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36화 (13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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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그래도 본처는 나야.”

    또다시 눈을 부릅뜨고 이야기하는 엘리의 작태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까부터 바람을 피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는데.’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그리 생각하자 조금, 가슴이 아렸다. 머릿속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20년 넘게 주입받아온 지구의 상식이 단지 3년 만에 깨질 리가 없다. 그렇기에 바람을 피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왜 이리 아픈가.

    ‘알고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가슴이 어째서 이렇게 아린지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케이네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케이네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 미안.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래?”

    딴 생각을 하다 보니 엘리의 말을 듣지 못한 라트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혹시 아직도 그 흡혈귀 때문에 피곤한 거야?”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에 화를 낼만도 하건만, 엘리가 화를 내기는커녕,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여러 사정 때문에 그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신전이나 국왕께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엘리 역시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라트를 엄청 챙겼었지.

    “완전 멀쩡해.”

    엘리에게 걱정을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진짜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피곤해서 멍 때리고 있던 게 아니기도 했고.

    라트가 괜찮다고 말하자, 엘리는 조금은 안심하는 그러나 염려스러움을 거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라트를 껴안았다.

    “바보. 계속 무리만하고.”

    “무리하는 거 아니거든. 널 지키는 게 왜 무리하는 거야.”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말해주면 너무 기뻐서 행복해져버리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주변의 사람은 지킨다. 이것이 라트의 신념. 그렇기에 무리하는 게 아니었다.

    시리아한테 진짜로 죽을 뻔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시리아에게 패배한 것이 분하지 않느냐면 거짓말이겠지만, 엘리의 안전 했기에 분노도 사르르 녹았다.

    ‘따뜻하다.’

    소녀에서 아가씨로 성장한 공녀님은 정말로 따뜻했다. 무심코 볼에 입을 맞출 정도로.

    “헤헤헤.”

    그 행동에 엘리가 배시시 웃으며 라트의 향기를 맡으며 꼬물거린다.

    “있잖아 라트.”

    서로의 애정공세에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중, 엘리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턱으로 라트의 가슴을 짓누르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이런 자세로는 아무리 진지한 표정을 지어봐야 귀여울 뿐이라, 라트는 엘리와 눈을 마주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나는 라트를 믿어.”

    뜬구름 잡는 말이지만, 라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혹시나, 라트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생겼더라도 내 자리가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나한테는 너뿐이라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행복해서 기절할 거 같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 때는 반드시 말해줄 것. 알았지? 약속해.”

    “그래, 그래.”

    여기서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엘리가 화를 낼 게 분명했기에 라트는 순순히 손가락을 내밀었다.

    서로 다른 두 손이 뒤엉켜 맹세를 만드는 것을 끝으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은 채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엘리와 라트가 떨어진 건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올 때쯤이었다.

    엘리가 라트의 입술에 키스를 남기고 밖으로 나가자 라트는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누웠다.

    “하아.”

    이어지는 기나긴 한숨은 허탈함 때문이 아닌, 만족감 때문이었다. 전쟁 때문에 엘리와 항상 옆에 있다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느긋하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적었다.

    “라트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잠시 아직 엘리의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을 매만지던 라트는 미르차르드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라트의 막사로 들어온 미르차르드는 라트의 앞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있어 오셨습니까?”

    “네.”

    미르차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트는 자세를 고르게 고쳐 앉았다. 아무래도 그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매사 진지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한층 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아타 공작님보다 라트님께 먼저 이야기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먼저 이쪽으로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미르차르드의 다음 말이 궁금해진 라트가 고개를 꺼덕이며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오늘 밤, 저와 둘이서 슬렌베에 침투하는 게 어떻습니까.”

    미르차르듣 곧바로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고.

    “네?”

    라트는 눈을 크게 뜨며 미르차르드의 말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지 않은가.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우선.”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말씀해주세요.”

    미르차르드의 말대로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미르차르드의 의견을 말도 안 되는 의견이라고 묵살할 생각도 없었다.

    이곳에서 현재 켈랑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건 미르차르드다.

    라트 역시 그 누구보다 이 세계의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전반적인 사정일 뿐이다.

    변수를 고려하면 켈랑의 내부 사정은 미르차르드가 라트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겠지.

    “그럼 계속 말하겠습니다. 브로켄 후작과 이야기를 하면서 들은 것인데, 현재 셀룬은 켈랑을 집어삼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만 국왕의 생각은 모르겠으나, 제스맹을 위해 연금술의 위대함을 알리고 싶어 하는 루아타 공작이나, 승리의 영광을 취하고 싶어 하는 브로켄 후작은 여기서 전쟁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세가 가장 강한 두 명의 귀족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오케만 국왕도 전쟁을 멈추지는 않겠지.

    셀룬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가장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건 오케만 국왕이니까.

    “그럼 이번 전투에서 날 수 있는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것도 옳겠군요.”

    그거야, 당연히 그렇다. 지금까지 군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라트는 온갖 힘을 다해왔다.

    그 노력 덕분에 전쟁 초기에는 같은 수의 병사가 있었던 두 군단이 현재는 꽤나 많은 병력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 먼저 성으로 침투해서 내일 전투가 일어날 때 성문을 열고 해자의 다리를 내리는 겁니다.”

    이어지는 미르차르드의 말에 라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좋다면 좋은 작전이다. 이루크 성을 점령할 때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택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루크 성의 성벽이 마법 때문에 대포로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슬렌베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할 이유가 있을까.

