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55화 (15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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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목욕을 끝마치고 나오자, 시종들의 손에 이끌려 분장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아파온다. 이런 식의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익숙지가 않다. 익숙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겠지만.

    ‘귀족으로 시작했으면 익숙했겠지.’

    귀족으로 시작했다면 이 손길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기간이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옷을 동여매는 손길과 함께 질문이 들어오자, 라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불편합니다.”

    오히려 옷과 몸이 하나라고 느껴질 정도다. 역시 비싼 옷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건가. 거기에 이 시종들도 공작가에서 고르고 고른 프로들이니 라트가 불편함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왜 그렇게 굳으셨나요?”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공녀님의 짝이 되실 분이니,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시종의 단호함에 라트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가 공작이 되고, 라트가 남편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아니 그 생각은 전혀 못했다. 지금 당장의 일이 급하기에 미래에 관한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준비조차 하지 않았지.

    ‘미래라.’

    문뜩 생각해본다. 진엔딩을 보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진엔딩을 보면 집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라트는 현재 집으로 갈 생각이 없다. 부모님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쪽이 더 흥미롭고 즐거운 건 어쩔 수 없어.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엘리와 결혼하게 된다면? 차기 공작의 남편인 만큼 정치판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뭐, 그래도 달콤한 신혼 생활 정도는 만끽할 수 있겠지.

    ‘결혼, 인가.’

    한국은 현재 30대에 결혼을 해도 빠르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엘리와 라트의 나이라면 결혼을 빠르지 않은 나이다. 그보다 일찍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엘리와 함께 있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엘리와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그건 케이네도 마찬가지다.

    ‘나 정말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살고 있구나.’

    남들이 보기엔 힘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플레이어들이 본다면 게임에 미쳐서 여자들을 보지 않는 중증의 게임 중독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선 존대부터 거둬주시기를.”

    아아, 갈 길이 멀었군. 시종의 대답에 라트는 자소하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하대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모를까.

    “옷은 됐습니다. 거울을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됐습니다.”

    어차피 거울을 봐도 이게 잘 어울리는지 판단할 안목은 없다. 그냥 엘리와 케이네가 잘 어울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럼 부인께 인사드리고 장신구를 골라달라고 하시면 되겠네요. 따라와 주시길.”

    시종들이 옷을 갈무리하고 일어나서 먼저 방을 나서자 라트는 얌전히 뒤를 따랐다.

    “원래대로라면 저희의 주인이 되실 분이 시종이 앞에 서면 안 됩니다만, 아직은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시기에 안내해드리는 겁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요.”

    따끔한 충고가 라트에게 꽂혔다. 손님이라면 모를까, 공작의 사위가 될 사람이 시종의 뒤에 걷다니.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노력하겠, 하지.”

    습관적으로 존대를 하려고 하자, 시종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걸 확인한 라트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 존대 좀 할 수 있지.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엘리의 남편이 되면 화병으로 먼저 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뭐 내가 염려돼서 이러는 거겠지만.’

    현재 공작가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있어, 라트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고, 그의 신뢰치는 최고치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작의 사위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공녀님의 목숨을 3번이나 구해준 남자다. 적어도 공작가에 속한 사람 중에서 라트를 모르는 이는 없다.

    지금도 보라, 다섯 명이나 되는 시종 중 두 세 명이 힐끗 이쪽을 보면서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라트가 귀족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말하는 거다.

    “사위 분께서 오셨습니다, 부인.”

    “들라 하라.”

    어느 세 공작부인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는지, 부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어?”

    방 안에는 엘리와 케이네가 화장을 하는 중이었다. 엘리는 화장이 다 끝났는지 라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케이네는 얼굴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손만 흔들어주고 있다.

    “왔어. 둘 다 평소에도 예쁘지만, 오늘은 더 예쁘네.”

    ‘이 정도면 모범 답안이겠지.’

    엘리와 공작부인이 화사하게 웃었고, 케이네가 얼굴을 조금 붉히는 걸 보니 역시나 모범 답안이었나 보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트는 공작부인의 앞으로 가, 고개를 숙였다.

    “부인을 뵙습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피곤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오래 자게 두었답니다.”

    자애로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드는 공작부인은 시종들에게 장신구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그러자 시종들의 손에 장신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어째, 엘리와 케이네가 산 것보다 훨씬 종류가 많아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우리가 이렇게 많이 샀던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옷이면 몰라도 장신구는 가격대가 꽤 나가는 걸.”

    “그럼 왜 종류가 늘어난 건데.”

    “어머니가 사위의 장신구는 꼭 자기가 골라주고 싶다고 성화여서.”

    “어머, 엘리.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부끄럽잖니.”

    공작부인은 볼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이 라트를 노려본다. 그 모습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도망치고 싶어, 그러나 시종들에 의해 이미 문은 가로막힌 상태.

    “자, 이리로 오세요. 라트.”

    ‘살려줘.’

    포근하게 미소를 짓지만, 그 사이에서 보이는 눈동자는 사신과도 같았기에 라트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공작부인의 손에 의해 이끌렸다.

    ***

    ‘어라, 나 왜 여기 있는 거지?’

    병사들이 절도 있게 행군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건 바로 세르먼트 후작이었다. 주변에 수많은 귀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저 끝 편에는 수많은 호위를 대동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왕좌에 앉아있는 지엄한 국왕이 있었다.

    ‘기억이 삭제됐어?’

    “라트, 왜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는 거야? 설마 오늘 같은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자신이 죽을 뻔할 때는 물론이오, 전쟁 도중에도 라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엘리는 라트가 위기 상황을 잘 감지한다는 걸 알아내고 혹여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언제 여기 왔어?”

