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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장례식이 끝나고, 라트와 케이네가 길드에 처박힌 지 2일이 지났다. 루아타 공작의 말에 따르면 전쟁은 끝났지만, 그 뒤 처리 때문에 미르차르드와 자신은 당분간 수도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루아타 공작은 논공행상은 자신이 돌아온 이후에 열린다고 하니, 그 때까지 마음을 추스르라고 했다.
“그대여.”
아직도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던 중, 어느 사이에 방으로 들어온 에스페가 라트를 불렀다. 장례식에는 남모르게 리오스와 함께 참여했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길드에 머무르고 있었다.
라트의 부탁 때문이었지. 에스페도 리오스도 사람의 눈에 띄는 존재니까.
“인간의 삶은 덧이 없구나. 그 대연금술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인간의 삶이 덧없다는 에스페의 말에 라트는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아리따운 죽음이기도 하다. 이리도 많은 이들이 찾아오다니, 그의 덕을 알 수 있는 광경이었어.”
그런가. 라트는 한숨을 내쉬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맛이 쓰게 느껴진다. 너무 써서 당장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대에게 전해줄 것이 있다네. 대연금술사께서 남긴 유서라네.”
“유서?”
에스페의 말에 라트는 곧바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낚아챘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의문만이 깃들어있었다.
‘스승님의 유서라면 분명 루아타 공작이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대연금술사가 자네에게만 보여주라고 한 유서라네. 나에게 부탁해서 넘겨달라고 하더군.”
라트의 의문을 알아차린 에스페가 말을 덧붙이자, 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이 자신에게만 유서를 남겼다면, 그건 필시 이유가 있을 터다.
“그럼 나는 이만 나가보겠네. 천천히 읽게나.”
에스페가 방 밖으로 나가자 라트는 유서를 열어보았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둘 째 제자이자, 내 손주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 나는 이미 숨을 거뒀겠구나. 말없이 이렇게 가게 돼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그건 내 결정이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할애비는 너의 앞길에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단다.
이렇게 너에게만 편지를 남기는 이유는, 부탁할 것이 있어서다. 곧 죽으려고 하는 늙은이가 짐을 넘겨서 미안하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두 대륙에서 유일하게 대연금술사라고 불리는 몸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있지.
당연히 너라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내 꿈을 너에게 맡기마. 너의 방식대로 철저하게 가르쳐줘라. 우리 연금술사들이 어떤 존재인지.
나는 너를 믿는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케이네를 부탁한다. 어릴 적, 가족의 정을 받고 살지 못해서 마음이 굉장히 여린 아이야. 너에게는 사저이자 누나이지만, 나에게는 약한 손녀다. 앞으로 케이네를 잘 지켜다오. 첫 번째 부탁은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 부탁은 꼭 들어줬으면 한다.
이것만 지켜줘도, 나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마지막으로……』
편지의 끝을 읽은 라트는 입술을 씹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입을 다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입술을 씹는다.
『사랑한다, 내 손자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 이 사실은 변치 않을 거란다. 그러니 울지 말고, 행복해져라. 그래야 나도 편하게 가지 않겠느냐?
늦은 밤, 두 제자의 앞날을 생각하며 대연금술사 제스맹이.
P.s 지하 비밀 수련실에 선물을 남겨놨으니 요긴하게 쓰길 바란다.』
사랑한다, 그 말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추신에 선물을 남겨놨다니. 이미 많은 것을 주셨는데 어찌 또 무엇을 주려고 하시는가.
휘청 휘청 지하로 걸어간다. 걸어가던 도중 수련생들과 사범들을 지나치긴 했지만, 그들의 인사는 라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하 수련장에 들어서자 지하실에는 스승의 취향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는 인형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한 동작으로 엘릭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야. 열 병, 아니 그 이상의 엘릭서를 만들고 있다.
그 인형에서 스승이 마지막으로 짜낸 마력을 느꼈기에 라트는 다시 한 번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드린 것도 없는데, 어찌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울며 목 놓아 외친다. 그리하며 맹세했다. 스승이 남긴 두 가지 부탁은 절대로 지키겠다고.
눈물을 닦아내고 지하실에서 나와, 아직 울고 있을 케이네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녀의 방으로 향한다.
“누나.”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눈물이 메마를 정도로 울었음에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내 탓이다. 케이네는 연금술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승을 잃었으니 얼마나 참담할까.
그렇기에 그녀를 껴안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지만 오늘은 한층 더 강하게 껴안는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케이네는 알고 있다. 스승이 이렇게 빨리 죽은 원흉이 라트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스승의 죽음에 슬퍼할 뿐이다. 그렇기에 사과한다. 케이네의 버팀목을 앗아간, 악랄한 짓을 사과했다.
