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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5일. 아니지, 적색 늑대 부족에서 나오고 12일 동안 이어진 노숙 때문일까? 라트는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도 드디어 베르렐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쉰다.
성문을 바라보자, 경비는 생각대로 삼엄했다.
신분패 조사도 철저히 하고 있고, 신분패가 있다고 하더라도 베르렐에 온 용무를 제대로 대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한다.
‘확실히 전쟁 중 답기는 하네.’
그래도 베르렐에 있던 병력은 출전했는지, 성을 지키는 이들은 생각보다 적었다. 더욱이 성벽 반란의 여파를 증명하고 있어,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렵겠는데.’
베르렐에 남은 병력이 생각보다 적을 뿐이지, 그 수는 굉장히 많은 편이고 경비 수준은 굉장히 삼엄했다.
“말은 여기에 버려놓기로 하고. 백작님 저번에 사용하셨던 은신술 지금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까?”
겔로그 역시 그냥 몰래 들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는지, 은신술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경비가 삼엄하다고 한들, 결국 일반 병사들만 있을 뿐이다. 은신술을 사용한다면 저 안으로 침입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
다만, 하루에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경화수월을 지금 사용할 수는 없다.
“지금은 사용 못해. 난 알아서 들어가지.”
그리고 굳이 경화수월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저 경비병들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 보이는 대장간과 술집 사이에 있는 골목길에서 뵙도록 하지요.”
겔로그는 성벽의 틈 사이로 보이는 대장간과 술집을 가리키더니, 어느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시야가 닿는 곳이면 나야 좋지.”
굳이 경화수월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염동력의 능력 중 하나인 순간이동을 사용하면 된다.
순간이동 범위가 좁기는 하지만, 경비병 사이를 통과하기에는 충분하다.
“읏샤.”
순간이동을 사용해 골목길 사이에 들어서서, 급히 주변을 살핀다.
‘좋아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혹시나 누가 이 장면을 목격하면 곤란하다. 침입자라고 소리라도 지르는 순간, 감당할 수 없어지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건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
“어? 먼저 도착하셨네요?”
분명 자신이 먼저 출발했음에도 라트가 먼저 골목길에 도착해있자, 겔로그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힘든 주제에 놀랄 기력은 있나 보네.’
당연하지만, 겔로그는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헉헉 대는 것이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런 상태임에도 빨리 베르렐에 도착해야한다면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물론 잠자는 시간에는 그냥 뻗어버려서, 라트가 불침번을 설 수밖에 없었다. 불평을 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빨리 가지. 너도 약이 필요하잖아.”
“예.”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대답은 잘도 한다.
지부장급 암살자라면 보통 자존심도 높지 않나? 하기야 자존심을 굽힐 정도로 억울하겠지. 암살자가 독에 중독되어 이용당하다니.
언어도단인 상황이지 않은가.
“이쪽입니다.”
조금 걸어 평범함 가옥에 도착한 겔로그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겔로그의 말에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선다. 평범한 가옥으로 보이는 이곳은 말 그대로 평범한 가옥에 불과하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그래도 제대로 꾸며져 있는 가옥. 겔로그가 왜 이런 곳의 열쇠를 가지고 있냐고?
그야, 이곳은 평범한 가옥임과 동시에 핏빛 그림자의 본거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 중 하나니까.
“백작님. 이곳은 핏빛 그림자가 거주하는 곳은 아닙니다. 조금 더 따라오셔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말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 같았기에 라트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자.”
책장에 다가간 겔로그가 그 중 붉은색 책을 뽑아내자, 책장이 옆으로 이동한다. 이곳이 바로 핏빛 그림자의 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다.
다른 곳은 이렇게 요란스럽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수도만큼은 이런 요란한 방법으로 길드를 숨겼다.
암살자 길드는 어둠 속에 숨어있어야 한다는 설정으로 만든 걸까? 새삼 제작자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제 쭉 가시면 됩니다.”
비밀통로를 걸어가면서 문뜩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시작됐다면 여기에 암살자가 남아있을까?”
베르렐에 생각보다 적은 병력이 상주 중인 것을 보니, 전쟁이 일어났던가, 그게 아니면 일보직전의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암살자들 역시 트렌세르노에 의해 징집되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도시에 들릴 수가 없었기에 바깥의 소식을 아직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소문이라도 좀 들을 걸.’
주변에 있는 백성들의 말이라도 들어봤더라면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했을 텐데.
“그래도 최소한 몇 명은 여기 남았을 겁니다.”
겔로그가 담담하게 말하자 라트는 조금은 안심했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구냐. 이름을 대라.”
본부의 입구에 도착하자 스산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겔로그의 말대로 본부에 암살자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라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내 얼굴도 못 알아보나?”
“겔로그? 파르스에서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네가 어떻게?”
“사정이 있어. 설명해줄 테니까 빨리 문부터 열어줘.”
그 즉시 문이 열리고, 암살자 한 명이 급히 나와 겔로그를 껴안았다.
“이게 누구야, 진짜 겔로그잖아! 네 놈이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침울했는지 알아?”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실망인데.”
쉽게 죽지는 않았지만,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임에도 겔로그는 오랜만에 만난 동료를 반갑게 껴안아주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구먼.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는가? 트렌세르노 새끼는 네가 죽었다고 했는데. 아니, 이게 아니지. 어서 들어오게. 단주님께 보고 드리자고.”
“흠흠.”
