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41화 (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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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 말씀 또한 옳습니다만…….”

“셀틱 국왕과 시그나 공주가 잡혀있는 이상, 켈랑에는 더 이상 왕위 계승자가 없습니다. 여기서 루만을 죽이면 켈랑은 끝입니다.”

“슬렌베를 점령하면 켈랑은 저절로 끝이 납니다.”

“끝은 나겠지만, 최후까지 저항하겠죠.”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큰 전투는 없겠지만, 켈랑은 최후까지 저항할 거다. 그런 켈랑을 잠재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어쩌면 부끄러움을 각오하고 핀스크에 도움을 청할지도 모릅니다.”

켈랑의 좌측에 있는 핀스크와 켈랑은 셀룬과 차리친 왕국처럼 동맹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예부터 우호적인 관계였다.

루만이 살아남는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핀스크로 도망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핀스크 왕국에게 켈랑의 영토를 가질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된다.

‘그건 막아야 해.’

현재 핀스크 왕국 내부에는 흑마법사들이 잠식해있다. 그러니 아직은 핀스크 왕국에 전쟁명분을 만들어주면 곤란하다.

글란츠 백작에게도 이 사실을 언질 해두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린느탐보프와 전쟁 중이라 핀스크 왕국을 견제하지는 못하고 있을 터.

“저에게 말릴 권한도 없거니와 제가 말린다고 해서 들으시지는 않으시겠죠.”

라트의 말을 경청하던 미르차르드는 한숨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잠입할 방법은 있으신 겁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오십시오.”

미르차르드가 앞서 어디론가 향하자 라트는 군말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이 병사도 함께 내 방으로 갈 것이니, 그리 알도록.”

“예!”

당연하게도 미르차르드의 신분 덕분에 별다른 말없이 간단하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아.”

운 좋게 미르차르드 후작을 봐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2층으로 올라가려고 성을 탈 생각까지 했던 라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더라도 루만이 어디 있는지 몰라 또 길을 헤맸을 거다.

“우선 제 방으로 가시죠.”

어째서? 미르차르드의 말에 의문이 먼저 떠올랐으나, 그가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라트는 군말하지 않고 미르차르드의 뒤를 따랐다.

3층까지 올라가 미르차르드의 방에 도착한 순간.

“이걸 입으십시오.”

미르차르드는 눈까지 가릴 수 있는 푸른색 로브와 시종복을 꺼내들었다.

“오, 괜찮네요.”

그제야 미르차르드가 루만에게 가기 전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 까닭을 깨달은 라트는 손을 치며 그의 지혜에 감탄했다.

병사복을 입은 채 루만에게 가기에는 상당히 눈에 띌 것이다. 혹시나 도중에 호르토 공작이라도 만난다면 큰일이지.

투구 덕분에 머리는 가릴 수 있다지만, 라트의 눈동자 역시 흔한 색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시종복을 입고, 로브로 눈을 가린다면 미르차르드 후작을 따라다니는데 별 다른 문제는 없을 거다.

“갑옷을 입은 채 다니면 병사들과 아직 잠들지 않은 귀족들의 시선이 라트님께 쏠리겠지만, 이거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주세요, 갈아입겠습니다.”

갑옷을 벗고 미르차르드의 손에 들린 시종복과 흑색 로브를 입은 라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루만과 독대하는 건 가능하십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루만 쪽은 미르차르드를 믿고 있다. 그러니 미르차르드가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하면 독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당장 가죠.”

“예.”

미르차르드가 독대를 한다고 하면, 루만이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이 열리겠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경화수월을 이용하면 문이 열리는 찰나의 틈을 이용해서 루만의 방에 숨어들 수 있을 것이다. 방심하고 있는 그의 심장에 칼날을 박아 넣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직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있으니까.’

이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직감이 알려올 것이다. 런트에서도, 토리나 산성에서도 직감은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를 해줬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감이 경고하지 않기에 라트는 안심하고 미르차르드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혹시나 루만이 미르차르드님을 방에 들이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 묻거든, 토리나 산성을 언급하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루만이 변덕 때문에 미르차르드와 독대를 하고 싶지 않아 해도, 토리나 산성을 언급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흡혈귀와 손을 잡은 게 들통 나면 루만은 끝이다.

그렇지 않아도 런트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신전에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흡혈귀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까지 나온다?

‘신전은 멍청하지 않아.’

그것을 좌시할 정도로 교황은 멍청하지 않다. 필시 이런 소문이 나는 까닭을 알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것이다.

런트에서 벌어진 일에는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루만은 토리나 산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해.

혹시나 증거가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초조해지겠지. 분명 미르차르드 후작과 독대를 할 것이다.

“미르차르드 후작님!”

밖으로 나와 조금 걷던 중, 한 귀족이 반갑다는 듯 미르차르드를 불렀다.

“아, 파이 자작 아닌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이쪽도 저쪽을 본 상황이기에 미르차르드는 인사에 회답한다.

“이 밤중에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전하와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말이네.”

“그렇군요. 그런데 뒤에 저 아이는?”

“시종일세.”

거 더럽게 신경 쓰는 거 많네. 미르차르드가 바쁜 티를 팍팍 내고 있음에도 어서 가보라고 말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든 미르차르드와 친해지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보인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미르차르드가 가장 혐오하는 자였다.

