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44화 (14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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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성벽을 뚫어버리자 가장 먼저 이쪽으로 온 사람은 브로켄 후작이었다.

    “잘 했네, 미르차르드.”

    후에 루아타 공작의 설명을 들었더라면 화를 낼만도 한데, 브로켄 후작은 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사들을 처리한다.

    ‘알고 있었나보네.’

    브로켄 후작의 성격을 생각하면 후에 이 일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화를 내야 맞다.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작전도 브로켄 후작하고 이야기를 하던 도중 생각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브로켄 후작은 미르차르드와 절친한 사이다. 그러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위험한 짓을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닌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뒤이어 등장한 세르먼트 후작의 반응에 라트는 어설프게 웃었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니콜라벨리,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적어도 나한테는 언질을 줬어야지. 늙은이 심장을 떨어트릴 생각이었나? 응?”

    세르먼트 후작의 말에 미르차르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뭐, 배에 칼빵을 맞는 거야 라트의 생각이었지만, 그 이외의 생각은 전부 미르차르드가 생각한 거니까.

    “수고했다.”

    “예.”

    뒤이어 루아타 공작이 등장하자, 라트와 미르차르드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느라 라트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루아타 공작의 눈에 슬픔이 깃들어있었다.

    “전군, 이곳을 빠르게 처리하고, 성으로 가서 루만 국왕을 쫓는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음?”

    루아타 공작의 입에 의문이 튀어나온다. 슬렌베를 쉽게 점령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슬렌베보다 국왕인 루만을 처리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길어진다는 건 루아타 공작 역시 알고 있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루만과 호르토 공작을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뭐? 그것이 정말인가?”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르차르드를 바라본다.

    “믿으실 수 없겠만, 사실입니다.”

    미르차르드는 라트가 말해주었던, 성문을 열기 전에 루만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루아타 공작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그것이 라트의 생각이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고 말이다.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 과정까지 세심히 말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그래서 상대 쪽 병사들이 이렇게 어수선했군.”

    상황을 파악한 루아타 공작은 전군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다만, 루만을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됐으니 여유를 가지고  항복하는 자들은 최대한 살려주면서 천천히 진격하라고 명한다.

    “그런데 공작님.”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그동안 쌓아올린 전공이 모두 합산되어 보상으로 들어온다. 그러니 앞으로 나서는 귀족들과 함께 전투에 합류할 만도 했지만, 라트는 조심스레 루아타 공작을 불렀다.

    “엘리와 사저는 어디 있습니까?”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다.”

    ‘망했다.’

    당장이라도 케이네와 엘리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이번 전투가 승리로 끝나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싸우고 있는데 홀로 후방으로 갈 수도 없다.

    “나는 자네가 남긴 편지로 이번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맞추기로 하지.”

    “자, 잠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말을 타고 전방으로 향하는 루아타 공작의 뒷모습을 보던 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있는 미르차르드가 미워지기는 했지만, 작전을 실행하겠다고 말한 건 라트였으니, 이를 어쩌겠는가.

    ‘나중에 무릎 꿇고 빌어야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라트는 대검을 뽑아들었다.

    “가시죠. 미르차르드님.”

    “앞장서겠습니다.”

    아직까지 저항을 하고 있는 켈랑의 병사들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었던 미르차르드가 적으로 돌변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의가 꺾이겠지.’

    전의가 꺾인다면 남은 길을 항복뿐이다. 기사나 마법사라면 몰라도 병사들은 국가를 지키는 것보다 당장 제 살길이 바쁘니까. 그러니 이런 곳에서 놀고 있을 수 없었다.

    3시간이 지난 후, 전투는 생각대로,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끝났다.

    ‘랜덤 NPC도 없었으니, 더 쉬웠어.’

    지휘관이 없는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다가 미르차르드가 적으로 등장하자 곧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저항하던 기사와 마법사들도 끝까지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귀족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왕과 공작이 죽어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혼란의 하모니를 자아낸 덕분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켈랑의 두 번째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슬렌베를 이렇게 쉽게 빼앗을 수 있으리라고는.

    [켈랑 왕국에 더 이상 왕위 계승권자가 없습니다. 켈랑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부터 전쟁의 전공을 합산하여 랭크를 매깁니다]

    [합산 전공 : A+]

    [중간에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전공을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전공 보상으로 다량의 골드와 Exp 그리고 스탯 포인트 120을 획득하셨습니다]

    셀룬의 병사들이 포로들을 이끄는 모습만이 보이는 전경 아래 라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탯 포인트라니.’

    스탯 포인트는 메인 퀘스트 초반에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당연한 일이지. 1차 메인 퀘스트 초반에는 전쟁에 참전하려고 하면 일개 병사, 혹은 일개 귀족으로 밖에 참가하지 못한다.

    일개 귀족이라면 운이 좋아서 스탯을 한 10개 정도는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민으로 시작해서 일개 병사로 전쟁에 참가했다면?

    스탯 포인트는커녕, 골드만 받아도 운이 좋은 경우다. 물론 전쟁에서 적군을 무찌르면 경험치는 상당히 많이 받을 수 있으니 몹을 잡는 것보다 좋은 선택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점을 고려하면 스탯 포인트 120개라는 보상은 현재로써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라트와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면 말이다.

    ‘솔직히 경험치나 골드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레벨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현재 라트의 레벨은 124. 1차 메인 퀘스트 후반에나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이대로 메인 퀘스트를 쭉 따라간다고 해도, 레벨이 부족한 경우는 없을 거다.

    골드도 마찬가지로 크게 의미가 없다. 게임이라면 대화에 선택지라는 게 있기 때문에 다른 Npc에게 돈을 빌릴 수 없지만, 현실은 또 다르다.

