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48화 (14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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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흐응.”

    “하우우.”

    두 여자의 묘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한 쪽은 루아타 공작의 외동딸인 엘리자넷 시르 루아타였고, 다른 한 쪽은 글란츠 백작의 여식인 케이네 폰 글란츠였다.

    케이네와 라트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 날. 엘리가 연금술사 길드를 방문하자, 라트는 파란이 일어날 것을 각오하고 엘리에게 케이네와 자신의 일을 고백했지만.

    파란은 없었다. 그저 이리될 줄 알고 있었으니,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말 뿐이었지. 엘리의 반응에 케이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것은 여담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엘리와 케이네에게 사과를 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반드시 먼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엘리와 케이네가 약간의 고심 끝에 라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과를 받아드렸고,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서.

    지금 이 상황이다. 오른쪽에는 엘리, 왼쪽에는 케이네를 껴안고 있다니.

    케이네는 원래 이곳에서 지냈지만, 엘리 역시 루아타 공작은 전쟁 뒷정리 중이라 돌아오지 못하는 중이고, 어머니는 영지로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에 혼자있기가 그래서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행복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도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양손의 꽃이기는 한데.’

    루아타 공작에게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왠지 리오스와 에스페가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무시했다.

    “인간이 처와 첩을 둔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당황스럽군.”

    “오빠, 여자 많아.”

    에스페의 시선에는 신기함이 깃들어있었지만, 리오스의 시선에는 왠지 모를 적의가 가득했다.

    “저기 좀 떨어지지 않을래. 저래뵈도 숲의 현자님이신데 예의는 지켜야.”

    “괜찮아, 라트가 기절해있던 사이에 인사는 나눴으니까.”

    엘리가 당당하게 괜찮다고 말하는 반면, 케이네는 얌전히 라트의 품에서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엘리는 케이네에게 배신자라고 중얼거리며 역시 라트의 품에서 떨어진다.

    “그 때는 급박하여 제대로 소개를 하지 못했구나. 본녀는 에스페라니티타라고 한다. 세간에서는 숲의 현자라고 불리고 있지.”

    “엘리자넷 시르 루아타라고 해요.”

    “케이네 폰 글란츠라고 합니다.”

    세 여성이 인사를 나누자, 리오스는 귀엽게 눈을 깜빡이더니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나, 자이리오스.”

    “아, 니가?”

    리오스의 이름을 들은 순간, 엘리는 라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소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트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고생 많았겠네.”

    “따뜻해.”

    그 손길에 리오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을 감고 웃는다. 로리콘들이 본다면 당장이라도 모에사를 당할 정도로 그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다.

    “누나. 에스페랑 리오스는 나를 따라서 온 사람들인데, 계속 여기 있어도 될까?”

    아직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조금 있을 논공행상에서 케이네는 제스맹 기느투스의 후계자로써 후작와 길드 마스터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러니 에스페와 리오스를 어찌할 지도 케이네가 결정해야했다.

    “괜찮아. 라트의 손님은 누나의 손님인걸.”

    케이네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주니, 마음이 놓인다.

    “아, 그런데 석판은 어떻게 됐어?”

    전쟁에 참여하기 전, 에스페에게 석판의 조사를 부탁했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에스페라면 어떤 답을 내주지 않을까?

    “이건 다시 돌려주지”

    에스페는 로브에서 석판을 꺼내 라트에게 석판을 넘겨주었다. 악신의 석판과 똑같은 석판으로 보이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른 석판.

    “안타깝게도 현재로써는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석판인지 전혀 모르겠네.”

    참담한 목소리가 라트의 귀를 간질인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일단 조사를 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페 역시 이 석판이 어떤 용도로 제작됐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석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석판 조각이 적어도 두 개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두 개나?”

    하나도 정말 우연히 발견했는데 두 개나 필요하다니. 불가능한 요청에 라트는 침음을 삼켰다. 이 아이템은 월드 세리아를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그걸 두 개나 더 찾아야 한다니. 골치 아픈 일이다.

    “천 골드 정도를 사용해 고대 서적을 모조리 사들여 읽어봤지만, 이런 석판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네. 악신의 석판과 관련된 기록이 쓰여있는 책에도 이 석판에 대한 기록은 없었어. 그렇다면 다른 책에도 이것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뜻이겠지.”

    “악신의 석판? 이 석판은 뭐고 악신의 석판은 뭐야?”

    엘리의 물음에 라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두 여자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도, 숨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해야겠지.

    “이 석판 조각이 뭔지는 나도 몰라. 단지, 이 석판에 적힌 문장이 우리가 섬기는 다섯 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그것도 본녀가 알아낸 사실이지만.”

    라트의 말에 끼어든 에스페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그래봤자, 절벽이 강조될 뿐이지만. 에스페를 잠시 흘겨보던 라트는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연다.

    “그리고 악신의 석판이라는 건, 마계와 인간계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야.”

    악신의 석판이라는 건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일어나는 두 번째 메인 퀘스트의 열쇠다. 석판 조각이 전부 모여, 마계로 향하는 문이 나타나고 마족들이 침공이 시작되는 게 두 번째 메인 퀘스트지.

    플레이어는 신전의 군세와 함께 마족을 처리하고 최후에는 마왕을 죽여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족 쪽으로 붙을 수도 있지만, 라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이 있어?”

    “끔찍해.”

    마족과 인간계는 가로막혀있지만, 몇몇 미친놈들이 그 봉인을 약화시키고 현세에 악마를 소환한 적은 있다. 그 때마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었지.