“조금 전까지 포로였던 분께서 시종이 있으십니까?”

그런 주제에 눈치와 머리는 제법이다.

“마침 내 영지 출신의 병사가 있어서 임시로 시종으로 쓰기로 했다네.”

“아, 그러시군요. 하긴 시종이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하지요.”

미르차르드가 날카로운 질문을 부드럽게 넘기자, 라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님, 휴전 협정을 하려고 하신다면서요?”

“어디서 들었나?”

“호르토 공작님께 들었습니다.”

벌써 귀족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난 건가.

‘하긴.’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겁에 질린 귀족들이 셀룬으로 투항할 지도 모르니, 안심시켜주는 게 옳긴 했다.

“그래 지금의 켈랑으로는 셀룬을 이기기 버거우니까.”

“그렇군요. 그럼…….”

지금까지 했던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고, 이제야 본론을 꺼내려는 것인지 파이 자작은 말을 끌며 후작의 눈치를 보았다.

“말해보게.”

“그게, 그러니까. 셀룬에 빼앗긴 제 영지가 다시 제게 돌아올 수 있게 힘을 써주실 수 없습니까?”

“뭐라고?”

“제 영지가 얼마나 조그마한지는 후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휴전 협정을 한다면 그런 땅 정도는 재량껏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미친 새끼.’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라트는 마음속으로 눈앞의 귀족을 욕했다. 이 자는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 귀족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영지를 돌려받기를 원한다고?

그리고 뭐? 재량껏? 잘도 재량껏이겠다. 그 조그마한 땅을 얻기 위해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그런데 휴전을 한다고해서 얼씨구나 땅을 돌려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미르차르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런 말을 하려고 나를 불러세운건가.”

“그, 예, 맞습니다. 후작님이라면 분명 제 사정을 아시리라 믿고……. 사례는 반드시 하겠습니다.”

“자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군. 성 그대로 뇌가 아니라 파이가 들어있는 거 아닌가?”

“예? 지금 뭐라고.”

어처구니가 없겠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물론 자작 쪽이 아니라 미르차르드 쪽이 말이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그 물음에 귀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왕국이, 자네의 조상께서 충성을 다하던 켈랑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라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휴전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자기 영지를 돌려받기를 원한다?”

미르차르드는 이런 이가 귀족에 있다는 사실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 전시다, 위급한 상황이다.

자신의 한 몸을 받쳐 국가를 지켜도 모자를 판에 자신의 안녕만을 챙기려고 하는 눈앞의 돼지를 보아라. 어찌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 셀룬에도 저런 귀족은 있겠지.’

슬렌베를 목전 앞에 둔 셀룬의 군단에 속한 귀족들은 루아타 공작과 브로켄 후작이 엄선한 귀족들이다.

그들 역시 결점은 있을 거다. 권력을 향한 야망이 있을 수도 있고, 재물을 얻고 싶어 하는 탐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점을 평소에 쉽사리 드러내지 않으며, 셀룬에 충성하는 이들만을 모았다.

그렇기에 비교된다. 그렇기에 인지한다. 켈랑에 진정으로 충성하는 귀족들은 이미 모두, 파르스로 떠났다는 것을.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자네의 목이 어찌될지 장담치 못하겠군.”

서리가 낄 정도로 차가운 미르차르드의 목소리에 파이 자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안타깝네요.”

파이 자작이 충분히 멀어지자, 라트는 눈을 찌푸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켈랑에 미련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죠. 저런 귀족이 남아있다는 게 한탄스럽습니다.”

켈랑에 미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평생을 받친 왕국이 무너져 내리는데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국왕의 자리는 루만의 것이 아니다. 미르차르드의 마음속에 있는 국왕은 오로지 셀틱 국왕뿐이었다.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지른 루만을 어찌 국왕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렇기에 켈랑이 무너지는 것에는 미련이 남아있지만, 루만의 죽음에는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4층을 넘어 7층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켈랑의 왕성만큼은 아니지만, 일국의 공작이 머무는 성답게 그 크기는 상당했다.

“이 층에 루만이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잠시만요.”

푸른색 로브를 벗은 라트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병사에게서 갑옷을 빼앗기 전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둠에 숨어들기에 최적의 복장이다.

“계속 가세요. 저는 천장에서 몰래 뒤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트는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여기까지는 시종 복장이 유용했지만, 이대로 루만의 방 앞까지 가면 경화수월을 써서 몰래 침입할 수 없어.

라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르차르드는 그를 믿고 루만이 있는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충! 미르차르드 후작님을 뵙습니다.”

“국왕 전하는 안에 계시는가?”

“예. 지금 호르토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전하게. 한시가 바쁜 일이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와 미르차르드의 대화를 들으며 라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루만이 머물고 있는 방 앞의 감시는 삼엄하다.

‘어림잡아 50명.’

병사들 뿐 아니라, 기사 그리고 마법사까지 합쳐 무려 쉰에 달하는 숫자가 그의 방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일대는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현재 라트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천장에 매달려 있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만 더 다가가면 모습이 들킬 정도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바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미르차르드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만에게 미르차르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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