향하는 것으로 끝.

    포탈을 타고 들어갔음에도 암살자들이라고 하자, 별다른 신분 조사도 없었다.

    적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성공해자, 라트의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그 누구도 그것이 라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재 라트는 일부러 자신의 등을 구부정하게 걸어 다녔고, 얼굴은 곰보가 잔뜩 피어있었으며 머리와 눈은 검은 색인 상태다.

    어떤 이가 이 모습을 보고 라트 엔스리드라고 생각할까. 그저 추한 신입 암살자라고 여길 뿐이지.

    “왔나?”

    암살자들이 시니아 성에 도착하자, 트렌세르노가 먼저 나와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조금의 환영도 들어가 있지 않다. 싸늘하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한 눈빛이 내리꽂힌다.

    “엔스리드 백작이 들렸다고 들었네.”

    ‘역시나.’

    라트가 베르렐에 잠입한 것은 이곳에 있는 암살자 중에서도 일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트렌세르노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은 즉, 첩자는 있다는 게 확실하다는 소리다.

    “그렇습니다.”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단주는 대표로 나서, 트렌세르노의 말에 긍정했다.

    “어째서 그를 붙잡지 않았지?”

    “아무런 명령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현문우답이었다. 적이 영역에 들어왔는데 잡지 않은 이유가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변명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답이었다고 해도, 트렌세르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관계. 그러나 인질과 독 때문에 벗어날 수 없을 뿐이다.

    “다음부터는 적이 나타나면 꼭 붙잡도록. 만약 다음에도 이 같은 실수가 일어난다면. 자네의 아들이 고통 받을 지도 모르네.”

    트렌세르노의 협박에 단주는 묘한 살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암살자들이 몸을 떨었다.

    이 중에는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도 있지만, 상급 그리고 지부장급 암살자까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 몸을 떨었다고?

    그렇다면 이건 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트렌세르노에게서 군주의 위압감이 느껴지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단 하나다.

    ‘기능.’

    대군을 지휘하기 위한 기능 중 가장 중요시 되는 게 몇 가지 있다.

    아마 그 중 하나인 카리스마 기능을 가지고 있겠지.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그 상위의 기능일수도 있고.

    ‘그것도 상당한 레벨이야.’

    카리스마, 적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아군에는 용기를 심어주는 기능으로 전략가를 지향하는 플레이어에게는 정말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진짜로 전략가인 모양인데.’

    이 기능을 익히고 있다면 트렌세르노는 떨어진 별의 말처럼 뛰어난 전략가일 확률이 높았다.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모든 NPC가 전략가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략가 중에서도 손에 꼽는 이들을 카리스마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다음에도 실수를 했다간, 혹은 자신에게 엿을 먹였다가는 아들을 고문하겠다는 협박을 들은 단주는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굴욕이다, 굴욕적이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의뢰를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중도 아니었다.

    협박에 의해 움직이는 암살자라니. 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가.

    굴욕과 치욕으로 자존심이 너덜너덜하게 변했을 게 분명함에도 단주는 살기와 분노를 씹어 삼켰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기다린다면 저 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손으로 저 남자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살기를 억누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주의 그런 반응 때문에 트렌세르노의 눈은 더더욱 냉철하게 변했다.

    “전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를 벗어라.”

    로브를 벗으라고 명했음에도 그 누구도 명을 듣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트렌세르노는 의뢰인이 아니었다. 충성을 맹세한 이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을 협박하고 있는 쓰레기일 뿐. 쓰레기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존재치 않아.

    그 어떤 암살자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를 벗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트렌세르노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다들 말에 따르라.”

    단주의 말에 모두가 단숨에 로브를 벗었다.

    “얼굴을 들어 나에게 보여라.”

    “얼굴을 들어라.”

    트렌세르노가 명령하는 말을 다시금 단주가 명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트렌세르노는 그들의 행동을 묵인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협박을 통해 암살자들의 목줄을 죌 수는 있겠지만, 세세한 명령까지 듣게 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흐음.”

    하나, 하나 얼굴을 살피던 트렌세르노는 그 중 몇몇 이들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만졌다.

    마치 가발인 것을 확인해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숨어있을 거라고 예상했나.’

    그 모습에 라트는 침을 삼켰다. 설마 이런 이른 시간에 고작 단주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이곳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줄이야.

    놀라울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은가.

    ‘평민 맞아?’

    3년 전만해도 가난한 평민이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머리가 좋다.

    ‘설마 여동생이 납치되는 걸 막을 때 머리라도 다쳐서 지능이 상승됐나.’

    보통은 지능 수치가 떨어지거나 백치가 되는 게 보통이나, 머리를 심하게 다친 후 지능 수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어지간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희귀한 케이스라서 플레이어들도 감히 이런 방법을 통해 지능을 높일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전부 진짜 머리카락이군. 게다가 눈 색깔도 다 다르고.”

    라트의 얼굴은 곰보 때문에 심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인지, 트렌세르노는 라트의 옆을 그냥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연금술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나 보네.’

