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56화 (15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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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일어나 고개를 들라.”

    명령이 떨어지자, 라트는 천천히 일어나 고래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들어올렸다.

    ‘며칠 전이랑은 딴 판인데.’

    응접실에서 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 때는 인상이 포근한 성왕이었다면, 지금은 근엄 넘치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대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내 그대가 기느투스 후작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맞는가?”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예의범절을 교육 받을 때도 듣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라트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눈을 찌푸렸다.

    아마 공작의 소행이겠지. 이 자리에서 라트가 연금술사임을 밝혀, 연금술사가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려 제스맹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려는 속셈일 터다.

    ‘나야 좋지.’

    제스맹의 꿈이 루아타 공작에게 친우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라트에게 제스맹의 꿈은 스승이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다.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인데, 당황스러움이 대수가 되겠는가.

    “그렇사옵니다. 기느투스 후작님께서는 3년 전에 고아였던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라트의 말에 귀족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난다. 전쟁에 참가했던 귀족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이들은 라트가 진짜로 연금술사인지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거다.

    명색에 오러 마스터를 이긴 자가, 지금까지 천시 받는 연금술사라니. 그들의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후작이 뛰어난 제자를 육성했군. 연금술사가 이리도 대단한 존재인줄은 짐도 몰랐다.”

    저건 헛소리다. 눈앞에서 현자의 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효력이 어떤지 지켜본 오케만 국왕이다. 현자의 돌에 비하면 오러 마스터를 이겼다는 공적은 태산 앞의 티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을 꺼내는 건, 죽은 기느투스 후작을 위해 연금술을 띄워주려는 속셈이다.

    “내 허락하겠느니 뒤로 돌아서,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너의 모습을 각인시켜라.”

    “충!”

    명에 따라 뒤로 돌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라트에게 집중된다. 모두가 놀라움과 경악, 질투 그리고 존경을 담은 시선을 보낸다니.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양되어 간다.

    보라, 이것이 연금술사다. 너희가 지금까지 무시하고 천대받던 연금술사가 당당히 서있는 이 모습을 보아라.

    전쟁에 참가했던 귀족들, 라트의 활약상을 알고 있는 병사들이 일제히 박수를 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박수를 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라트를 응시한다. 그렇기에 귀족 무리 사이에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는 돼지 새끼를 향해 싸늘한 웃음을 보인다.

    ‘직접 보니까, 기분이 묘하지?’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슈페림 자작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것으로 됐다.

    이렇게 소소한 복수를 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저 자를 파멸시켜버린다던가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럴 가치도 없는 돼지 새끼니까. 사람은 똥을 무서워서 피하는 게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모두, 이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두어라. 셀룬을 승리로 이끈, 영웅의 모습이니!”

    영웅, 과분한 칭호였으나 라트에게 있어서 그 이상 알맞은 칭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손으로 직접, 켈랑을 추락시켰다고 해도 옳은 말이었으니까.

    병사들이 함성을 지른다. 그들은 알고 있다. 라트가 무슨 활약을 벌였는지. 최전선에서, 혹은 최후방에서. 그의 활약상을 직접 목도한 것이 병사들이지 않은가.

    “영웅은 나를 보아라.”

    “충!”

    그 말에 다시금 몸을 돌려 국왕을, 한 나라의 지존을 목도한다.

    “그대는 말로 이뤄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공을 세웠다.”

    “황송합니다 전하. 모든 것은 셀룬을 위해서. 제 모든 활약은 국왕 전하의 덕이옵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겸손히 말한다. 이제 약속되었던 대로, 임명식의 시작이었다.

    “그대에게 무슨 상을 내릴지 고민했다. 영지를 내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대는 기느투스 후작이 묻혀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내 뜻이 맞는가?”

    “전하의 뜻이 맞사옵니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그대를 명예 백작으로 임명하겠노라.”