    “그런 물건도 있어. 언제 그 조각이 전부 모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악신의 석판 조각이 완성되는 시기는 라트조차 알지 못한다. 메인 퀘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왕국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이 조각은 악신의 석판 조각이 아닌 거야?”

    “그렇다네. 악신의 석판 조각과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지만, 아닐세.”

    악신의 석판에 인간을 모시는 다섯 신을 찬양하는 구절이 적혀있을 리가 없지. 그렇기에 에스페는 이것이 악신의 석판 조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건 라트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템 정보에서 악신의 석판 조각이 아님은 확인했었으니까.

    “엘리, 공작님께 연락 온 건 없어?

    이 대화를 계속 이어봐야, 그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라트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고는 하셨어. 아마도 모레쯤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모레인가. 그 때까지 할 일이라고는 엘리와 케이네랑 이렇게 꽁냥거리는 것뿐인가. 사실 아직까지 슬픔은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다. 스승님께서 울지 말라고, 행복해지라고 하셨으니까.

    이제야 브로켄 후작의 말이 이해가 됐다. 스승의 죽음에 의해 라트가 슬픔에 잠식당할까봐, 그런 조언을 남긴 것이다. 그 말은 즉, 브로켄 후작은 이미 스승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 루아타 공작 역시 마찬가지겠지. 스승의 죽음을 알리는 그의 얼굴에 거대한 슬픔은 엿보였을지언정, 급박함은 없었다. 아마도 스승님께서는 라트와 케이네에게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고는 생각하지 못하셨겠지.’

    스승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평생토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제스맹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논공행상이 결정될 거야. 축하해 차기 귀족님.”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엘리는 라트가 귀족이 될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었다. 그건 케이네 역시 마찬가지다.

    난공불낙이라고 불리는 이루크 성을 쉽사리 함락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메아리치는 언덕에서 미르차르드를 사로잡아 투항시켰다.

    런트에서는 후방의 병사들이 몰살당하고 남겨진 물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

    결정적으로 루만과 호르토 공작을 죽였다.

    앞의 세 업적만으로도 칭송받을 수 있겠지만, 마지막 업적은 그 누구도 라트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말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확정이나 마찬가지 아니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케이네와 엘리는 이미 라트가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중이었다.

    ‘뭐, 될 것 같기는 한데.’

    전쟁이 끝을 고한 순간 합사된 라트의 공적 랭크는 A+였다. 그 정도라면 평민이 아무리 귀족이 되기 어려운 노르스 대륙이라고 해도, 귀족이 될 수는 있을 거다.

    제국이라면 백작위까지 노려볼 수도 있겠지. 다만 왕국이기에 잘해봐야 자작. 아마도 남작 위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 작위는 크게 의미가 없지만.’

    라트에게는 작위는 크게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전쟁 때문에 땅이 넓어졌으니 영지를 내려주는 건 확정이라고 봐야한다. 오케만 국왕이 영지를 내려준 순간, 그곳을 관리해야한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좋은 일이다.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자신의 주머니로 가는데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라트에게 영지는 귀찮은 존재였다.

    돈은 충분히 많으니 영지를 관리하기 보다는 메인 퀘스트를 깨면서 진 엔딩으로 어떻게 가는지 고심하는 게 중요하다.

    “영지를 받으면 영지를 관리해야 되니까,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수도에서 떠나야될 거 아니야.”

    결정적으로 영지가 생기면, 당분간은 수도에서 떠나야한다.

    “차라리 명예 귀족이면 좋을 거 같은데.”

    영지를 내려주지 않고, 스승님처럼 명예 귀족 자리만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영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명예 귀족이라면 엘리와 케이네 곁에 있을 수 있다. 자유롭게 메인 퀘스트를 깰 수 있다.

    “그걸 왜 고민해?”

    라트의 말에 이제는 리오스의 뺨을 쓰다듬고 있던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런 걸 고민하고 있느냐는 표정이다. 아니 당연히 고민해야지.

    엘리야 약혼자라는 핑계를 이용해 라트와 함께 영지로 갈 수 있다. 에스페와 리오스도 손님으로써 영지로 가면 된다. 그렇지만 길드 마스터이자, 하이 마스터인 케이네는 수도에서 떠날 수가 없어.

    “아버님이 오시면 부탁드리면 되잖아. 국왕 전하께서도 영지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좋아하실걸? 영지를 받는다면 최대 자작위가 한계겠지만, 명예 귀족이라면 백작위도 노려볼 수 있을 거 아니야.”

    엘리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라트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케이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권력자가 바로 옆에 있으면 청원을 넣으면 되지, 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 그러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지 못하고 한심하게 고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 라트는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바보.”

    “라트는 똑똑하지만, 가끔 보면 멍청한 구석이 있어.”

    바보에 멍청이인가. 이번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라트는 아무런 반론도 펼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모레인가. 그쯤이라면 미르차르드도 돌아올 것이다. 오케만 국왕의 입장 상, 오러 마스터의 투항은 어마어마한 호재일 테니까. 논공행상에 그가 빠질 수는 없겠지.

    “리오스.”

    “왜 오빠?”

    미르차르드가 오면 부탁할 것이 있다. 리오스를 부른 라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검을 배워볼 생각 없니?”

    미르차르드에게 할 부탁할 것은 바이올런의 성녀가 되지 않을 리오스에게 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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