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52화 (152/229)
  • 0152 / 0229 ----------------------------------------------

    1부

    “아, 그래. 자네가 엘리의 약혼자라고?”

    “그렇습니다.”

    루아타 공작이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이 사실을 그가 알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며칠 전 포탈 앞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에 엘리와 라트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게 국왕에게까지 알려진 모양이다.

    ‘그래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예상했지.’

    그렇지만, 국왕이 이렇게 직접 언급할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귀족 자리를 내줘서, 논란이 들어가게 해야겠구먼.”

    귀족들 사이에서 공녀가 평민과 짝을 이뤘다는 사실이 퍼지자, 불쾌한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자신 혹은 자신의 자식이 공녀와 이어지지 못한데 원통해하는 자들의 뒷담화였지만.

    “실로 안타깝도다. 엘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공주가 이미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왕족으로 맞이했을 텐데.”

    “예?”

    오케만 국왕의 말에 라트는 저도 모르게 반문해버리고 말았다. 왕족으로 받아드리겠다니,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노르스 대륙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일개 평민, 일개 연금술사가 왕족이 된다니. 수많은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국왕 전하…….”

    “농담일세, 농담이야. 어차피 내 딸은 이미 시집을 가지 않았나.”

    오케만 국왕이 하하하,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농담이 아닐 것이다. 남은 공주가 있었더라면 라트와 당장이라도 혼약하자고 말할 기세다.

    ‘셀룬의 공주라면 엘리자베스였지?’

    여자 NPC 특히나 히로인 NPC에는 관심이 없던 라트는 머리를 굴려 셀룬의 공주가 누구인지 생각해냈다.

    엘리자베스 셀룬, 어린 나이에 제국의 후작가로 시집을 가게 된 공주였다. 그래 그랬었던 것 같아. 제국의 후작가 정도라면 왕국의 공주와 격이 맞아떨어졌기에 결혼은 순식간에 성립되었지.

    ‘문제는 그 후작가의 아들놈이 일찍 죽는다는 거야.’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한 후작의 아들은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객사하고 만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중요한 NPC도 아니고 중요한 사건도 아니라서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어 다시 셀룬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 공주는 덕분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제국에서 일어난 거대한 불화를 피할 수 있었다.

    ‘미망인 NPC라고 존나 좋아했었지.’

    카사노바 플레이를 지향하는 놈들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정절을 지키려는 미망인 NPC라서 굉장히 좋아했었다. 게시판에 불타오른다고, 절대로 공략해주겠다고 올라왔던 글들이 아직도 기억이 날 지경이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물이옵니다.”

    “허허허허.”

    라트의 대답에 오케만 국왕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약 2년 전부터 라트의 성장을 보았던 루아타 공작은 국왕보다는 덜한 반응이었지만, 역시나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약관 20세. 아직 철이 제대로 들었다 하기에도 어려운 나이에 그만한 활약을 하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겠지.

    ‘실제 나이는 이제 서른을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 나이는 겨우 20세지만, 지구에서 살아온 세월과 이곳에서 살아온 세월을 합치면 라트의 나이는 대략 27~28 사이다. 뭐, 그걸 감안하더라도 라트가 이번 전쟁에서 펼친 활약은 어마어마했다.

    ‘전부 게임 시스템 덕분이지만.’

    만약 게임시스템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강해지는데 에로사항이 꽃폈을 거다. 무색의 연금술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겠지.

    “이제 스물에 이렇게 장래가 탄탄하다니. 부러울 지경이야, 루아타 공작.”

    “이 모두가 국왕 전하의 덕이옵니다.”

    부러울 이유 하나 없다. 라트가 루아타 공작의 사위가 된 이상, 셀룬을 배신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런데 기느투스 후작과는 어떻게 만났나. 내 알기로 후작은 한 명의 제자 밖에 받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스승님께서는 저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천애고아이던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라트가 제스맹에게 생명의 연금술을 보여줬을 때를 떠올린다. 그는 웃으면서 라트를 제자로 받아주고 생명의 연금술을 다른 연금술사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당연하 말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힘이었으니까. 장담하는데 만약 라트가 제스맹의 제자가 될 생각을 못했더라면, 지금쯤 라트는 다른 연금술사의 실험체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한 번 제스맹의 인복에 감탄하고, 또다시 슬픔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슬픔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렇군.”

    오케만 국왕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본다. 스승의 일 때문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인데, 좋지 않은 기억까지 꺼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필요 없다. 라트에게 있어 이 세계의 부모는 기억조차 없는 허구의 존재일 뿐이니까.

    “겸연쩍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국왕 전하. 부모님은 너무 어릴 적에 돌아가신 터라 기억에도 없으니까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그 말에 오케만 국왕은 표정을 풀고 웃는다. 이쯤이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지 않을까?

    “전하. 황송하오만, 소신이 두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두 가지 청이 있다고? 말해보아라. 내 최대한 수용하도록 하지.”

    오케만 국왕의 반응과 루아타 공작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진짜로 부탁을 해도 되는 것 같다.

    “첫 번째 청은, 저를 귀족으로 임명하실 거라면 영지를 하사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음?”

    보통 영지를 내려달라고 청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반대로 영지를 내리지 말아달라는 라트의 부탁에 국왕은 이상하다는 듯,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트의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파르스에 있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사옵니다.”

    케이네 때문에 이곳에 남아있고 싶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오케만 국왕은 약간 불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저런 반응일까? 땅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다. 특히나 귀족에게 하사할 영지는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어째서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가.

    “자네에게 영지를 하사하지 않으면, 이번 논공행상의 형편성이 어긋나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나 보군 그래.”