    주변이 술렁인다. 명예 귀족, 기느투스 후작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명예 귀족은 영지도 없고, 영지가 없기에 후계자를 둘 수 없다. 그렇기에 명예만 있는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권한은 다른 귀족과 같았다. 그러니 이 인사는 파격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지. 일개 평민이 단숨에 백작이 되었으니까. 제국에서는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노르스 대륙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백작이라.’

    좋아,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 백작위 정도라면 다른 귀족에게도 크게 꿇리지 않아. 더군다나 라트의 뒤에는 루아타 공작이 있다. 같은 백작이라고 해도, 라트의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는 없을 터.

    왕좌에서 일어나 오케만 국왕은 검을 뽑아들어, 라트의 어깨에 검을 가져다댄다.

    “그대 나에게, 셀룬에 충성할 것을 홀리의 이름 아래 맹세하는가?”

    “이 몸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충성할 것을 주신 홀리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그리한다면 내 그대에게 엔스리드라는 성을 부여하겠노니, 그대는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엔스리드 백작으로 불릴 것이다. 이 말에 불복하는 자, 나 오케만 그라이틴 제르만 셀룬의 이름으로!”

    반대쪽 어깨에 검을 가져다댄 오케만 국왕은 그 검을 들어올리고, 엄포한다.

    “목을 벨 것이다.”

    반발은 듣지 않겠다. 반발은 있을 수 없다는 국왕의 의지 아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인다.

    “라트 엔스리드 백작은 고개를 들라.”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앞으로도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겠노라.”

    “맡겨 주시옵소서.”

    그것으로 명예로운 첫 번째 임명식이 종료되었다.

    ***

    “피곤하다.”

    논공행상이 끝나고, 파티까지 끝난 늦은 밤. 라트는 케이네와 함께 지친 걸음으로 길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엘리는 루아타 공작과 할 일이 남아있기에 같이 오지 못했다.

    “누나도.”

    케이네 역시 라트와 마찬가지로 후작의 자리에 올랐으며, 동시에 연금술사 길드의 하이 마스터로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귀족들이 작위가 상승되거나, 영지를 얻었으며, 병사들 역시 상당한 양의 재화를 손에 넣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나 미르차르드 후작이었다. 전쟁 중간에 투항했기 때문에 단숨에 후작 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 하기야, 오러 마스터이고 켈랑에서도 후작이었으니 그에 준하는 대접을 해주는 것이 옳았다.

    “있잖아, 라트.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케이네의 말에 라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애당초 이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주인 없는 산맥에서 발견된 광산을 손에 넣기 위한 전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 없는 산맥의 주인이 되기 위한 전쟁이지. 이 전쟁의 끝에 남는 국가는 하나, 혹은 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셀룬은 어디랑 전쟁을 하게 되는 거야?”

    “그게 문제야.”

    “음?”

    케이네의 질문에 라트는 한숨을 내쉬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셀룬의 동쪽에 붙어있는 나라는 차리친이야. 대대로 셀룬과 동맹 관계였지. 동맹 관계인 나라를 치기에는 후에 정당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그럼 핀스크를 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것도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야.”

    핀스크 왕국은 켈랑과 동맹까지는 아니었지만, 대대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러니 핀스크는 켈랑을 점령한 셀룬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겠지. 명분도 있겠다, 땅도 바로 옆에 붙어있으니까.

    좋은 의견이다. 그렇지만 자세한 사정을 안다면 현재 시점에서 핀스크 왕국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당장 흑마법사 새끼들을 직접 건드리게 되면.’

    지금은 알아서 대륙이 피로 적셔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방관하고 있지만, 핀스크 왕국을 치게 된다면, 그로 인해 핀스크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면.

