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70화 (17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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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침 엘리에게 할 말도 있었기 때문에 라트는 그녀의 방 앞에 서서 살며시 노크를 했다.

늦은 밤이지만, 아직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누구세요?”

“나야.”

“자, 잠깐만 기다려! 가지 말고!”

무슨 일인데 잠깐만 기다리가 하는 거지? 라트가 귀를 기울이자, 방 안에서 조용한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왜 말도 없이 온 거야, 뭘 입지, 화장은 어쩌고, 등등. 쏟아지는 엘리의 불평에 라트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흠흠! 들어와.”

잠시 후 문이 열리자 라트는 황급히 웃음을 지웠다.

그렇지만 급히 갈아입었는지 드레스의 끈을 제대로 동여매지 않았고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는 새하얀 네글리제가 눈에 들어오자, 다시금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러나 웃음을 참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엘리를 따라 정중히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야?”

“공작님하고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래서 가기 전에 잠깐 들렸어. 엘리는 뭐하고 있었어?”

“공부하고 있었지.”

‘공부? 마법 공부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엘리가 가리키는 책상 위를 바라보자, 그 위에는 마도서가 아닌 정치와 행정에 관련된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저런 쪽도 공부하는 거야?”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언젠가는 공작님이 되실 몸이라고. 당연히 공부해야지.”

그런가. 가슴을 피며 당당히 말하는 엘리의 모습에 라트는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질 뻔 했다.

드레스 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서 복근과 가슴골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어떻게든 참아내고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정치와 행정이라.’

고작 자신의 영지만 다스리면 되는 다른 귀족과 달리, 공작은 나랏일에도 많이 관여해야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둬야 하는 건 당연지사. 오히려 이런 쪽으로 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게 이상하기는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책이 엉망으로 쌓여있는 것으로 봐서, 엘리는 정리에 재능이 없는 걸까? 잠옷을 다 보이게 침대 위에 내버려둔 것도 그렇고.

“차라도 따라줄까? 잠깐 앉아…….”

그제야 자신의 잠옷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침대 근처에 있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엘리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붉은 얼굴로 라트를 노려보았다.

“봐, 봤지!”

“뭘?”

그 말에 라트는 시치미를 때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보긴 했지만, 이럴 때는 보지 않았다고 해주는 게 매너다.

“다 봤잖아!”

“그러니까 뭘?”

라트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자, 엘리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안 봤으면 그대로 고개 돌리고 앉아 있어!”

“예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채 의자 위에 앉은 라트는 슬그머니 눈만 돌려 후다닥, 침대 쪽으로 달려가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잠옷을 집어든 엘리는 이걸 어디다 숨기지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불 안으로 숨겨버리고 라트를 바라보았다.

정말 우연히도, 두 눈빛이 서로 교차한다. 달빛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이 방을 밝히고 있는 램프 때문일까. 엘리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변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하얀색보다는 검은색이 더 좋…….”

나름대로 엘리의 부끄러움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져봤지만,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엘리의 눈이 싸늘해졌다.

“입 다물어!”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아니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 잠옷이 들어있는 이불을 평평하게 펴버린다.

역시 이런 농담으로는 부끄러움을 풀어주기는 불가능한가보다.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라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엘리.”

“왜!”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왠지 고양이와 같아서 귀엽게 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이걸 입 밖으로 낸다면 아마 엘리의 마법에 죽겠지.

“차는? 나 목말라.”

그러니 조금 전 차를 따라주겠다는 엘리의 말을 상기시켰다.

“기다려.”

부끄러움에 잊고 있던 본인의 말이 기억났는지, 주전자 쪽으로 다가간 엘리는 마법으로 물을 데운 후 쟁반을 들어올려, 라트의 앞에 있는 탁자에 쾅하고 놓았다.

“살살 놓지 그랬어.”

시끄러워, 라고 중얼거린 엘리는 라트를 다시 한 번 째릿하고 노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후 발 한 쪽을 까닥거린다.

‘아무래도 차는 직접 따라 마셔야겠는데.’

지금 차를 따라달라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지. 그 정도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기능 덕분에 분위기를 제법 잘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라트는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서 엘리의 앞에 놓았다.

“왜 나한테 줘?”

“나보다는 너한테 필요할 거 같아서.”

부끄러움과 그 부끄러움 때문에 파생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차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할 때다.

“……감사히 마실게.”

라트가 무슨 뜻으로 자신에게 차를 줬는지 잘 알고 있는 엘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잘 마실게, 라고 해도. 니가 준 거잖아.’

뭐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흥분했다는 소리겠지. 잠옷을 보여준 게 그렇게 부끄러웠나? 하긴 저런 걸 입으면 속옷이 다 보이긴 하겠다만.

슬쩍 엘리를 바라보자, 조금은 안정을 찾은 것 같다. 그럼 이제 자신이 무슨 꼴인지 알려줘야지. 저 꼴로 밖에 나오면 곤란하잖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의 뒤로 다가간 라트는 그대로 그녀를 껴안았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차 덕분인지, 정상으로 돌아왔던 엘리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진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본 라트는 피식 웃으면서 엘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귓가에 입을 대고는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자 엘리는 몸을 떨면서도 라트의 말대로 가만히 있는다.

너무나도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부비고 싶은 욕망이 들었지만, 당장은 이게 먼저다.

드레스의 끈이 있는 가슴 쪽으로 손을 옮기자, 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거절은 없다. 묵묵히 라트의 손길을 기다릴 뿐.

