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46화 (14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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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라트가 눈을 뜬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이 세계에 있는 동안 이곳에 있는 시간이 가장 많았는데.

‘내 방이다.’

라트가 있는 곳은 파르스의 연금술사 길드에 있는 라트의 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전쟁은 끝났다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을 텐데.

비몽사몽한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면서 주변을 살핀다. 창밖으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 인가. 먹구름이 드리워 세차게 퍼붙고 있지만, 번개는 치지 않는다. 마치 하늘이 울고 있는 것처럼.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잃기 전에 엘리와 케이네에게 사죄를 하던 자신을 떠올린 라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왔다면 분명 케이네도 여기 있을 거다. 그리고 제스맹도 있겠지.

그들을 만나야한다. 그것말고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트는 옷을 대충 입고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케이네의 연구실부터 시작해서, 제스맹의 연구실에도 들려봤지만,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수련생이나 사범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심지어 리오스와 에스페도 없다. 그 누구도 이곳에 없다. 인기척 하나 없는 쓸쓸한 공간에 남겨졌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들어 곧바로 1층으로 향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연금술 용품은 판매를 해야 하니, 판매대를 맡고 있는 루시라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층에 들어섰음에도 라트를 맞이해준 것은 오로지 정적뿐이었다.

무섭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정적이 무서워, 불길해서 참을 수가 없어.

‘나, 어쩌다가 쓰러진 거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케이네와 엘리에게 사죄를 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루아타 공작이 들어온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진심이리라.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곳은 파르스, 셀룬의 수도다. 전쟁에서 이겼는데 어찌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아무리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해도 축제 분위기여야 맞지 않아.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조용한 건데.

부정을 부정한다.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그 말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종소리가 라트의 귀에 내리꽂혔다. 이 소리는 평범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따라 이리도 불길하단 말인가.

‘알고 있어.’

어째서 종소리가 이렇게 불길하게 들리는지, 사실은 알고 있다. 그저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부정하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자 눈앞이 다시금 새까맣게 변했다.

또다시 쓰러지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럴 수 없지. 문을 열고 길드 밖으로 나온 라트는 빗속을 거닌다. 온 몸이 젖어감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본능이 알려주었다.

길거리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집집마다 추모의 깃발이 걸려있는 모습에 부정하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점점 커져가는 종소리가 머리에 울려 심장을 옭아매 조인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신전으로 향한다. 신전에 도착해 문을 연 순간, 수많은 귀족들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 누군가를 추모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쪽을 향해 걸어간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귀족들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앞으로 향한다.

“무슨 짓, 아.”

물에 흠뻑 젖은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내자 한 귀족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변한다. 귀족이 자신의 앞에 있는 귀족의 어깨를 쳐서 라트를 가리키자 그 귀족 역시 라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파들이 한 마음으로 라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나, 고마움을 전할 수도 없어. 라트는 그저 앞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 케이네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옷을 입고 울고 있는 케이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심장이 아파왔다.

케이네의 옆에는 오케만 국왕이 침통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도 침통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주무시고 계실 뿐이잖아.’

부정했던 것을 부정하려고 했던 자신을 다시 한 번 부정한다. 주무시고 계실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을 도피하려고 용을 쓴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참담한 현실일 뿐. 도망치고 싶다고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다.

오케만 국왕의 시선 끝에는 제스맹 기느투스가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자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편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꽃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관에 눕혀있었다.

“안 돼…….”

그 말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말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알고 있다,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리.

루아타 공작이 천막으로 들어와 슬픈 얼굴로 스승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한 것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단지 부정하고 싶었다.

이 낯선 세계에서 아버지 같이, 할아버지 같이, 자신을 돌보고 챙겨주고 가르쳐주고 정을 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누워있으니까, 부정조차 할 수 없잖아. 이렇게 있으니까 부정하려고 해도 납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응어리졌던 감정이 단숨에 풀어져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왜, 왜!’

이리 가실 것이라면 자신을 불렀어야 했다. 어찌 나를 불효자로 만드시는가. 어째서 쓰레기로 만드시는가. 임종의 순간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시신만을 안고 있어야만 한다니. 이 얼마나 불효막심한가.

그 날, 라트는 이 세계로 와서 두 번째로 울었고 그 슬픔에 하늘에 알려졌는지, 하늘조차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오케만 국왕이 제스맹 기느투스의 위대함을 연설하며 그의 죽음을 기린다. 루아타 공작이 제스맹 기느투스의 사람됨을 연설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케이네 폰 글란츠가 스승님이 얼마나 위대한 연금술사인지를 말하며 구슬프게 울었다.

그 모습을 무릎을 꿇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라트의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저기로 가자.”