    ‘루아타 공작님이나 스승님께 부탁만해도 돈은 충분히 빌릴 수 있지.’

    어쩌면 미르차르드가 셀룬에 투항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셀룬에서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르차르드가 후작이던 시절에 쌓아올린 재산은 자연스럽게 라트에게 넘어올 것이다.

    미르차르드의 성격상 재산을 크게 불리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대대로 후작이었던 집안이니 그 재산은 어마어마할 터.

    그러니까 현재 라트가 신경써야하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희귀 기능 레벨.’

    무색의 연금술이 10레벨에 도달할 때 추가된 기능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다른 기능들은 어떻게 변할까?

    ‘다른 건 몰라도 생명의 연금술은 기대된단 말이야.’

    커스텀 스킬도 희귀 기능으로 취급되니 분명 레벨 10에 기능이 추가될 게 틀림없다. 기능이 추가되지 않는다고 해도 강해지기는 하겠지.

    ‘골렘 두 채를 잃어버린 건 아쉽긴 하지만.’

    그건 다시 만들면 되겠지. 케이네에게 골렘을 돌려주지 못해서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케이네도 이해해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것이 실수임을 모르고.

    “고생 많았네, 후작 대리.”

    브로켄 후작이 슬며시 라트의 옆으로 다가와 생각의 꼬리를 끊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작님.‘

    전투가 끝나고, 남은 건 이제 뒤처리뿐이다. 브로켄 후작같은 무골은 그런 뒤처리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로운 것이다.

    라트는 후작 대리이기 때문에 뒤처리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다른 귀족들은 다르지만 말이야.

    저 멀리서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는 귀족들을 바라본다. 미르차르드는 포로가 된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쪽으로 가있었다. 저곳에 비해 이곳은 한적하다.

    “자네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미르차르드와 일을 꾸밀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네만.”

    ‘예상은 하고 있었던 건가.’

    “설마 그런 계책을 낼 줄이야. 나조차도 잠깐 놀라서, 진심으로 살기를 뿜었다네.”

    그 때까지는 진심이었구나.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미르차르드의 살기와 비견되는, 브로켄 후작의 맹수의 난폭한 살기를 상기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적을 속이는 책략을 고육책이라고 하던가?”

    “그렇습니다.”

    이 세계에도 고육책이라는 단어는 있는 모양이다. 하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훌륭한 작전이었네. 자네의 사저와 연인이 기절할 만큼 훌륭히 속였어. 나를 뺀 다른 귀족들은 공작님이 작전을 설명해주기 전까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네.”

    그렇겠지. 루아타 공작이 라트를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휴전 협정을 위해 라트를 포로로 썼다면,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 펼쳐졌을 거다.

    “루만과 호르토 공작의 시체는 확인했네. 깔끔하게 죽였더군. 아깝게도 말이야.”

    ‘뭐가 안타깝다는 거지?’

    브로켄 후작의 성격 상 자신이 루만을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할 위인은 아니다. 그에게는 야심이 없다. 왕국의 공작은 오로지 한 명 뿐. 그렇기에 후작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그런 짓을 벌인 놈들은 조금 더 고통을 줘서 죽여도 됐는데. 아쉽게 됐어.”

    아, 그런 말이었나. 이 말에는 동의한다. 라트가 생각하기에도 루만을 너무 쉽게 죽여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가.”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고통스럽게 죽였을 것이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할 수 있도록.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모든 일이 잘 풀렸지만, 그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자네는 연금술사로는 어울리지 않아. 나 같은 무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그렇습니까?”

    트롤 캐릭터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분명 브로켄 후작이나 미르차르드 같은 검사 캐릭을 만들었겠지. 검사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오러 유저로 플레이했을 것이다.

    마법사보다는 오러 유저가 플레이하기 편하니까. 오로지 그것이 이유였다. 지금도 그래, 연금술사이면서도 하이 엘프를 찾아서 오러 유저가 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자네에게는 바이올런님의 자취가 느껴진다.”

    이건 아마도 라트가 바이올런의 영향력을 짙게 받고 있기에 하는 말일 거다. 바이올런의 영향력이 짙으면 무사로써 대성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탯 재능 때문에 완전한 대성은 하지 못해.

    “너무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검사로써 대성할 수 없다면 역시나 답은 하나다. 마검사와 같은 듀얼 클래스. 무색의 연금술과 생명의 연금술을 다루며 오러까지 사용하는 자. 괜찮지 않은가.

    “과분하기는. 자네는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

    거기까지 말한 브로켄 후작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품 속을 뒤적였다.

    “이런 내 담배를 두고 왔군.”

    “태우시겠습니까?”

    브로켄 후작의 말에 라트는 인벤토리를 열어 자신의 담뱃대를 건넸다.

    “고맙네, 고마워. 몇 모금만 피우겠네.”

    흐뭇하게 웃으며 라트가 건넨 성냥과 담뱃대를 받아든 브로켄 후작은 곧바로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머금는다.

    “이보게 젊은이. 늙은이가 한 마디 해도 되겠나?”

    몇 번이나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짙은 연기를 내뱉던 브로켄 후작은 씁쓸히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리도 씁쓸하게 말하는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날 일에 잠식되지 말게나. 미래는 언제나 과거가 되는 법이야.”

    “예?”

    라트는 브로켄 후작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어날 일이라니? 전쟁은 끝났다. 당장은 일어날 일이 없을 건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냥 알아만 두게. 깊이 생각하지는 말고.”

    그리 말하며 마지막으로 담배를 빨아들인 브로켄 후작은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담뱃대를 라트에게 주고는.

    “그럼 늙은이는 먼저 가보도록 하지.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후작이니 가봐야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훌쩍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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