    아마 그가 백색의 연금술에 관한 지식이 조금 있었더라면, 외모 변경 포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관찰을 했을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처음 보는 암살자들이 많지? 실력이 안 좋은 암살자들까지 이렇게 모으다니. 그럴 이유가 있나?”

    “엔스리드 백작과 대화 도중 셀룬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기에 전부 불렀습니다.”

    “누가 있기에 이 정도 숫자의 암살자가 필요하다는 건가.”

    “욕망의 단검의 단주, 떨어진 별입니다.”

    단주의 대답에 트렌세르노는 떨어진 별이 누구인지 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다시 말하지만, 트렌세르노는 3년 전만해도 평범한 평민에 불과했다.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한다고 한들, 노르스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간신히 할 수 있을까, 수준인데.

    노르스 대륙이 아닌 카르세이나 대륙의 암살자를 알고 있다고?

    ‘이상해.’

    3년 전에는 평범함을 넘어 가난했던 평민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오, 글란츠 백작급 전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두 대륙의 정세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먹고 살기 바빴던 평민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수 있을까.

    ‘3년 전이라.’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바로 튜토리얼 기간이었다.

    튜토리얼 기간 중 다치고 난 후, 트렌세르노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평민이었던 자가, 뼛속까지 새겨진 신분제를 탈피하자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몇 백, 몇 천년의 시간에 걸쳐 도달한 결론을 한 사람이 어떻게 이룩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단 두 가지다. 눈앞의 남자가 인간을 초월한 천재이거나, 그게 아니면.

    ‘그 날을 기준으로 트렌세르노가 트렌세르노가 아니게 됐다면?’

    아끼던 여동생을 다치게 만든 귀족을 용서하고 측근으로 썼다는 것도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자, 설마 나와 같은 플레이어가 아닐까?’

    갑자기 나타난 랜덤 NPC, 3년 전, 공화제, 그리고 삼권분립과 좀비꽃의 꿀까지.

    머릿속에 정보들이 한 가지 사실을 규합해낸다.

    억측이다, 지나친 억측이었다. 그러나 확인해볼 필요는 있어.

    ‘지금 시험해봐야 해.’

    지금이 아니면 트렌세르노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 언제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라트는 입을 열어 나지막이 트렌세르노에게 들리게끔 속삭였다.

    “월드 세리아.”

    이 세계 당장은 현실로 펼쳐져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게임이었던 세계다. 그 게임의 이름을 말한다.

    평범한 NPC라면 라트의 말에 의문을 던질 거다. 아니 그냥 지나가는 혼잣말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겠지.

    이 세계를 월드 세리아라고는 부르는 건, 게임 타이틀이 월드 세리아였기 때문이었다.

    NPC 중에서는 그 누구도 이 세계를 세리아라고 부르지 않아.

    그러나 플레이어라면 다르다. 게임 타이틀의 제목을 들었다면 분명 반응을 할 것이다. 할 수밖에 없다.

    “떨어진 별이 왔다면, 욕망의 단검에 속한 암살자들도 셀룬에 가담했을 수도 있겠군.”

    그러나 라트의 생각과는 달리 트렌세르노는 월드 세리아라는 단어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의 귓가에 들리게끔 말했는데도 일말의 반응조차 없다.

    그 말은 즉, 라트의 예상이 틀렸다는 소리다.

    ‘역시.’

    하긴,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플레이어였다면 내 편으로 만들었겠지.’

    그러나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 증명되자, 라트는 혹시나 했던 기대를 접어버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길드의 모든 전력을 데리고 왔습니다.”

    “좋군. 셀룬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독을 해독해주는 건 물론이오, 아들을 풀어주도록 하지.”

    ‘과연 아들을 풀어줄까.’

    그의 말에 단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트렌세르노가 독을 해독해줄 이유는, 인질을 풀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셀룬에게 이긴다면 풀어주겠다고? 헛소리하지마라. 당장 린느탐보프는 물론이오, 핀스크 왕국 역시 건제하다.

    기사단을 이끄는 공작과 후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기사단까지 손에 넣었지만, 그럼에도 현재 트렌세르노군의 전력은 다른 왕국과 비교하자면 부족했다.

    이제 막 일어난 반란군이 잘 훈련받은 정규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더욱이 차리친을 전복시킨 상황이라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후달리는데, 거기에 셀룬과의 전쟁까지 치룬다면. 상태는 말할 것도 없지.

    특히나 현재 왕국들은 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군사를 키워왔다.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암살자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그리 해주신다면, 명령에 따르도록 하지요. 그러나 약조를 어기신다면…….”

    어긴다면? 단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약조를 어긴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고, 단주를 포함한 지부장급 암살자들은 독에 중독당한 상태인데.

    목죽을 쥐고 있는 것은 트렌세르노였다.

    “어기지 않도록 하지. 그쪽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트렌세르노는 자신에게 목줄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금 그 목줄을 당겼다.

    ‘잘 돌아가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지만, 한쪽이 한쪽의 목줄을 쥐고 있는 관계라니.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트렌세르노는 두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하나는 라트가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단주는 이미 트렌세르노의 독을 해독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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