    “어딘가 석연치 않으신 점이라도?”

    “슬렌베가 튼튼한 성이라고는 하지만, 대포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성벽이라는 거대한 방패는 대포라는 창 앞에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거대한 성벽이 무서운 이유는 마법사가 대포를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셀룬처럼 뛰어난 대포와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건 셰크티 제국뿐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이 세계는 지구의 중세 시대보다 더 훌륭한 광물과 제조 기술 그리고 건축술을 가지고 있으니까. 평범한 대포와 폭탄으로는 이 세계의 성벽을 꿰뚫을 수 없다.

    그러나 셀룬은 다르다. 수많은 대포를 가지고 있으니, 제아무리 마법사가 많다고 해도 충분히 굳건한 성벽을 부술 수 있을 거다.

    그런데도 굳이 성 안으로 침투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슬렌베에 침투할 수 있을지도 반신반의하네요.”

    “그 말씀 모두 옳으십니다.”

    이루크 성 때와 달리 슬렌베는 현재 내부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미리 첩자를 심어뒀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 몰래 침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미르차르드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이유가 있을 터.

    “제 말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이제 미르차르드님의 의견을 저에게 납득시켜주시길 바랍니다.”

    “분부대로.”

    미르차르드는 고개를 숙이고, 라트의 명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위해 입을 열었다.

    “슬렌베는 훌륭한 성입니다. 런트보다는 아니지만, 제 2의 수도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루아타 공작의 영지가 셀룬에서 2번째 가는 도시인만큼, 호르토 공작이 관리하고 있는 슬렌베 역시 그만한 위상이 있는 건 당연했다.

    “전쟁을 계속하실 생각이라면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슬렌베처럼 훌륭한 성을 최대한 온전히 남겨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예? 아, 그렇군요.”

    미르차르드의 말에 라트는 망치로 머리를 맡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오로지 성을, 나라를 점령할 생각 뿐이었기에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슬렌베, 확실히 훌륭한 성이다. 혹시나 다른 국가와 전쟁이 일어났을 시 훌륭한 요충지 혹은 생산지로 이용할 수 있겠지.

    대포로 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대포로 성을 파괴한다면 요충지로도, 생산지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셀룬의 대포라면 슬렌베의 성벽은 간단히 부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셀룬 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나중을 위해서 슬렌베의 성벽을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슬렌베로 침투해 성문을 여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요?”

    “제 예상이지만, 제가 셀룬에 투항한 사실을 아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로, 미르차르드는 런트에서 자신의 포박이 풀려있는 모습을 본 이는 브라일을 제외하면 오로지 국왕과 국왕파 귀족뿐이었다는 점.

    그리고 슬렌베로 오기 전 첫 번째로 목도한 성을 빠르게 점령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쿠논 성을 순식간에 점령한 덕분에 제가 이쪽에 있다는 사실이 슬렌베로 보고되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 이후 토리나 산성까지는.”

    아무도 없었지. 시리아의 얼굴을 떠올린 라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두 성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루만 쪽은 미르차르드가 셀룬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포로로 사로잡혀 있거나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라트님을 사로잡고 도망쳤다고 하면 그쪽에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이 방법이라면 슬렌베로 침투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미르차르드의 설명에 라트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괜찮은 작전이다. 훌륭한 작전이라고 박수를 쳐줄 수도 있다.

    슬렌베로 침투할 수만 있다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고 슬렌베의 성벽도 온전히 가져갈 수 있으니까.

    게다가 갑자기 성문이 열려서 병사들이 당황한 사이에 수뇌층이 도망가기 전에 죽일 수 있다면 이 전쟁은 끝나겠지.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호르토 공작과 루만이 과연 그걸 믿겠습니까?”

    호르토 공작도 그렇지만, 루만의 지능은 장난이 아니다.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과연 미르차르드의 작전에 속아 넘어갈까.

    “이 일을 루아타 공작님께 알리지 않고 실행한다면 그쪽도 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라트가 인질로 잡힌다면 이쪽에서 소란이 일어 날거고, 이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게 슬렌베에도 전해질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미르차르드가 제시한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엘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 점만 제외하면 미르차르드의 작전은 좋았다. 이번 전투에서 전력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다면 다음 전쟁에서 셀룬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늘어나니까.

    ‘내 목숨이야 건사할 자신은 있는데.’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염동력의 레벨이 2가 되었다. 아마도 시리아와의 싸움에서 염동력의 경험치가 상당히 오른 모양이다.

    염동력 레벨 2부터는 짧은 거리지만, 순간 이동을 사용할 수 있으니 어떻게 되든 도망은 칠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죽음에게 죽음을 칭호 덕분에 20초라지만, 경화수월을 사용할 수 있기도 하고.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거다. 단순히 라트를 인질로 잡고 도망친다고 해서, 루만이나 호르토 공작이 미르차르드를 믿어줄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니 그 둘이 미르차르드를 믿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상황은 다르지만, 고육지책이랑 비슷하네. 어, 잠깐만. 고육지책?’

    그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봤을, 읽지 않았다면 후에 읽을 삼국지의 한 장면이 떠오른 라트는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절 믿어주시는 겁니까?”

    믿다마다. 바이올런의 종속인 미르차르드가 충성을 맹세한 라트에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작전을 제시할 리는 없으니까.

    대신, 그 작전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겠지만.

    “당장 제 배를 찌르세요.”

    “예?”

    미르차르드는 이어지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반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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