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35화 (13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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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미안.”

    “아니, 엘리가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한순간 폭풍이 지나간 것과 같은 충격을 맞이한 라트는 넋을 잃은 상태에서도 엘리의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여자 3명이 모이면 접시를 깬다고 하더니.’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맞는 말이었다. 수많은 질문 공세부터 엘리의 과거를 알려주기까지 . 다양한 질문이 오간만큼 이야기 시간도 길었다.

    아마 룬타 백작이 불려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대화라는 감옥에 갇혀있었을 거다.

    “내 잘못 맞아. 내가 라트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언니들이 라트를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

    그런 거였냐. 어째 갑자기 찾아와서 말을 붙이는 게 이상하다고 했는데. 뭐, 그러면 어때. 이미 상황이 끝난 지 오랜데.

    게다가 이런 일로 엘리에게 화를 낼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룬타 백작을 필두로 한 귀족들 역시 전쟁의 긴장감을 풀기 위해 장난삼아서 라트와 대화했을 뿐, 그렇게 곤혼스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단지 대화가 너무 빨리빨리 이뤄져서 정신이 없을 뿐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들 한가락 하시는 분들이잖아. 소개를 받았으니 나한테도 이득이지.”

    엘리 같이 하나 뿐인 혈육이 아니고서야, 여자의 몸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함은 그만큼 뛰어난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라트는 평민의 몸. 그런 이들과 면식을 가졌다는 건 상당히 좋은 일이다.

    “그건 그렇지만. 피곤하지 않아.”

    “그다지.”

    시리아와 만난 직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짜증이 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시리아와 만나고 며칠이 지났다. 지금까지 잘 쉬었으니, 이런 꼴을 당한다고 짜증이 날 리도 없다.

    “언니는 피곤하지도 않나봐.”

    라트가 질문 공세를 당하기 전부터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케이네는 지금도 지친 기색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누나야, 뭐. 원래 귀족이었으니까.”

    케이네는 루브그흐 폰 글란츠 백작의 여식이었다. 당연히 오러 마스터와 줄을 놓기 위해서 남자 귀족들이 수없이 많이 구애했을 거다.

    그리고 아마도, 어린 나이 때부터 사교계에서 활동했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 상대를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뭐, 놀랍지 않은 것과 마음이 욱신거리는 건 다른 문제였지만.

    “케이네 언니가 저 중 한 명이랑 사귀게 되도 괜찮아?”

    “놈팽이 새끼면 패버릴 거야. 아, 내가 안 나서도 스승님이 먼저 나서실 걸.”

    말을 꺼내놓고 라트는 자신이 멍청한 대답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는 그저 괜찮은가 물어봤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다니.

    괜찮은가? 그 물음에 라트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아, 그것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엘리가 옆에 있어. 그녀가 옆에 있으면 괜찮았다. 적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멍청하게도 말이지.

    “흐응.”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케이네를 바라보고 있는 라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엘리는 묘한 콧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당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도 알지 못했으니까.

    “있잖아, 라트. 이 운명의 실이라는 거 말인데.”

    그래서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케이네에게 머물러있는 그의 시선을 빼앗아오고 싶었으니까.

    “응, 왜?”

    “나랑 라트 사이에 생겼다는 건, 라트랑 다른 사람 사이에도 생길 수 있다는 뜻 아니야?”

    ‘아, 엘리한테는 설명을 안 해줬었구나.’

    엘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진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라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설명하기엔 듣는 사람이 너무 많아.’

    라트와 엘리가 운명의 실로 엮여있다는 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밀이었다.

    라트에게 있어 운명의 실은 진 엔딩으로 가는 힌트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리아의 저주였으니까.

    신의 저주를 받은 채 살아가는 인간이라니. 시선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내 막사로 가자.”

    “응!”

    묘하게 기뻐 보이는 엘리의 반응이 신경 쓰였지만, 그저 최근에 단 둘이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 부족했으니 그런 거라고 넘겨짚고는 엘리와 함께 막사로 들어갔다.

    “엘리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랑 나 사이에 운명의 실이 생길 수 있어.”

    당장은 엘리 말고는 없지만. 메인 퀘스트 초반부에 운명의 실을 연결하려고 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아이를 생각해낸 라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운명의 실을 3개 더 만들어야 돼.”

    운명의 실을 만든다는 표현이 웃기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어째서?”

    이번에는 함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건 자신도 대답할 수 없다.

    그냥 이대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엘리와 행복하게 살아도 된다. 지구에서는 감히 꿈도 꾸질 못할 미녀와 함께할 수 있다.

    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행복한 인생이지 않은가.

    ‘부모님은.’

    지구에 계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부모님의 얼굴이 차츰 잊혀져간다.

    ‘이기적이지만, 어쩌면 엄마랑 아빠도 내가 여기서 사는 걸 바라실 수도 있고.’

    자식이 행복하다는데 말릴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 이기적인 생각이다. 자식이 행복함을 바라는 마음처럼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부모니까.

    그런데도 지구로 돌아갈 마음이 딱히 들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남은 게 부모님뿐인 지구와 달리, 이곳에는 남은 게 많기 때문이다.

    “응?”

    엘리가 대답을 재촉하자 정신을 차린 라트는 할 말을 생각했다. 그래 딱히 집으로 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힘을 들여 진엔딩을 보려고 하는가.

    고민할 것도 없어, 답은 나와 있다.

    궁금하니까. 수 천 시간 동안 월드 세리아를 플레이해오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엔딩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됐다.

    보고 싶어, 궁금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지 않는다면 그건 게이머가 아니었다.

    ‘이걸 엘리한테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평소같으면 Viva 모리아를 외치며 모리아의 핑계를 댔겠지만, 운명의 실은 모리아의 저주다. 모리아의 저주를 받았으니 이번 일은 모리아의 핑계를 댈 수가 없다.

