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61화 (1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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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한바탕 야단이 끝나고 나서 적막이 찾아왔다. 모두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에 침묵을 고수한다.

    직접 나서서 부정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그 남자, 트렌세르노의 말 역시 옳다는 것을. 지금 이 세계는 부조리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신분이라는 틀 속에 인간의 한계를 무시한다. 그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옳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다는 것 역시 옳다.

    서로가 옳다는 말은 다시 말해 서로가 틀렸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니 결판은 전장에서. 승자의 말이 옳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었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이기느냐.’

    상대방의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케츠와는 달리 진짜배기 몬스터 테이머도 있고, 오러 마스터도 두 명이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대방은 정보전에 굉장히 능통하다. 어찌됐든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길 정도의 능력자다.

    ‘브라일을 죽이지 말 걸 그랬나.’

    긍지 없는 쓰레기라는 이유로 브라일을 죽였던 것에 속이 쓰려온다. 정보전의 기본은 암살자들이다. 암살자 길드는 암살 말고도, 첩보를 담당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셀룬에는 암살자 길드가 없다. 켈랑의 암살자 길드인 그림자 까마귀는 브라일의 죽음 때문 완전히 와해되었지.

    ‘노르스 대륙에 남은 암살자 길드는 둘.’

    하나는 차리친 왕국의 암살자 길드인 ‘핏빛 그림자’다. 이쪽은 아마 트렌세르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트렌세르노가 보인 정보전은 성립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정보전을 하기 위해서는 암살자 길드가 필요했지만, 남은 하나는 사라이 왕국과 전쟁 중인 린느탐보프 왕국에 있는 ‘유령의 시선’이다.

    전쟁 중인 나라의 암살자 길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눈코 뜰 세 없이 바쁠 테니까.

    “하아.”

    “어디 안 좋아?”

    케이네의 물음에 라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으로 아픈 게 아니라, 고민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루아타 공작.”

    “예, 전하.”

    바로 그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케만 국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귀족들을 소집하게. 병사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곧바로 전쟁 준비를 할 수밖에.”

    “충.”

    결심을 굳힌 건가. 아니 진즉 전쟁은 성립되었다. 단지 충격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루아타 공작이 밖으로 향하자, 브로켄 후작과 세르먼트 후작도 오케만 국왕에게 인사를 한 후 루아타 공작을 따른다.

    켈랑과의 전쟁이 끝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그 사정은 저쪽도 마찬가지다.

    반란이 이제 막 성공했는데 또다시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서로의 조건은 공평하다. 한쪽은 정예 병사들이 있으며, 국력도 어마어마하게 늘었으니 정면 승부에서 유리하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정보전에 능하니, 병사들을 선동하는 식으로 전쟁을 이끌 거다.

    ‘정보전이라.’

    사실 라트는 정보전에 그렇게 능숙하지 않다. 다른 플레이어가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정보전으로 전쟁을 끝내버리는, 정보전에 이골이 난 플레이어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에는 암살자도 없는 상황이니 불리하다. 전쟁에서 정보라는 건 꽤 중요한 것이다.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부터, 병사들의 사기를 관리하고, 나아가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정보를 이용해 패배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게 바로 정보다.

    상대가 정보전에 능통하다면, 이쪽은 최소한 전력이라도 맞추기 위한 암살자가 필요하다.

    ‘암살자라……. 노르스 대륙에서는 구할 수 없는데. 아!’

    고심하던 도중, 좋은 방법이 떠오른 라트는 입을 벌렸다. 노르스 대륙에서 암살자를 구할 수 없다면, 다른 대륙에서 구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본래라면 셰크티 제국도 반란의 겁화에 휩싸여 정신이 없는 상황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흑사제 놈들이 노르스 대륙으로 온 덕분에 현재 카르세이나 대륙은 평화로운 상태다.

    “전하, 시그나 공주는 아직 파르스에 있사옵니까?”

    “그렇다만.”

    오케만 국왕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라트는 미소를 지었다. 전쟁 중에 포탈을 이용해서 셰크티 제국으로 넘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쉽게 말하자면 포탈은 현대의 비행기와 같다.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는 장소에서 포탈을 타고 건너오려고 하면, 제국에서는 당연히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당한 용무가 있다면, 급한 용무가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직 시그나 공주가 파르스에 있으니 제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제공받은 셈이 된다.

    감히 1황녀와 친분이 있다는 시그나 공주가 제국으로 가겠다는데, 제국민이 그것을 막을 리가 없잖은가.

    “제국 황실과 연락을 해서 시그나 공주를 그쪽으로 보내도 괜찮냐고 물어봐주십시오.”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요, 급한 일입니다. 셀룬에는 정보를 얻어올 수 있는 암살자가 필요합니다.”

    “암살자? 아, 과연. 제국의 암살자 길드와 접선해볼 생각인가?”

    바로 정답이다. 라트가 그렇다고 말하자, 오케만 국왕은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엔스리드 백작에게 맡기지. 우룬, 셰크티 제국에 연락을 취하도록.”

    “충.”

    이걸로 제국으로 넘어가는 건,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확정됐다고 봐야겠지.

    인벤토리를 열어 현재 가지고 있는 골드까지 확인한 라트는 이 정도면 상급 암살자 몇 명을 데려올 수 있다고 계산을 마쳤다.

