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3 / 0229 ----------------------------------------------
1부
내부로 들어와 조금 걸은 후 여자 종업원은 라트와 미르차르드를 좁은 방에 놔두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한 후 자리를 떠났다.
“미르차르드님.”
“왜 그러십니까?”
“지금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살기를 내뿜으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욕망의 단검은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를까, 타국의 귀족의 청부를 쉽게 수락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암살자가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서 일을 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욕망의 단검의 활동 영역은 어디까지나 카르세이나 대륙. 노르스 대륙에서의 활동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다. 활동 기반이 약한 암살자는 그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암살자 길드는 타 대륙의 일은 받지 않는 걸 서로 간의 암묵적인 룰로 두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노르스 대륙의 암살자 길드는 욕망의 단검이 그쪽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못할 거다.
심지어 노르스 대륙에 세 개 뿐인 암살자 길드 중 하나인 그림자 까마귀는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고.
그러니 이런 점을 이용해서 잘 설득해야지. 설득이 먹히지 않으면? 그럼 협박을 할 수밖에 없다. 설득이 먹히면 좋겠지만, 만약 협박을 해야 한다면 다소 험악한 분위기가 나올 수 있다.
그렇기에 미리 미르차르드에게 경고를 해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셀룬 왕국에서 미리 라트의 경고를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라트가 강조를 했기 때문에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미르차르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차르드의 다짐을 듣고 나서 5분 쯤 기다렸을까?
“이거, 이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검은색 로브를 쓴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스페와 비슷하게 로브에 얼굴이 보이지 않게 마법을 걸어놨지만, 목소리는 확실히 남자였다.
“욕망의 단검의 수장, 떨어진 별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이름은 말할 수 없다는 걸 백작님과 후작님께서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라트가 백작이 된 것은 고작 며칠 전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니. 노르스 대륙에 활동 기반을 두지 않을 뿐, 정보는 수집하고 있는 건가.
‘그나저나 떨어진 별이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보통은 떨어진 별보다는 그의 부하들이 의뢰를 듣기 마련이다.
타국의 귀족이라도 귀족은 귀족이기에 알아서 가장 높은 놈이 찾아온 건가. 그게 아니면, 마침 이곳에 있어서 찾아온 건가.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떨어진 별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이 세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조차 그의 이름은 밝혀내지 못했다. 심지어 여자 캐릭터로 그의 연인이 되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이름이 맥거핀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니까, 이름은 있겠지.’
분명 이름은 있을 거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아니 알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라트 역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러나 그의 이름은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다면,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겠지?”
당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이들이 전쟁판에 협조하게끔 하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직접 이쪽까지 오신 용무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너희 암살자 중 몇 명이 셀룬으로 넘어와서 전쟁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흐음~”
라트가 목적을 밝히자, 떨어진 별의 입에서 묘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긍정도, 부정도 섞이지 않은 그저 묘한 한숨이었다.
“암살자 길드는 서로 각자의 대륙에 간섭하지 않는 암묵의 룰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평화의 시대에서나 통용되는 규칙일 뿐. 전쟁 중일 때는 다르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평화의 시대에서는 규칙이 통한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에서 규칙은 누구에게도 통용되지 않아. 전쟁에서 통하는 것은 오로지 힘, 그리고 승리뿐이다.
패자의 말은 그저 지나가던 개새끼가 짖는 것과 같아.
“저희는 저희의 영역에서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영역에서는 그걸 장담할 수가 없어요. 굳이 저희에게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입니까?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요?”
가치라. 그 가치는 무엇인가. 돈인가?
아니다. 그들에게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기는 하지만,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고 타국으로 갈 정도로 크나큰 돈은 제시해줄 수 없거니와 제시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라트가 제시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 정답, 이미 생각해놨지. 라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셀룬에서 영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지원도 해주겠다.”
“호오. 그건 조금 구미가 당기는 가치이군요.”
현재 셀룬에는 암살자 길드가 없다. 게다가 셀룬이 집어삼킨 켈랑의 암살자 길드인 그림자 까마귀는 와해되었다. 욕망의 단검에서 셀룬으로 넘어와 지부를 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그 지부를 차리는 것을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 지원까지 받는다면? 욕망의 단검은 노르스 대륙에도 손을 뻗을 수 있게 된다.
제국에 단 하나의 암살자 길드만 있었다면, 이런 제안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에는 4개의 암살자 길드가 있어, 그들끼리 경쟁도 상당히 심각하다.
그런데 암살자 길드 중 유일무이하게 두 대륙을 활동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충분한 가치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쪽에 인력을 빼면 그만큼 다른 길드 놈들이 견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길드 당, 3천 골드라면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있겠지?”
“충분하기는 합니다만, 1만 골드에 달하는 거금을 지불하시겠다고요?”
스승이 남긴 유산을 빌리지 않아도, 지금까지 특수 보상으로 받은 것과 비밀 창고를 털어서 얻은 골드를 합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었다.
“허언은 하지 않아. 먼저 보여주지.”
인벤토리에서 1만 골드를 꺼내 가죽 주머니에 담아서 넘기자, 떨어진 별이 그것을 들어보았다.