    ‘근데 내가 모리아의 저주를 받았어도, 모리아의 계시를 받아서 떠났다고 말했잖아.’

    머리 아픈 이야기다. 이놈의 여신 이름을 너무 많이 팔아먹었다. 그럼 차라리, 이름을 팔아먹은 김에 계속 팔아먹는 게 낫겠지.

    “내가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건 알고 있지?”

    “그래 그랬지. 사실 좀 반신반의 중이야.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사람한테 왜 모리아가 저주를 내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리아님께서는 운명이 바뀌길 원하셔.”

    “에?”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모리아가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운명을 바꾸려고 하다니.

    엘리는 라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나도 몰라. 운명이 바뀌기를 원하시는 거지. 모리아의 의지를 거역하고 너를 구했는데, 모리아님께선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시더라고.”

    거짓은 순식간에 부풀어져간다. 그래 완전 거짓말이지. 모리아는 플레이어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여신이니까.

    평범히 메인 퀘스트를 진행했을 때 나타나는 엔딩 중 하나가 바로, 모리아를 죽이는 엔딩이다.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플레이어는 동료들과 함께 운명의 신을 죽이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이지.

    ‘문제는 모리아를 죽여도, 다시금 모리아가 부활한다는 거지만.’

    그 엔딩의 끝 부분에 인간은 절대로 신을 죽일 수 없다면서 문구가 흘러나오며 모리아의 부활을 암시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모리아는 운명이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운명을 바꾸려고 모리아에 대적하는 엔딩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운명을 뒤바꾼 라트를 내버려두었다. 운명의 실이라는, 저주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저주를 걸어둘 뿐.

    게다가 그 저주가 진 엔딩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실이 생긴 이유도 모리아님의 뜻이란 말이야?”

    “응.”

    “그럼 누구랑 이 실이 이어지는데?”

    “그건 나도 몰라.”

    엘리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건 정말 모를 일이었다. 아니 한 명은 알고 있지. 라트는 파르스에 있을 리오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정해진 운명은 바꿀 자신이 있었다.

    “이 실이 이어지는 게 여자면, 라트는 합법적으로 바람을 필 수 있는 거잖아.”

    “음? 그건 무슨 뜻이야.”

    바람이라니, 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는데.

    “그렇잖아! 라트가 죽으면 운명의 실이 이어져있는 사람도 죽으니까, 만약 다른 여자랑 연결되면 같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 그거야 그렇지.”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지간하면 운명의 실이 이어진 사람과는 붙어있는 게 옳다.

    운명의 실이 이어진 다른 사람이 죽으면 라트는 물론이오, 엘리까지 죽으니까.

    “그리고 운명의 실이 이어졌다는 건 라트는 필연적으로 그 여자를 도와줬다는 소리고!”

    “그거야 그러겠지.”

    “이거 완전, 합법적으로 첩을 둘 수 있다는 뜻이잖아!”

    붕붕 날뛰는 엘리의 모습에 라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생각해보니까, 리오스와 운명의 실이 연결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리오스를 바이올런의 성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리오스가 신전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 소녀에게 갈 곳은 없다.

    엘프 부족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운명의 실이 연결된 리오스를 쉽게 보내줄 수 있을 리도 없지.

    “잘 들어, 본처는 나야!”

    “네?”

    “혹시나 잘난 분이 라트랑 운명의 실이 이어진다고 해도, 본처는 나라고. 알았어?”

    “그거야 당연하잖아. 아니 그보다, 나는 처를 둘 생각이 전혀 없는데. 왜 그렇게 앞서 나가.”

    귀족이라면 첩실을 두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엘리였기에 그 발상은 옳았다. 그러나 일부일처가 법적으로 명시되어있는 라트는 첩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왜 대답이 없었는데.”

    그거야 단지 갈 곳을 잃은 가여운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침 잘됐네.’

    어차피 파르스로 돌아가면 엘리도 자연스럽게 리오스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니 여기서 설명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보였다.

    “사실 운명의 실이 이어질 아이가 한 명 있어.”

    “벌써 있어? 누구? 빨리 말해!”

    엘리가 라트의 말을 끊으며 눈을 번쩍이자, 라트는 쓰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름은 자이리오스.”

    “자이리오스? 엘프어?”

    이어지는 말에 엘리의 흥분이 가셨다. 귀족이기 전에 마법사인 엘리 역시 엘프어를 알고 있기에 자이리오스가 엘프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떻게 만났냐면.”

    파르스에서 떠난 이후 만났던 노예상 무리를 이야기해주자, 엘리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해간다.

    “어떻게 그런 짓을.”

    “전쟁이 그래. 이성을 가진 인간만큼 착한 동물은 많지만, 악의를 가진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도 없어. 그렇지?”

    “응.”

    라트의 말에 런트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린 엘리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리오스와 만났는데.”

    라트가 생판 모르는 소녀를 손녀처럼 여기며 목숨을 걸고 지킨 할아버지와 눈앞에서 의지하던 할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랑 운명의 실이 연결되는 거야?”

    “아마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적어도 3년은 걸릴 걸.”

    1차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마족 침공 퀘스트가 시작되면 바이올런의 성녀인 리오스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싸우게 된다. 그것을 막는다면 운명의 실을 만들 수 있을 거다.

    “불공평해.”

    “뭐가.”

    “그런 불쌍한 아이를 도와준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

    자기 말고 다른 누군가와 운명의 실이 연결된다고 함은 왠지 자신이 특별하지 않아지는 것 같아서 슬펐다.

    그러나 어려운 소녀를 도와준다는 걸 말릴 수가 없었기에 엘리는 라트에게 불공평하다고 불평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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