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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대는 조금 전, 와의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은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모순이지 않은가.”
“모순이 아닙니다. 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이를 뽑아, 의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왕은 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 그 의회와 함께 정치를 하면 됩니다.”
“결국 똑같지 않나. 의회를 만든다면 그들이 결국은 상위층이 되는 게 아닌가? 신분제를 폐지하겠다고 말한 그대의 말과 모순된다!”
“모순이 아닙니다, 전하. 의회에 들어가는 이들은 백성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될 테니까요.”
‘입헌 군주제 중에서도 의원 내각제.’
거기에 투표를 통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공화제의 제도이지 않은가. 이상의 허들이 너무 높다. 너무 높아서, 허울 좋은 말이었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한 번 의회에 들어간다고 해서, 영구적으로 의회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 그게 무슨 뜻인가.”
“일정 주기마다, 의회의 인원이 백성들의 투표에 의해 바뀐다면, 권력을 놓치기 싫은 이들은 백성을 위해 똑바로 된 정책을 내놓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트렌세르노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입을 다물더니, 조금 지나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의회가 타락하게 되면, 왕이 의회를 견제하면 됩니다. 왕이 타락하게 되면, 의회가 왕을 결정하면 됩니다. 그 둘이 모두 타락한다면,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심판을 내리면 됩니다.”
삼권분립까지 나올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인간은 평등해질 수 있습니다.”
평등?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그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박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미친 소리하고 있네.”
지금까지 잠자코 한 남자의 이상을 듣고 있던 라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라트님이시지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라트님께서 제 말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부정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거야, 라트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평민에서 귀족이 된 몸이시니, 가장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평민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니 그런 거 잘 모른다. 3년 전부터는 제스맹의 보호 아래 귀족 부럽지 않게 살아왔고, 그 전의 과거는 라트가 아닌,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로 살아왔으니까.
그러니까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를. 그렇기에 미친 소리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 평민의 삶이 힘들기는 하지. 그건 인정해. 노예는 말할 것도 없지.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을 뿐, 가축이나 다름없잖아.”
“잘 아시는 군요. 그런데 어째서 제 말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지금 니가 말하는 제안, 개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지는 생각해봤냐?”
저 개혁이 추진되면 분명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귀족들의 반발은 거대한 힘으로 무마시킬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다른 왕국이지.”
물론 귀족들도 문제기는 하지만, 그건 트렌세르노의 말대로 거대한 힘으로 짓누르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다른 왕국에서 반발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왕국이 문제라고요?”
“그래 타국보다 월등한 제도를 시행한다면 당연하게도 견제를 받게 된다. 왜냐고? 다른 나라의 백성들이 이쪽으로 오기를 바랄 거니까. 모두가 평등하기에 공평한 기회를 얻는다는 생각에 말이지.”
‘그게 덫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하긴 신분제가 폐지되긴 했으니 다른 왕국보다는 살만하겠지만.
“더 나갈 필요도 없이 당장 셰크티 제국이 가만히 둘 것 같아?”
황권이 무시무시하게 강한 셰크티 제국이 왕권을 무시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나라를 감히 내버려두겠는가. 그 사상이 제국에 물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당장 전쟁을 걸어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겠지. 개혁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제국에 의해 종말을 맞이할 것이 분명하다.
“그걸 제쳐놓더라도 네 말에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지.”
라트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한 번 파고들기 시작하면 복잡한 것이 정치니까. 그러나 트렌세르노의 말이 허황됐음은 알고 있다.
이 세계보다 훨씬 뛰어난 정치 체계가 등장한 곳에서 살아온, 미래를 알고 있는 자로써 감히 선언한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차피 똑같아지기 마련이야.
“넌 평등하다고 했지. 평등은 좋아, 그런데 말이야. 모두의 신분이 평등하게 되고, 모두가 법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처우를 받는다고 치자.”
좋은 울림이다. 깨끗한 울림이다. 이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의 재능만으로 평가받게 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재능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냐?”
그러나 결국은 소수를 위해 다수가 일을 해야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거대한 집단을 굴리기 위해서는 집단에 속한 이들이 톱니바퀴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것인 숙명이니까.
“공평함의 기준은 뭐야. 재능이 없다면 도태되고, 재능이 있다면 나아갈 수 있는 사회라니. 재능이 없는 이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공평이지 않아?”
“비약된 말을 하시는 군요 재능 있는 이가 재능 없는 이들을 위해 국가를 이끄는 겁니다. 도태되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재능으로 사람의 가치가 판단되지 않으면 모두가 공평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웃는다, 비웃는다. 그의 말에, 그의 당당한 얼굴을 한껏 조소한다.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비웃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냔 말이다.
“모두가 법이라는 이름 아래 공평해지면 사람의 가치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다니.”
깨끗한 이상을 꿈꾸는 것은 좋다. 그 이상이 현실과 맞물린다면 어떻게 변질될지 생각하지 못하는 이를 시발점으로 혁명은 일어난다.
“멍청하기 그지없군.”
그래서 그 후에 이상과 현실이 결합된 순간의 파장은 고스란히 남은 이들이 받을 수밖에 없다.
“신분이 사라지면 결국 사람을 평가하는 건 돈이 된다.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계이니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돈을 번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그게 바로 네가 원하는 세상이니까.”
그것은 좋다. 재능과 노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세계라니. 수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신분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지금보다는 훨씬 발전하겠지.