“너무 헐렁하게 맸잖아.”

“에?”

라트의 말에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엘리의 입이 조금 벌려진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아래를 바라보자, 끈을 제대로 묶고 있는 라트의 손이 들어온다.

“에에에! 놔! 내, 내가 할게! 빨리 놔줘!”

“가만히 있으라니까.”

엘리가 발버둥을 치지만, 라트의 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남자와 여자임을 넘어서, 스탯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만!”

“해주고 싶어서 그래. 가만히 있어, 알았지?”

그 말에 요동치던 엘리의 몸이 멈췄다. 덕분에 라트는 엘리를 품에 안고 끈을 묶을 수 있었다.

드레스 끈을 묶는 것은 케이네와 엘리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있으니 어떻게 묶는지 대강 견적이 나왔다.

잠시 후 끈을 완전히 갈무리한 라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끈을 묶던 손으로 엘리의 목을 감쌌다.

“으으으으!”

기묘하지만, 귀여운 신음 소리가 라트의 귀를 채운다.

“부끄러워?”

“부끄러운 게 당연하잖아.”

부끄러운 게 당연하다. 급히 옷을 입느라 자신이 어떤 꼴인지도 모르고, 당당히 가슴을 폈으니. 어찌보면 조금 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라트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엘리의 뺨에 입을 맞출 뿐.

“괜찮아. 그런 모습도 예쁘니까.”

“으. 치사해, 그렇게 말하면 아무 말도 못하잖아.”

라트의 말에 엘리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그의 입맞춤에 회답해주었다.

“아, 따뜻하다.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을 정도로.”

“나도, 그래.”

부끄럽다면서 잘도 이런 말에 착실히 대답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귀여운 건가?

엘리의 곱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그녀의 채취를 느끼던 라트는 이내 눈을 떴다.

“여기서는 지낼 만해?”

웃긴 소리다. 엘리는 보통 공작의 영지에서 생활하던가, 그게 아니면 파르스에 있는 공작의 사저에서 생활했다.

연금술사 길드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으면 느껴졌지. 이곳은 엘리의 집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왠지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의 연인이 없는 곳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좋아. 어머니도 계시고, 세스라도 있고, 시종들도 있으니까. 가신 아저씨들이랑 아버님도 있고.”

사람은 평생 살아온 곳에서 사는 것을 당연히 편하게 느낀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자신의 집이 있다는 것과 그 집에서 쉴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안정감이 느껴지는 일이다.

그렇기에 엘리의 대답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서운하다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지만 라트가 없어서 조금 불편해.”

“그래?”

“응, 그래.”

그러나 이어지는 대답에 서운함이 봄을 맞이한 눈처럼 사르륵, 녹고 말았다. 하기사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부터가 언어도단이기는 하다.

“라트를 보러 가고 싶은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렇지만, 나도 해야 할 게 있으니까.”

그리 말하며 엘리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지만 언제든 라트를 만나러 올 수 있음에도 그를 만나러 오지 않은 이유는 공부 때문이었나 보다.

“지금 해둬야, 나중에 편한 걸. 당장 라트랑 만난다면 행복하겠지만, 공부를 안 해두면 나중에 부랴부랴 배워야 되니까. 그러다가 내가 잘못된 정책을 시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질 거 아니야.”

훌륭한 말이다. 그렇기에 라트는 엘리를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찾아갈 생각이었어. 곧 전쟁이 벌어지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엘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었지. 물론 할 말이 없다고 해도 찾아올 생각이었지만.

“이번 전쟁에선 어쩔 생각이야?”

엘리는 켈랑과의 전쟁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 그리고 명성을 위해서 루아타 공작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틀리다.

이번 전쟁은 예정됐던 것이 아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게다가 떨어진 별의 말에 따르면 승률이 좋은 편도 아니다.

“모르겠어. 아버님께서는 내가 이번 전쟁에서는 빠지길 바라시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엘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라트를 바라보았다.

“나도 엘리가 이번 전쟁에서는 빠졌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케이네와 함께 수도에서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상대가 랜덤 NPC이고 전략 전술에 능하다면 라트의 예상 범위를 넘어선 작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 당장 라트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루아타 공작이나 미르차르드 후작이 라트가 위험에 빠지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위험에 빠질 확률은 늘어난다.

“위험한, 거야?”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팔을 쥐어 잡는 엘리의 얼굴에 조금의 슬픔이 묻어났다.

“응. 위험해.”

거짓은 고하지 않는다. 이번 전쟁은 위험하다. 켈랑과의 전쟁은 라트가 없다고 했더라도, 결국은 셀룬의 승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만큼 셀룬은 많은 준비를 해왔다.

게다가 켈랑과 싸울 때는 랜덤 NPC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들의 패턴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엘리와 케이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하겠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결과적으로는 다치지 않았다지만, 케이네는 죽을 뻔했다. 라트가 조금만 늦었다면 그녀는 오우거에게 잡아 먹혔을 것이다.

다시금 그런 모습을 지켜본다면? 아니 눈앞에서 둘 중 한 명이라도 잃는다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니 그녀들은 안전하게 있어줬으면 했다. 안전하게 내가 돌아올 곳에서 기다려줬으면 했다.

“내가 싫다고 하면?”

“그걸 막을 권리는 나한테 없어.”

엘리가 싫다고 한다면, 라트는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

“그러니 난 그냥 부탁할 뿐이야.”

그러나 부탁할 권리 정도는 있지. 조금 붉게 물든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춘 라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엘리를 마주한다.

“기다려주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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