    “라트님, 혼자서 제국의 암살자 길드들과 접선하는 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르차르드가 라트에게 슬며시 다가와 말한다. 주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직한 신하와 같은 모습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후작이 됐으니 자신에게 존대를 사용하지 말라고 그리 말을 했건만, 그는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케만 국왕은 미르차르드가 라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걸 들어서 알기 때문에 이를 윤허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족보가 꼬인다고.’

    케이네의 경우도 그래. 라트는 공식석상에서는 케이네를 누나가 아닌, 후작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국왕의 앞에서조차 라트에게 존대하는 이 고집불통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젠 나도 모르겠다.’

    더 이상 이 일로 고민해봐야, 그 고민이 끝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할 게 뭐가 있어요. 설마 귀족인 저를 건드리겠습니까?”

    예전이라면 모를까. 현재 라트는 한 왕국의 귀족이다. 아무리 제국의 암살자 길드라고 해도, 한 왕국의 귀족을 건드릴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아.

    게다가 제국에 있는 암살자 길드를 전부 만날 생각도 없었다. 라트가 생각하고 있는 암살자 길드는 단 한 곳 뿐이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예?”

    아니 왜 굳이 함께? 미르차르드는 이곳에 남아서 할 일이 많다. 이제 셀룬의 후작이니, 그 역시 전쟁을 지휘해야한다. 어쩌면 켈랑에서 투항한 귀족과 병사들을 합쳐 하나의 군단을 꾸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쟁을 준비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가겠다니 이 무슨.

    라트가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얼굴에 간곡함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라트는 미르차르드가 어째서 자신을 따라오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공주가 안전하게 제국으로 가는 걸 보고 싶은가보네.’

    이제는 아니라지만, 미르차르드는 지금까지 살아온 일생동안 셀틱 국왕에게 충성을 받쳤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그를 배신한 것이니 분명 마음에 걸릴 것이다. 그러니 시그나 공주가 안전하게 제국으로 가는 걸 봐야,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겠지.

    ‘거절하기도 뭐하잖아.’

    본인의 죄책감을 덜고 싶어 하는 미르차르드의 생각을 깨달은 이상, 라트는 그의 청을 거절하기가 힘들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절대로 나서지 마시고 제 명령 없이 검을 뽑으시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미르차르드는 알아서 조심할 것이고 라트가 명령을 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충고를 해뒀다.

    “시종장. 시그나 공주에게 가서 제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라고 이르게.”

    “예, 전하.”

    “제국에서도 내일 내로는 답이 올 것이니, 오늘은 들어가서 쉬게나. 세 사람 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았네.”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국왕의 말에 고개를 숙인 라트는 케이네와 함께 길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라트와 미르차르드는 포탈 앞에서 시그나 공주와 그녀를 모시는 몇몇 시종과 함께 마주했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라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더라도, 시그나 공주가 오케만 국왕에게 직접 부탁을 했다면 공주는 제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이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어. 시그나 공주에게 빚을 만들어 둘 생각이었으니까.

    “후작님께서는 신수가 좋아 보이시네요.”

    “……송구합니다.”

    시그나 공주에게는 비꼴 의도가 없었지만, 왠지 공주의 말이 자신을 비꼬는 것처럼 느껴진 미르차르드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긴 사정을 모르면 자국이 멸망하려고 하자마자, 적국에 투항한 꼴이니.

    “비꼬는 게 아니에요, 후작님. 그냥 아직, 좀 그래서 그랬어요. 고개를 들어주세요.”

    그러나 시그나 공주는 미르차르드의 사정을 알기에 그를 타박할 생각이 없었기에 미르차르드에게 고개를 들어달라고 말했다.

    처음 켈랑의 왕성에서 미르차르드 후작을 만났을 때는 사정을 몰랐겠지만, 아마 이곳에서 켈랑의 전 국왕이었던 셀틱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루만의 만행을 들었을 것이다.

    “오빠는 편하게 가셨나요?”

    그래도 혈육의 정 때문인지, 시그나 공주는 루만의 마지막을 걱정했다.

    “편하게 보내드렸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편하게 보내드렸다는 라트의 대답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답에 시그나 공주는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혈육을 죽인 자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를 이해한다는 듯이 웃는다.

    다행이라는 대답에 라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루만이 미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시그나 공주에게 있어 루만은 하나 뿐인 오빠다.

    누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게 바로 혈육이지.

    그렇기에 셀틱 역시 루만을 욕했음에도 종극에는 그의 시체를 부여잡고 울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그나 공주 역시, 루만의 시체를 보고 울었다.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불태워진 그의 처사에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 다행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가.

    “가시죠.”

    어떤 대답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슬픈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왠지 루만을 죽였다는 것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느껴질까, 라트는 먼저 앞장서서 포탈로 향했다.

    “충! 셰크티 제국으로 가십니까?”

    “그래.”

    경비병이 고개를 숙이자, 세삼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3년 전에 포탈을 이용할 때만 해도, 경비병들의 멸시를 받았는데, 이제는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이야.

    “미르차르드 후작님과 엔스리드 백작님. 그리고 시그나 공주님 맞으십니까?”

    포탈 앞에 있는 마법사가 신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시그나 공주님을 모실 시종들까지. 총 10명이다.”

    “확인했습니다, 포탈로 가시죠.”

    당연하지만, 국왕의 공인 아래 포탈을 이용할 때는 돈을 낼 필요가 없다.

    마법사가 서류에 이름을 기입하는 것을 끝내자, 라트가 제일 먼저 포탈로 들어갔고, 이어 나머지 사람들이 라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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