“그러나!”
그러나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재능이 없음에도 부모가 남긴 재산을 가지고 사람을 부리는 놈은 어떻게 할 거지? 법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노예 신분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
“그것은 나라에서 제제를 하면…….”
“제제를? 어떻게?”
무엇을 제제하겠다는 말인가. 그런 제제가 들어간다면, 네가 말한 평등은 사라지게 되는데.
“한 사람이 노력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 멍청한 자식이 재산을 물려받아서 사람을 고되게 부린다. 거기에 제제를 가할 수 있는 점이 어디 있는데?”
너의 이상은 입헌군주제, 나아가 민주주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끝을 미리 알고 있기에 단헌하마.
“그러나 이게 바로 모순이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지금과 다를 게 없잖아. 그저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재능과 노력의 여하에 관계없이 잘난 듯이 살 수 있다니.”
거짓, 허황, 모순이다! 너의 말은 너의 이상은 전부 모순되어있다. 그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그것이 내가 봐왔던 것이다.
“그렇게 네가 만든 제도는 힘없이 무너지겠지.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돈에 의해 새로운 권력층이 생겨날 거야.”
사람이 사는 곳은 어차피 똑같이 굴러가게 되어있음을. 제제?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제제를 한다면 어떤 이가 노력을 하게 되겠는가.
자신은 못살더라도, 후손은 잘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은 수두룩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의 노력을 짓밟는다면, 노력으로 평가받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네 놈의 이상은 너무 앞서갔어. 네가 말하는 개혁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 인간이 스스로 얻어야 비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자신들이 이룬 것에 긍지를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겠지만, 한순간의 개혁은 불꽃처럼 쉽게 타오르고 또한 쉽게 꺼지기 마련.”
틀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디 말해보아라. 몇 번이라도 반박해주마, 몇 번이라도 부정해주마.
“너는 틀렸다.”
너의 이상은 너무 빨랐음을.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옵니까?”
“그건 잘 모르겠군. 그대의 말도, 그리고 엔스리드 백작의 말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고 있으니.”
저게 옳다. 눈앞의 남자가 쏟아낸 이상은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다.
메인 퀘스트만 하더라도 이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은 자명한데,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불러질 혼란까지 초래하게 둘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의 말대로 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짐이로군. 그렇지 않나?”
그 말 역시 옳았다. 이 제안을 수용하면 당장의 전쟁은 피하고 수없이 넓은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제안을 수용하게 된다면, 가장 큰 손해를 입는 건 바로 오케만 국왕 본인이었다.
“묻지. 노력으로 평가받는 세계라면, 자네는 짐의 조상이 이 나라를 건국한 노력을 어찌 무시하는가.”
이 왕국을 건국한 자는 오케만 국왕의 조상이다. 그가 이 나라를 건국했기에 그 보상으로 그는 왕이 되어
“지금 나에게 있는 권력도, 인망도, 짐의 조상이 일구고 짐이 거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짐의 노력을 무시하려고 드는가.”
“개혁을 위해서는 특권층의 희생은 불가능 합니다만, 그리 생각하신다면 협상은 불가능해 보이는군요.”
희생할 이유가 없다. 어째서?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이가 어째서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럴 바에야 싸우는 것이 더욱 이롭지 않은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다니, 인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욕망의 생물이니까. 만족 따위 하지 못하는 생물이기에, 그렇기에.
그 어떤 허울 좋은 이상을 내놓더라도 결국에는 썩기 마련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다음에는 전쟁에서 보겠군.”
“저를 그냥 보내주시겠다니, 황송하군요.”
이 자리에서 저 남자를 죽이는 방법도 있다. 저 남자의 옆에 오러 마스터가 두 명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8서클 마법사와 라트도 있었다.
이쪽이 분명 유리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명분이 없으니까. 켈랑의 경우는 셀틱 국왕이 셀룬으로 망명을 왔기 때문에 별 다른 소란 없이 영토를 전부 지배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명분 없이 저쪽의 지도자를 죽이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어떨가. 영토를 제대로 지배를 할 수 없다. 반란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저항군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물러나게 둔다.
“그나저나 저에게 틀렸다고 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왕성에서 떠나기 전, 트렌세르노는 차갑게 웃으며 라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틀렸다고 지껄이시는지. 그래요, 뭐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인간은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틀렸다면 고치면 그만인데, 어찌 그리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까.”
‘내가 틀렸다?’
그의 말에 라트 역시 차갑게 웃는다. 고치면 된다고? 그것이 그렇게 쉽다면 내가 이전에 살아왔던 세계는 그리도 더럽지 않았을 것이다.
취업을 위해 힘들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 자신의 재능에 맞춰,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단언한다.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상을 쫓는 철부지에 불과하다고.
“제가요? 그건 그쪽이 아닐까요?”
그러나 철부지는 자신의 무엇이 틀린지 모르기에 철부지다.
“더 할 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소용없어. 남은 것은 단 하나.
“과연. 여기서 떠들어봐야 서로 입만 아플 뿐. 결판은 전쟁에서 내도록 하죠. 과연 누가 틀렸는지는 그 때 알 수 있겠죠.”
결국 누가 옳은지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힘뿐이다. 역사가 그렇게 증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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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선작, 원고료 쿠폰 정말 감사드립니다...하루 3편씩 연재하려니까 죽을 맛이네요..으...
모두 좋은 밤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