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58화 (15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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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물론 변수가 일어나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다. 변수가 생기면 생길수록 라트가 알던 세계와 이 세계는 점점 달라지니까. 허나, 이 변수를 덮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살아남는 왕국은 셀룬 하나, 혹은 사라이 포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랜덤 NPC의 존재를 생각하기도 했었고. 켈랑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도, 켈랑에서 랜덤 NPC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옳다.

    루만이 펼친 작전은 도가 지나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편이었으니까.

    “소신의 생각으로는 차리친에 지원군을 보내는 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세르먼트 후작의 말에 루아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후작의 말도 옳으나, 차리친을 구원하는 건 아마 힘들 것이다. 적들이 의도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흘렸으니까.”

    언제든지, 차리친 정도는 멸국의 길로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겠지.

    “그럼 그쪽을 치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다음 예정지는 당연히 핀스크 왕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특수한 상황이 일어난 이상.”

    “그렇다고 후방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지 않소?”

    브로켄 후작의 말에 세르먼트 후작이 반론했다. 그의 말대로, 현재 차리친의 영토를 점령한 반란군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핀스크 왕국이 움직이면 셀룬은 골치가 아파진다.

    그게 보통의 생각이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생각.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면 과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오, 백작?”

    익숙지 않은 호칭으로 불린 라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독자적인 정보망에 따르면 현재 핀스크 왕국은 흑마법사에 의해 잠식되어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반응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설마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굳어버릴 줄이야.

    “그, 그게 사실인가?”

    “라트님께서 벌인 일이셨습니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오케만 국왕과 미르차르드가 놀라서, 떨리는 입술로 묻자, 라트는 전쟁 초반부에 자신이 린느탐보프에서 흑마법사의 소굴을 발견하고 소탕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게 백작이 한 일이었나?”

    전쟁 중이라지만, 적대 국가가 아닌 곳의 소식은 들려왔기 때문에 린느탐보프에서 흑마법사 소굴이 소탕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오케만 국왕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누가한 일인지는 몰랐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을 줄이야.

    “그렇습니다. 여기 이게 증거품입니다.”

    흑마법사가 머물던 곳에서 장신구와 함께 발견한 흑마법서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린다.

    딱봐도 책에서 수상한 기운이 뿜어지고 있어, 루아타 공작이 살짝 몸을 떨었다.

    “흑마법서로군.”

    “그렇습니다.”

    단번에 이 책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루아타 공작의 말에 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서와 달리, 흑마법서는 신전에서 금서로 지정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흑마법서를 쓸 수 있는 흑마법사가 양지에 나와 있을 리도 없다.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핀스크 왕국이 흑마법사들에게 잠식됐다고 말하는 건가.”

    “제가 그곳을 습격했을 때, 흑마법사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그들 말로는 흑마법으로 핀스크 왕국의 국왕을 정신 지배하는데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적당히 각색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자, 케이네를 제외한 모두가 침음을 삼켰다.

    “그리고 핀스크 왕국을 건드리지 않으면, 전쟁을 살펴보자는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핀스크 왕국이 움직이지 않았군.”

    드디어 석연치 않은 점이 풀렸는지, 루아타 공작은 조그마한 탄성을 내뱉었다.

    “이 사실을 신전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해했다.”

    라트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한 루아타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세 명의 후작과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찌됐든 이 전쟁의 원인은 주인 없는 산맥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아니 그 이유만으로는 50% 밖에 되지 않는다. 설정 상 노르스 대륙은 500년 이상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소규모 영지전이 가끔 이어나거나, 주인 없는 산맥에 원정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겨우 그 정도다.

    어떤 나라가 평화에 찌들어 부패해버렸고, 어떤 나라는 평화를 머금고 강해졌다. 그렇기에 주인 없는 산맥에 있는 신비의 광산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시일에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평화로 얻을 수 있는 건 안정이지만,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안정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으니까.

    “잘 해주었다, 엔스리드 백작. 그대의 현명한 조치 덕분에 셀룬은 강해질 것이다.”

    “황송하옵니다.”

    라트의 노고를 칭찬하는 오케만 국왕에게 고개를 숙인 라트는 말을 이었다.

    “핀스크 왕국이 멸망 직전에 몰리면, 분명 흑마법사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전이 나설 것이고 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러니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브로켄 후작님의 말씀처럼 차리친의 영토를 점거한 반란군을 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당연히 그게 옳겠지.”

    브로켄 후작의 의견에 반대했던 세르먼트 후작 역시 납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핀스크를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 없다.

    “전하, 우룬 공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들라 하라.”

    이제 대화의 주제가 어떻게 반란군을 칠 것인가로 향하려고 할 때, 수려한 은색 갑옷에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기사 한 명이 알현실로 들어왔다.

    “충!”

    “그래 우룬 공 무슨 일인가.”

    ‘저 자가 우룬인가.’

    저 기사가 바로, 오로지 왕의 명령만 따르며 수도를 방어하는 막중한 임무를 책임지는 기사다. 귀족 작위는 없지만, 귀족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자였다.

    “조금 전 곤란한 통신을 받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반란군의 수장이라는 자가 이곳으로 와, 국왕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옵니다.”

    “반란군의 수장이?”

    “예.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찾아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똑똑한 요청이지. 셀룬 쪽에서 전쟁이라는 강수를 두기 전에 이쪽으로 와서 자신이 왕국을 세웠음을 인정받을 속셈이다.