“무게로 보아, 진짜 1만 골드쯤 되겠군요.”
“어때 이제 제안을 받아드릴 마음이 생겼나?”
“흐음.”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골드까지 보여줬음에도 떨어진 별은 침음을 삼키며 고심한다.
트렌세르노 군과 셀룬 사이에 벌어질 전쟁의 승률을 점쳐보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욕망의 단검이 셀룬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고 해도, 전쟁에서 지면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노르스 대륙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셀룬이 이겼을 때의 전제다.
셀룬이 지면, 욕망의 단검은 노르스 대륙에 자리를 잡기는커녕 셀룬을 도와주다가 생긴 인력 손실 때문에 셰크티 제국에서도 손해를 입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고민되지? 너희가 도와준다면 셀룬이 이기는 건 확정된 일이잖아.”
그러나 셀룬이 진다는 가정은 어디까지나 정보전에서 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병사의 질과 지휘관의 질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거기에 정보전까지 이길 수 있다면, 이 전쟁에서 패배는 없다.
“그것이, 제 생각에는 저희가 돕는다고 하더라도 셀룬이 이길 확률은 60% 밖에 안 됩니다.”
“뭐?”
“그러니까 80%라고 해도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제안에는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60%밖에 되지 않으니…….”
“그게 아니라. 승률이 60% 밖에 안 된다니. 뭔 헛소리야.”
오러 마스터 두 명, 8서클 아크 메이지 한 명, 거기에 라트까지 있는 셀룬군이다. 거기에 병사들의 장비는 전부 연금술을 사용해서 만든 최상급 장비.
그런데도 욕망의 단검이 도와준다는 전제 하에 승률이 60%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만약 트렌세르노가 9서클의 아크 메이지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와 생각했겠지만.
어젯밤 엘리를 통해 들은 말에 따르면 루아타 공작이 트렌세르노와 처음 대면했을 때 마나 스캔을 사용해봤다고 한다.
그 결과는 일반인. 마나도 조금 뿐이고, 오러를 다루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크룩스가 드레이크나 그리핀 군단이라도 테이밍 한 거야? 그게 아니면 이상 그딴 승률이 나올 리가 없잖아.”
혹여나 크룩스가 드레이크나 그리핀, 혹은 그에 준하는 강함을 가진 오우거를 테이밍해서 군단을 만들었다면 그런 승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마리도 테이밍하기 버거운 괴물을 그렇게 많이 테이밍 했을 리가 없어. 라트의 생각이 옳았는지, 떨어진 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몬스터 테이머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반란군의 수장인 트렌세르노 헤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일반인이라고 들었는데? 뭐, 실력을 숨긴 엄청난 실력자라도 돼?”
“아마 일반인은 맞을 겁니다. 그렇지만 머리는 일반인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 그의 머리는 이미 수백 년을 앞서 가있다. 당연히 일반인과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의 머리와 비교를 당한 일반인이 불쌍할 지경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반란군이 차리친의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었던 건 트렌세르노의 지략 덕분이었습니다.”
“지략이라고는 해도, 이미 켈랑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오러 마스터가 반란군에 가입했잖아. 수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 아니야?”
“수도 함락 당시, 하이데른 공작과 카르나 후작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정보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전투는 순수하게 트렌세르노의 지략만으로 승리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라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오러 마스터 없이 한 나라의 수도를 그렇게 쉽게 함락했다는 말인가. 순수한 지략으로?
‘정보전에만 능통한 게 아니었다고?’
당연히 반란군이 수도를 쉽게 함락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오러 마스터와 그의 아래있는 기사단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지략으로 수도를 점령했다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지략으로 수도를 떨어트리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군단은 머리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전술과 전략을 제시하는 건 보통 한 사람이지. 그것을 보안하는 것이 다른 지휘관의 몫이고.
그러나 그 수도가 지략에 의해 겨우 며칠 만에 붕괴되었다면? 그럼 이야기가 다르다.
“차리친이 이리도 허무하게 멸망한 것은 트렌세르노가 정보를 잘 통제하고 있었기도 합니다만, 결정적인 이유는 트렌세르노의 지략 때문이었습니다.”
떨어진 별의 설명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상대방의 전력을 다시금 생각한다. 육체적인 강함을 모르겠으나, 그의 지략은 글란츠 백작님급. 아니 어쩌면 그를 상회할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네.”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좋은 기치를 제시해주었지만,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확실히 60%의 승률을 믿고, 이쪽을 도와주기는 그렇겠지.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욕망의 단검이 도와줘야 승률이 60%라는 것은 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승률은 반반, 혹은 그 이하일 수도 있으니까.
“위험성이 너무 커서 도와주지 못 하겠다?”
“아쉽게도 몇 번을 생각해봤지만, 꺼려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그쪽에서 순순히 도와주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다.
“과연 욕심 많은 모자를 훔친 건 누구일까?”
그 말에 떨어진 별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브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두 번째 패턴으로 나갈 수밖에. 협상은 실패했으니, 남은 건 협박뿐이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원고료 쿠폰 감사합니다...저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동미참의 세계로 떠나요...
글을 올릴 수 있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장담은 못하게써..거기에 금요일에는 향방까지...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