    흑마법사들이 대대적으로 전면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전도 나서게 될 건 불 보듯 뻔해. 신전이 나선다면 전쟁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핀스크 왕국을 치는 건 정답이 아니다. 그래서 글란츠 백작에게도 린느탐보프 왕국을 정리하고 나서, 핀스크 왕국을 치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엘리와 케이네에게 비밀은 절대로 없게끔 하기로 생각했지만,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은 지금 당장 말하긴 조금 그렇다. 글란츠 백작은 그것이 전쟁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아차리겠지만, 과연 케이네가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또 비밀로 하기에는.’

    둘에게 비밀로 하고, 슬렌베에 침입했을 때 그 사단이 났는데 또 일을 숨긴다면 그것도 좀 그렇다.

    ‘어쩔 수 없나.’

    “핀스크 왕국 내부에 흑마법사가 있어.”

    “에? 음? 흐, 흑마법사!?”

    “쉿.”

    케이네의 소리가 너무 컸기에 라트는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전쟁 초반에 여길 떠났었던 적이 있지?”

    라트의 손에 의해 입이 가로막힌 케이네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린느탐보프에 들렸다가, 흑마법사 무리가 숨어있는 곳을 발견했단 말이야. 거기서 정보를 입수한 정보야.”

    이것도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라트가 핀스크 왕국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길이 없기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타협점을 두기로 하자.

    “핀스크 왕국은 지금, 왕실까지 흑마법사의 손아귀가 뻗어있어.”

    말을 끝내고, 케이네의 놀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라트는 그녀의 입에서 손을 땠다.

    “흐음.”

    라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케이네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라트는 전쟁을 지금 당장 끝내기 싫어하는 구나?”

    “……정답.”

    라트는 눈을 크게 뜨고 케이네를 바라보았다. 이건 조금, 아니 많이 놀랍다. 대략적인 정보를 설명해주자마자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하고 결론에 도달할 줄이야.

    “그래, 전쟁이 끝나면 안 되지. 이건 주인 없는 산맥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니까. 신전이 나서면 곤란하겠어.”

    ‘과연, 글란츠 백작님의 여식답네.’

    새삼스럽지만, 케이네가 글란츠 백작의 여식이라는 걸 깨닫는다. 연금술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전쟁의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는 능력이 이 정도 일 줄이야.

    만약 그녀에게 오빠가 없었더라면 글란츠 백작의 후계자는 케이네가 아니었을까?

    “이 사실은 누가 알고 있어?”

    “현재로써는 누나랑, 누나의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단어에 케이네의 얼굴이 보기 드물 정도로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아버님이 알고 있단 말이지. 어떻게 알고 계시는데?”

    “에스페를 만나러 갈 때 우연히 만났거든. 그래서 린느탐보프 왕국과 전쟁이 끝나면, 흑마법사의 이유를 들어 핀스크 왕국을 견제해달라고 부탁드렸어.”

    “잘했어. 언제 적이 될 줄 모르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먹는 건 가장 좋은 전술 중 하나야.”

    ‘누나답지 않은데.’

    싸늘한 표정으로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케이네의 모습에 등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아버지를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 필요하다면 언제든 죽일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 태도에 그녀가 얼마나 가족에게 한이 맺혔는지를 깨닫는다.

    ‘여기도 여기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구나.’

    라트는 케이네를 잘 모른다. 정확하게는 설정을 제대로 몰랐다. 연금술사 NPC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저 케이네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정도의 수모를 당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글란츠 백작의 태도 문제도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럼 확실히 다음 전쟁 상대가 애매하네. 차리친을 칠 수도 없어. 핀스크도 무리야. 그렇다고 린느탐보프를 치기에는 차리친이 가로막고 있고.”

    “응.”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 차리친과 전쟁을 할 수 있고 선동과 날조로 명분을 만들면 되잖아.”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장은 그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라트 역시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명쾌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라트가 생각한 곳까지 결론을 내릴 줄이야.

    어쩌면 케이네가 정략결혼이 싫어서, 가출하지 않았더라면. 오빠가 없어서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더라면. 글란츠 백작급 전술가가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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