    ‘똑똑하기도 하지만, 대범한데.’

    그러나 까닭 잘못했다가는 제 발로 사지로 들어오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이쪽에 방문하고 싶다고 미리 요청을 했다는 건.

    ‘속셈이 있다는 거겠지.’

    “적의 수장을 만나 볼 기회입니다, 전하. 그렇게 하지요.”

    브로켄 후작이 먼저 의견을 냈고, 미르차르드와 세르먼트 역시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나 루아타 공작은 쉽게 의견을 내리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오겠다는 건, 포탈을 열어달라는 소리겠지?”

    “그렇습니다, 공작님.”

    “혹여나 그들이 포탈을 이용해 불온한 짓을 꾸밀 가능성도 있다.”

    루아타 공작의 말도 옳은 말이다. 포탈을 이용해 거리를 무시하고 이쪽으로 올 수 있다는 점을 전쟁에서 이용한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렇기에 루아타 공작이 마법사들을 독촉해서 점령한 도시에 포탈을 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포탈이 열리면, 보급부터가 쉬워지니까.

    “그러니 포탈을 통해 이쪽으로 오는 건 열 명 내외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국왕 전하의 명령 아래 감시를 받게 한다. 그런 조건이라면 상관없겠지.”

    “루아타 공작의 말이 옳다. 그들은 한 나라를 전복시킨 위험한 이들이니까.”

    “그럼 그리 알고 이쪽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우룬이 알현실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오케만 국왕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아니. 그건 짐이 직접 전하도록 하겠다. 오늘이라도 오고 싶다고 했다면, 공작과 후작들이 모여 있을 때 오라고 하는 게 좋으니까.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전하.”

    “뜻에 따르옵니다.”

    국왕께서 남아있으라는데, 어쩌겠는가. 아무리 바쁘다고해도 취소해야지. 뭐, 전쟁이 이제 막 끝나서 바쁜 일도 별로 없었지만. 케이네와 라트 역시 그러겠다고 말하자, 오케만 국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우룬과 함께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

    반란군의 수장은 셀룬의 제안을 모두 수용하고 이쪽으로 오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그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왔는데, 이미 오늘 아침에 차리친의 수도가 점령당하고 차라친의 국왕을 포함한 왕가의 모든 이들이 반란군의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반란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쪽으로 와서 새로운 왕국이 건립되었음을 알리겠다는 건가.’

    똑똑하지 않은가. 라트는 미소를 지으며, 반란군의 수장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미리 이쪽으로 올 채비를 해놨는지, 반란군의 수장이 셀룬의 왕성에 들이닥쳤다.

    ‘이젠 반란군 수장이라고 부르기도 뭐하지.’

    이미 차리친을 집어삼켰으니,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이를 반란군 수장이라고 부르는 건, 상대방이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오케만 국왕님을 뵙습니다. 트렌세르노 헤스트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올 수 있는 것은 열 명 뿐이라고 했지만, 정작 트렌세르노와 함께 온 자의 수는 겨우 세 명 뿐이었다.

    “오케만 국왕이라고 한다. 일단 오느라 수고가 많았군.”

    트렌세르노라, 역시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눈과 머리색을 생각해봐도 라트가 아는 NPC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란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라니. 너무 평범한 조합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와 함께 온 세 명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맙소사.”

    국왕의 주변에 대동하고 있던 브로켄 후작이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탄식을 내뱉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가 저런 탄식을 내뱉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미르차르드와 세르먼트 후작의 표정 역시 굳어져있었고, 루아타 공작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다들 왜 이러시는 거야?”

    케이네의 귓속말에 라트는 피식 웃었다. 하긴, 연금술 말고는 관심이 없는 누나가, 특히나 아버지가 오러 마스터였기에 오러 마스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케이네는 저들이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젠 지거 하이데른 공작. 왼쪽에 있는 여자는 데모니아 이레네 카르나 후작, 둘 다 오러 마스터야.”

    저 두 명은 오러 마스터이자, 차리친의 자랑거리였던 기사단을 통솔하는 단장과 부단장이다. 설마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기사가 반란에 참여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두 명이 반란에 동참한 시점에서 차리친은 어떻게든 멸망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뒤에 있는 남자는 크룩스 프라시던스 자작. 차리친의 몬스터 테이머야.”

    케츠가 묘인족으로 몬스터 테이머의 자질을 타고난 존재였다면, 저 남자는 인간의 몸으로 몬스터 테이머의 길을 갈고 닦은 진짜배기였다.

    ‘이러니까 반란을 쉽게 성공했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저 정보전에 능통해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감추고 한 번에 터트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한 나라의 공작과 후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드리고 그 정보를 감추고 있었던 거라니.

    “아직은 정해진 것이 없으니, 트렌세르노 공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뜻대로 하시옵소서. 어차피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그럼 하이데른 공작을 왕으로 만들 생각인가?

    “참고로 저와 같이 계시는 분들도 왕이 될 생각은 없으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들 중 누구도 왕이 될 생각이 없다면, 도대체 누구를 왕으로 추앙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그럴 거면 애당초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뭐야.

    “오케만 그라이틴 제르만 셀룬이시여. 저희의 왕이 되어주시겠나이까?”

    반란을 일으킨 자, 트렌세르노 헤스트의 입에서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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