그 온기가 장례식 도중에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라트를 이끌었다. 가고 싶지 않아, 이대로 끝까지 봐야한다. 나는 그래야만 해.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몸은 힘없이 그곳으로 이끌린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실례겠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라트의 얼굴을 닦아준 여성은 슬픈 표정으로 젖어있는 그를 껴안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고마워.”

그 온기에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라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기에 엘리를 떨어트린다.

“쓰러져있었으니까 그냥 쉬고 있어. 응?”

“안 돼.”

그것은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허락한다고 해도, 라트 본인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나 일찍 스승이 죽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한다. 그것이 라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휘적휘적, 힘없이 걸음을 옮겨 제스맹의 앞으로 간다. 홀리의 대사제가 제스맹에게 홀리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하며 죽은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실례하겠습니다.”

신성한 의식 도중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라트가 끼어든 것이 무례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다문다. 심지어 홀리의 대사제조차.

“말씀하세요.”

그의 등장을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고 있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위로 올라간 라트는 케이네의 옆으로 가 스승의 마지막을 목도한다. 홀리의 축복이 끝나자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눈물을 흘린다.

홀리의 축복이 끝나자, 라트는 서서히 스승의 시체에게 다가간다.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라트를 쓰다듬어줄 것 같은 그의 거친 손을 매만진다.

그의 상반신을 일으켜 껴안자,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가셨는가. 본인의 꿈이 이뤄지는 걸 보지도 못하고 어찌도 이리 빨리 가셨는가.

그의 상반신에 온기는 없다. 심장의 박동도 들리지 않아. 숨결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제야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한 라트는 목을 놓고 오열했다.

이 날 위대한 대연금술사는 삶의 끝을 맞이했다.

라크리모사, 그 날은 눈물의 날이었다.

***

제스맹은 왕족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에 몸을 눕히게 되었다. 이것은 오케만 국왕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고, 그 누구도 이 일에 반박하지 않았다. 현자의 돌을 만든 대연금술사이자, 루아타 공작의 절친한 친우이고, 이 전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영웅을 눕힌다는데 그 일에 반박할 용기를 가진 자가 누가 있을까.

스승이 눕히는 곳을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지 않고 손수 판다. 그곳에 관이 안치되자, 다시금 손수 스승을 묻었다. 내 손으로 스승을 묻으며, 마음속에도 제스맹을 묻는다.

시신을 안치했지만, 장례식은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을 찾았고, 라트는 울고 있는 케이네와 함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위로를 받았다.

“이거라도 먹어.”

엘리가 죽을 건넸지만, 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장례식이 시작된 지 이틀째, 라트가 쓰러지고 나서는 4일이 지났다. 그동안 라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배고프지 않아, 거대한 슬픔이 지나가고 나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목석처럼.

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엘리가 소리를 쳤지만, 라트는 힘없이 웃을 뿐이다.

“먹어야 돼, 라트.”

울고 있던 케이네 역시 이 소란에 눈물을 그치고 라트에게 다가왔다.

“슬프지? 많이 슬프지? 누나도 그래.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아. 그렇지만 라트가 이러다 또 쓰러지면, 그러면.”

그 때는 이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다. 지금도 라트 덕분에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 케이네다. 그 마저 쓰러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뒷말을 삼킨 케이네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도, 할아버지도 슬퍼하실 거야. 그러니까.”

“제발 한 입이라도 먹어. 그러다 라트가 또 쓰러지면, 나.”

“알았어.”

두 여성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는지, 목석처럼 행동하던 라트가 엘리가 건넨 죽을 받아서 먹었다.

‘짜.’

짜다는 생각 말고는 들지 않았다. 그 이유가 눈물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죽을 들이킨다. 4일 만에 음식을 섭취한 라트는 물로 목을 축이자.

“흐윽.”

케이네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무엇이 그리도 슬픈지, 구슬프게 운다. 그 모습에 라트는 입술을 씹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라트 누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울면서 그리 말하는 케이네의 등을 토닥인다. 생각해보니 장례식 내내 인사를 하는데 지쳐, 케이네를 위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멍청한 새끼.’

입술을 씹는다. 자신이 슬픈만큼 아니, 자신보다도 더 큰 슬픔을 느끼고 있을 케이네다. 케이네는 제스맹에게서 가족의 정을 받았다. 라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할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런 이가 사라졌으니, 케이네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렇기에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등을 토닥이는 것 뿐이다.

“내가 지켜줄게.”

지킨다, 그 말에 거짓은 없다. 자신 때문에 스승이 예정보다 일찍 죽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스승이 남긴 유일한 것을 지킨다. 이것은 자신과의 약속. 스승이 남긴 유일한 제자를 지킨다는 맹세.

“내가 반드시, 누나를 지킬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그 맹세와 함께 케이네를 위로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장례식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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