이대로 두면 저 남자의 수다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기에 라트는 헛기침을 해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아, 손님이 계셨……. 엔스리드 백작!?”
그제야 라트의 존재를 알아차린 암살자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며 경계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이 친구야.’
그 전까지 허점 투성이로 있었으면서 이제와서 단검을 꺼내봐야 대수로울 뿐이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미 열 번은 넘게 죽일 수 있었어.
“백작님은 적이 아니네, 쿤네로.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야.”
“도와준다고? 어떻게?”
“그건 네 말대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고.”
쿤네로라고 불린 암살자는 잠시 라트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길을 열어주었다.
라트는 의심스럽지만, 친구이자 동료인 겔로그는 믿겠다는 건가?
뭐,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든 별 상관은 없다. 라트도 좋아서 여기에 온 게 아니라, 오케만 국왕의 명령 때문에 온 것이니까.
‘분명 단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고 했지?’
그 말은 핏빛 그림자의 단주는 전쟁에 안 나섰다는 소리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아직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인데.
‘분명 전쟁이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라트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니.
‘셀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그게 아니면…….’
셀룬에 문제가 생길 건덕지는 없다. 첩자가 있는 위치도 전부 파악했고,
암살자 혹은 첩자가 분탕질을 친다고 하더라도 떨어진 별이 알아서 수습해줄 것이다.
셀룬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미 전쟁은 일어났을 거다. 트렌세르노 같은 위험 종자를 오래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베르렐에 주둔 중인 병사가 별로 없다는 것도 이미 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증명해준다.
‘그럼 트렌세르노 쪽에 무슨 문제 생긴 건가.’
그럼 다르게 생각해서 트렌세르노 쪽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가 정말로 글란츠 백작급의 지략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가능성도 적다. 그러나 암살자 길드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지.
“셀룬과 거래를 했나?”
“그래. 우리가 중독된 독의 해독제를 찾아주고 단주님의 아드님을 빼내주는 대신에 전쟁에 협조하기로 했지.”
“좋군.”
겔로그의 말에 쿤네로는 음침하게 웃었다. 트렌세르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두가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걸 모르게 하기 위해, 주인 없는 산맥을 타고 왔네.”
“주인 없는 산맥을? 잠깐 너, 약은?”
“솔직히 말해서 죽을 지경이야. 남은 약 좀 있나?”
“기, 기다리게. 내 금방 약을 가져오지.”
겔로그가 이제야 약을 달라고 말하자 쿤네로는 단주를 뵙는 것보다 그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향했다.
“목숨은 연장할 수 있게 됐네. 축하해.”
이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겔로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지 않다.
“이용당하는 비루한 목숨이 잠시 연장된 것뿐입니다.”
“그래도 살아있어야 복수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
“여기 있네. 빨리 먹게나.”
쿤네로가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약병을 가져와 급히 내밀자, 겔로그는 뚜껑을 열고 약병을 흔들어 가루를 섭취했다.
“이제 좀 살겠군.”
“다행이구먼.”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져간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아니, 말씀하시지요.”
타국의 귀족이라지만, 귀족은 귀족.
거기에 핏빛 그림자를 도와주기 위해서 왔기 때문인지, 쿤네로는 라트에게 존대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쟁은 이미 시작 됐지?”
“그렇습니다. 현재 크레몬 성과 시니아 성에서 대치 중입니다.”
크레몬과 시니아, 전부 차리친의 최전방에 있는 성이었다.
‘예상대로 전쟁은 이미 시작됐어.’
“그런데 왜 너희는 여기 있지?”
그렇다면 어째서 암살자들은 여기 있는가. 이번 전쟁에서 그들이 가장 크게 활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제국까지 가서 암살자를 영입하려고 했던 건데.
“셀룬에 보냈던 암살자들과 함께 갔던 첩자들이 모두 잡히는 바람에 저쪽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 단주님이 지금 우리가 움직이기는 이르다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져 대기 중입니다.”
‘아, 과연.’
어째서 암살자들이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린 기분이다.
이들은 지금 셀룬에 어떤 암살자가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암살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더욱이 떨어진 별이 워낙 일처리를 잘해줬고, 자신의 정체는 숨겼다.
덕분에 이대로 출전했다가는 암살자들의 피해가 속출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당장은 여기에 남아있다는 건가.
“트렌세르노는?”
“두 오러 마스터와 함께 전장으로 나섰습니다.”
“너희가 먹을 약은?”
“단주님을 포함해, 지부장급 암살자가 먹을 약을 한 달 치 남기고 갔습니다만. 그 이상은 주지 않았습니다. 죽기 싫으면 오라는 소리겠죠. 개같은 새끼.”
참지 못하고 트렌세르노에게 욕하는 모습에 쿤네로가 얼마나 분을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널 잡았어? 셀룬에는 암살자가 없잖아.”
“그것이…….”
쿤네로의 물음에 겔로그는 말을 해도 되냐는 듯, 라트를 바라보았다.
“떨어진 별이다. 무려 1만하고도 5천 골드를 지급하고 데려왔지.”
트렌세르노를 향한 분노를 보아, 이쪽은 아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떨어진 별이 셀룬에 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라트는 솔직하게 답변을 해주었고.
“예?”
액수에 놀란 것인지, 그게 아니면 떨어진 별에 직접 셀룬에 왔다는 점에 놀란 것인지. 쿤네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 작품 후기 ============================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렸으나 라면 한봉지의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나 글을 썼습니다...갸아아악....
다시는 소주를 4병 이상 마시지 않으리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