    “으응? 아까까지 누나랑 잘 이야기하고 있었잖니. 열이라도 나는 걸까?”

    케이네가 손으로 라트의 이마를 짚는다. 따스한 손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건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위기 상황을 버티기 위해서 기억을 날려버렸다는 소린가. 훌륭하다, 내 정신. 이런 기능을 탑재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열은 없는데?”

    “괜찮아? 이제 금방 임명식이 시작될 텐데.”

    “괜찮아, 괜찮아. 잠깐 멍해져서 헛소리가 나왔어.”

    여기까지 온 기억이 없다고 말하면 두 여성이 무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상상이 되지 않아, 자신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한 라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쟁에서 봤던 귀족들은 물론이오, 포탈 앞에서 봤던 귀족들도 상당히 많다. 거기다 귀족의 자식들 역시 부모의 옆에 서서 당당히 그 모습을 뽐내는 중이었다.

    자제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프레만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여식들이 프레만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라트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이도 있었지만, 엘리가 옆에 꼭 붙어있으니 감히 대놓고 라트를 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루아타 공작 외, 도합 62473명. 켈랑의 영토를 점령하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진군을 끝낸 병사들이 오와 열을 갖추고 고개를 숙이자 세르먼트 후작이 고개를 숙이고 상황을 보고 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켈랑의 멸망과 그 영토가 셀룬의 것이 되었음이 선포되었다.

    원래대로라면 군단이 이곳으로 돌아온 당일에 식이 거행됐어야 했지만, 뒤처리도 그렇고 병사들의 피로를 푸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오케만 국왕의 방침 때문에 이렇게 늦게 식이 거행되는 거다.

    “제군들 고개를 들라.”

    오케만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실로 당황스러운 말로 연설을 계시한다.

    본디 국왕의 앞에서, 평민은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감히 얼굴을 들 수조차도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오케만 국왕은 그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그대들은 오늘 승자로써 이곳에 서있다. 오늘만큼은 당당히 고개를 들어도 좋다. 그것이 승자의 특권이로다.”

    승자의 특권, 그것이 가슴을 울리게 만든다.

    “크게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작게는 가족을 위해서 보금자리를 떠나, 용맹하게 싸우느라 고생이 많았다.”

    승리했노라, 승리하였노라. 전쟁에서는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패자는 스러져 사라지게 되고, 승자는 정의로써 역사서에 영원히 기록되는 것이기에.

    “그렇니 고개를 들라.”

    승리, 그 달콤한 단어에 취해 병사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 누구도 그들의 행동에 반발하지 않는다. 오늘의 이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이 질문이 뇌리에 스친다. 뛰어난 지휘관? 강한 마법사? 훌륭한 무기? 다 좋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병사다. 병사가 없으면, 기본적으로 전쟁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흘렸을 피와 노고 이 가슴에 새기겠노라.”

    그 말은 꿀보다도 달콤했고 천 개의 금화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었다. 국왕이 직접 병사들을 바라보며 칭찬을 내린다. 한 나라의 하늘이 그들의 활약을 치하한다.

    그 누구라고 해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겠지.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홀리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기를 바라며 묵념하겠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짧게 묵념을 한다. 그것으로 승전보를 알리는 식은 전부 끝났는지, 오케만 국왕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이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이들을 소개하겠다.”

    이제부터, 진정한 논공행상의 시작이다. 기실 논공행상이라고 함은 전쟁에서 활약한 귀족들에게만 주워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귀족이 모인 건, 그 모습을 보고 본받으라는 취지도 있지만, 논공행상 이후에 남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루아타 공작이 국왕을 대신하여 앞으로 나서더니, 마법을 이용해 목소리를 증폭시킨 후 입을 열었다.

    “먼저, 라트. 앞으로 나오너라.”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라트는 굳은 얼굴로 서서히 왕좌의 앞으로 향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순서, 이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자만이 수여받는 명예로운 첫 번째.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라트에게 꽂혔고, 그제야 라트는 엘리가 그렇게 예의범절을 가르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리도 시선을 따갑게 받을 줄이야.’

    혹여나 미래의 신랑이 책이라도 잡힐까봐 그런 거였다. 엘리의 마음을 깨달은 라트는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보냈다.

    “국왕 전하의 앞에 서있는 자는 그대들도 알다시피, 처음부터 전쟁을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루크 성을 하룻밤 만에 점령할 수 있게 했으며, 메아리치는 언덕에서 미르차르드 후작을 포로로 잡고 투항하게 만들었다.”

    라트의 활약상이 읊어지자 아직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귀족들은 물론이오, 이미 그 소식을 들은 귀족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루크 성이 어떤 성인가. 천혜의 요새로 단 한 번도 외적에게 뚫리지 않았던 성이 아닌가. 거기에 미르차르드 후작은 오러 마스터다. 그러니 현재 오케만 국왕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젊은이는 최소한 오러 마스터 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나아가 런트에서는 후방을 기습하려고 한, 오우거와 그레이트 웜이 끼어있는 몬스터 300마리를 격파. 슬렌베에 침입해서는 천하의 악당인 루만과, 그의 수하인 호르토 공작을 처리하고 성문을 열었다.”

    아까까지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면, 이제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오우거를 포함한 몬스터 300마리를 단신으로 제압한 것도 놀라운데 그 손으로 직접 적의 수장을 죽이고 성문까지 열었다니.

    “이상의 활약으로 라트가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라 평한다.”

    루아타 공작이 불만이 있냐는 듯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는 못했다.

    압도적.

    그 단어가 이렇게 어울리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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