    “예?”

    “국왕 전하의 말씀대로다. 자네에게 영지를 하사하지 않으면, 그 어떤 귀족도 영지를 내려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거다.”

    ‘그건 좀 곤란한데.’

    저 말 그대로라면 라트는 어쩔 수 없이 영지를 하사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지를 하사 받으면 수도에 있지 못해. 케이네를 홀로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국으로 가게 되면 케이네와 엘리를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라도 최대한 같이 있고 싶었다.

    라트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오케만 국왕은 짓궂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뭐 사실, 그건 내 마음이지만 말이야. 껄껄껄.”

    “조금 더 놀려먹어도 괜찮았습니다, 전하. 이런 당황한 모습은 자주 볼 수 없는 지라.”

    ‘놀리는 거였어?’

    한 나라의 국왕과 공작의 대화치고 너무 수수하지 않나? 라트는 어이가 없어서 두 명의 모습을 번갈아보았다. 진심으로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자네가 명예 귀족을 원하고 있다는 건 이미 딸아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루아타 공작의 말에 라트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미 공작은 엘리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 애초에 명예 귀족 자리를 원하면 된다고 말한 것 자체가 엘리의 아이디어였다. 당연히 엘리는 루아타 공작에게 이 사실을 귀띔했을 거다.

    “이미 뜻은 알고 있었고, 충분히 논의한 뒤다.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럼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인가.”

    명예 귀족 자리를 주겠다는 확답을 얻은 라트는 입맛을 다셨다. 일단 하나는 원하는 대로 됐다. 그렇지만 이 부탁은 사실 상 확정이라고 봐야하는 거였고. 문제는 지금 할 부탁이지.

    “시그나룬벨 공주님을 셰크티 제국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쩌면 주제넘은 부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고, 황녀에게 미리 줄을 대놓을 수 있는 기회다. 이런 기회, 흔치는 않아.

    “시그나 공주를?”

    라트의 부탁에 국왕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가.”

    “그것이 그러니까.”

    우선 런트에서 있던 일, 시그나룬벨 공주가 제국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일. 그리고 시그나가 황녀와 상당히 친한 관계라는 점과 공주님께서는 정략결혼을 하고 싶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점까지 모조리 설명한 라트는 오케만 국왕을 바라보았다.

    “흐음.”

    라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오케만 국왕이 침음을 삼킨다. 당연히 고민이 되겠지. 포로로 잡은 공주를 그냥 놓아주겠다니,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그나 공주가 그리 원한다면, 내 대화 후 그렇게 해주도록 하는 게 맞겠지.”

    그러나 공주가 진심으로 그리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 생각인가보다. 저 반응을 보니 라트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시그나 공주가 직접 부탁을 했다면 제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생색을 낼 거지만.’

    생색을 내야, 시그나 공주가 라트에게 고마움을 느낄 거다. 그러면 후에 제국에 갈 때 편해지겠지. 일단 황녀와 줄만 만들어줄 수 있다면, 제국 반란은 한층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다.

    ‘그래도 흑사제 놈들은 질색이지만.’

    흑사제들을 떠올리니, 그 날 밤 자신을 죽이지 않고 물러섰던 시리아의 모습이 생각났다.

    ‘도대체 무슨 목적이었을까.’

    단순히 라트를 보고 싶어서, 페르시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런 소란까지 일으켰다. 사람을 죽여, 구울로 만든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임이 분명하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신전에서 대대적인 추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루아타 공작이 이미 신전에 보고해서, 사제와 성기사들이 시리아를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라트를 만나러 온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지금은 알려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라트 입장에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는 알 수 있을까. 그 미친년의 목적이 무엇인지, 과연 알 수 있을까? 그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헌데, 부탁은 그게 다인가?”

    “예.”

    들려오는 물음에 라트는 생각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은 바랄 것이 없어. 필요한 것은 전부 얻었다.

    “정말로?”

    그러나 무엇이 부족한지,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로 부탁이 없는지를 묻는다.

    “나와 독대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네. 그런데 겨우 그 부탁이 다인가? 사실,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자네에게 이득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나.”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수도에 남을 수 있고, 제국으로 갔을 때 연줄을 만들어놓는 것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당장은 아무것도 없을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한 거다.

    “허허허. 자네는 자네의 안녕에는 별 관심이 없나보군. 연금술 재료라도 지원해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말이야. 잘 생각해보게나.”

    ‘아니 그렇게 말해도, 딱히 필요한 게.’

    지금 상황에서 오케만 국왕에게 얻을 건 없다. 돈도 충분히 있어, 영지도 필요 없지. 그렇다고 무언가를 달라고 하기에도 그래.

    “아!”

    잠깐만, 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하나 얻을 게 있기는 하지.

    “생각난 것이 있나?”

    “왕가에 있는 무구 중 가장 좋은 무구를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모든 왕국은 비밀 창고를 가지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왕가에서 가장 좋은 무구는 전설급 이상의 무기일 터. 그 무기를 한 번이라도 보고 생명의 연금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라트의 전투력은 상당히 올라가게 된다.

    “보고 싶다고?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예.”

    오케만 국왕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다가, 그 눈을 루아타 공작에게 돌렸다.

    “원래 이렇게 욕심이 없나?”

    “그렇습니다, 전하. 제 딸아이의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줬음에도 저한테 보상이 필요 없다고 말하더군요.”

    “흐음.”

    아니, 그건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일이라서 그런 거지. 다른 귀족의 자녀였으면 그 귀족이 거덜날 정도의 보상을 원했으리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