그거 뿐이 아니야. 라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라트에게 다가가지 않고 홀로 외롭게, 처연하게 울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어째서 내가 있는데, 혼자서 우는 것인가. 슬픔을 받아줄 동생이 여기 있는데 왜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가.
“옆에 있을 테니까, 내 옆에서 울어. 혼자서 외롭게 울지 말고.”
더더욱 슬프게 눈물을 흘리는 케이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온기를 느낀다.
“스승님은 가셨지만, 내가 있잖아. 누나는 혼자가 아니야. 가족이 있다고.”
사실 라트는 케이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월드 세리아를 아무리 많이 플레이했다지만, 관심이 있는 NPC에게만 관심을 줬지, 관심이 없는 NPC의 정보까지 일일이 외운 것은 아니었다. 그건, 엘리 역시 마찬가지지.
그래서 케이네의 과거가 어떤지, 대충은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성장 과정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족의 정을 바라지 못하고 자란 케이네가 느낀 상실감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동생이 여기 있음을 알릴 뿐.
“가족은 싫어.”
그런데 케이네는 뜻밖의 말을 꺼낸다. 라트를 원망하고 있지 않을 뿐, 이제는 라트가 꼴도 보기 싫어진 것인가.
“가족은 좋지만, 동생은 싫어.”
이어지는 말에 라트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하는가.
“런트에서 봤단 말이야. 너랑 엘리가 키스하고 있는 걸.”
라트가 혼란에 빠진 그 순간, 케이네는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 때 내 가슴이 엄청 아팠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런트에서 문뜩 잠에서 깨 밖으로 나오자, 라트와 엘리가 달빛 아래에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살짝 열어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아팠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먼저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 동생을 빼앗긴 것 같아서 슬펐다.
“그 때 알았어. 아, 나는 동생을 진짜 동생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구나. 남자로 여기고 있었구나.”
이런 감정은 동생에게 향할 감정이 아니다. 알고 있었다. 오우거에게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있을 때도 알고 있었다. 케이네 자신이 라트를 동생이 아닌, 남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닌걸. 같은 동문에, 공녀라는 짝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니. 이건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연히 슬프게 고한다. 그 때부터 라트와 거리를 벌렸다. 라트의 연인은 공녀다. 첩실을 둘 생각은 없겠지. 그것을 알기에 거리를 벌리고 라트와의 스킨쉽도 피했다. 이 마음이 커지면 서로가 곤란해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
라트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곤란해서,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면 미칠 것 같아서, 그냥 그저 옆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욕심을 버렸다.
“그렇지만 이제 싫어.”
그러나 이제는 아니야. 제스맹이 떠나간 지금, 이제 케이네에게 남은 건 라트 뿐이다. 그렇지만 그 라트 역시 엘리와 결혼하면 자신을 떠나겠지. 그렇게 또다시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케이네는 버렸던 욕심을 다시금 주워든다.
“동생이면, 불안해. 나 혼자 남겨질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스승님도 이렇게 말도 없이 가셨는데, 라트까지 훌쩍 떠나버리면, 누나는!”
“안 떠나.”
잠자코 케이네의 말을 듣고 있던 라트는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단언했다.
“절대로 안 떠나.”
“절대라는 건 이 세계에 없는 말인걸.”
절대라는 것은 없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이다. 아무리 곧은 신념도, 약속도, 맹세도, 긍지도, 인간이기에 변색된다. 신이 아닌 이상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누나는 라트를 사랑해.”
“나도.”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돌아오는 즉답에 케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라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케이네와의 두 번째 입맞춤은 눈물로 젖어서 조금 짰다.
“어, 어?”
라트가 입술을 때자, 온기가 떠나지 않은 입술을 매만진 케이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라트를 바라보았다.
엘리는 알고 있었겠지. 라트가 케이네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본처는 나지만, 첩실을 들일 용의는 있다고.
바보같게도, 그 때는 그 뜻을 몰랐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처연히 고백하는 케이네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져서 껴안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다.
남자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것은 질투였다. 이제야 알아차렸다. 누나도 그렇지만, 자신 역시도 사저를 사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나라고 부르라는 케이네의 뜻에 마지못해 따르는 척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이걸로 내 말뜻이 누나 뜻이랑 같다는 걸 알았지?”
라트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케이네는 아직도 이 상황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라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기나긴 입맞춤이 지나고, 다시금 서로가 떨어졌을 때.
“사랑해, 누나. 그러니까 울어도 내 옆에서 울어. 내가 누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케이네는 다시금 왈칵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고, 라트는 케이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를 의지한 채 슬픔을 지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