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33화 (13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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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라트가 지친 걸음을 이끌고 토리나 산성으로 돌아가자, 그의 예상대로 이미 상황은 모두 끝나있었다.

    좀비의 수는 많았지만, 대부분의 좀비가 평범한 인간보다 못한 움직임을 보여줬고, 귀족들의 지휘와 활약 덕분에 병사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진짜 나를 만나려고 온 건가.’

    구울이라는 건, 흡혈귀가 마력을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강함이 결정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 있던 구울들은 전부 하급 구울들이었다.

    이쪽을 전멸시킬 생각이었다면 최소한 모든 구울이 상급 구울이어야 했고, 시리아의 세뇌 권능도 발휘되어야 했다.

    이로써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시리아는 정말로 그녀가 정말로 라트를 만나려고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거다.

    흑사제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꾸민 거지. 어떻게 보면 그녀답지 않으면서 또 어떻게 보면 그녀다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가 평소에는 미쳐있지만, 가끔씩 제정신을 차린다는 거다.

    라트와의 전투 중에는 광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으나, 대화 도중에는 그렇게까지 미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한 공작과 미르차르드의 말에 따르면 페르시를 죽이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았으나 그가 어떤 힘을 이용해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작과 미르차르드의 말에 따르면 페르시 쪽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거야 뭐, 페르시는 단순히 시리아의 변덕에 휘말린 피해자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얼굴이 엉망이 됐잖아.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포션 바르면 돼.”

    폭발의 여파 때문에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됐기에 엘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라트를 바라보자, 라트는 피식 웃으면서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얼굴에 발랐다.

    “생각보다 상황이 수월하게 정리됐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귀족들의 대화에 라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나가는 꿈과 같이 상황에 너무나도 쉽게 정리됐지만, 널브러져 있는 구울의 사체를 보고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시체를 정리하죠.”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전염병이 생길 수도 있고, 아침쯤에 까마귀가 시체를 파먹을지도 모른다.

    ‘진짜 미친년.’

    단순히 라트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흑사제 쪽이 그걸 모르게 하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울로 만들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들이 구울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몇 명은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겠지.

    시리아를 옹호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들은 적이었고 구울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죽였어야 할 적국의 병사들도 있었다.

    “전군 늦기는 했지만, 후작 대리를 도와 시체를 처리한다.”

    이대로 사체를 내버려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공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사용해 삽시간에 구울 사체를 성 밖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에 라트는 혀를 내둘렀다. 나머지 시체는 병사들이 이동시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문으로 나온 라트는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만연하라.”

    무색의 연금술을 이용해 땅을 파자, 병사들이 공작이 옮겨온 시체를 집어넣는다. 그 일이 끝나자 다시금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해 땅을 덮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추후 신전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이 오갔지만, 당장은 슬렌베가 코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일어났던 소란이 지나가는 꿈처럼 사라졌다.

    다음날, 전군이 슬렌베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슬렌베 코앞에 있는 평원. 그곳에서 공성 준비를 하고 브로켄 후작의 군단을 기다리는 게 목적이었다.

    시리아와의 대화 때문에 생각이 다른 쪽으로 빠졌던 라트는 조금 있으면 루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시리아와의 일을 마음 한 구석으로 미뤘다.

    ‘생각해보면 모든 원흉은 루만이잖아.’

    케스나 그림자 까마귀가 일을 일으킨 건 많지만, 그들은 루만의 작전을 따른 것뿐이다. 결국 엘리도, 케이네도 루만의 머리 때문에 죽을 뻔했지.

    그 사실을 상기하자, 투지가 솟구쳤다.

    삼일 정도 지나 미르차르드의 말마따나 빠른 속도로 평야에 도착한 군단은 막사를 치고 후작의 군세를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브로켄 후작의 군단이 이곳에 도착했다.

    “얼마나 일찍 오셨길래 저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까?”

    “루아타 공작님을 뵙습니다!”

    허허, 웃으며 루아타 공작의 막사로 들어온 브로켄 후작과 그의 군단에 속한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놀람을 아끼지 않았다.

    브로켄 후작, 미르차르드, 그리고 케이네의 아버지인 루브그흐 폰 글란츠 백작과 마찬가지로 한 왕국의 유일한 오러 마스터.

    ‘이쪽도 괴물이기는 하지.’

    루아타 공작이 셀룬의 오른쪽 지팡이라고 불린다면 브로켄 후작은 셀룬의 왼쪽 검이라고 불리는 남자다.

    브로켄 후작은 방어를 중시하는 검술을 사용하는 미르차르드와는 정반대로 공격을 중시하는 검술을 사용했다.

    “훌륭한 안내자가 있기에 가능했지.”

    “미르차르드!”

    루아타 공작이 곁눈질로 미르차르드를 가리키자 브로켄 후작은 오랜 친우를 만났다는 듯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소식은 들었지만, 정말로 그 미르차르드 후작이 여기 있을 줄이야.”

    “이젠 후작이 아니네.”

    “클클클.”

    돌아오는 대답에 브로켄 후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이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는 낌새를 보인다.

    “자네로군!”

    그리고 이내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브로켄 후작은 밝게 웃으며 라트에게 다가왔다.

    “기느투스 후작님의 대리가 자네지? 반갑네. 나는 프콘 델 브로켄 후작이라네.”

    “라트입니다.”

    그가 찾던 건 라트였던 모양이다. 라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지 말게.”

    “예?”

    분명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인데, 브로켄 후작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라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지금 후작 대리네. 대리이기는 하지만, 후작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야.”

    그리 말하며 긍지를 가져지라는 듯 라트의 어깨를 토닥인 브로켄 후작은 강제로 라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러니 지금은 같은 후작인 나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 없지 않은가.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또 모를까.”

    “후작이 아닌, 어린놈이 어르신을 상대로 고개를 숙인 것뿐입니다.”

    “아, 그래? 그럼 뭐 상관없지.”

    후작과 후작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세르먼트 후작이 한 번씩 말해줬던 거니까.

    그러나 세르먼트 후작도 그렇고, 브로켄 후작 역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젊어 보일 뿐. 나이를 지긋이 먹은 사람이다.

    ‘아무리 봐도 예순이 넘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기느투스 후작님께 감사를 드렸지만, 자네에게 또 감사를 하고 싶군. 후작님이 지원해주신 장비는 최상급 중 최상급 장비였어. 크으, 우리와 무기를 맞댄 켈랑 놈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후작님께 보여드리고 싶었건만.”

    브로켄 후작은 귀족이기 이전에 검사로서 장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장비의 중요함을 알기에 브로켄 후작은 세르먼트 후작과 함께 제스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라트에게 또다시 감사를 표하는 중이다.

    “스승님이 하신 일입니다. 제가 감사를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딱딱한 소리를 하는구먼. 자네도 도와드렸을 거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스승님이 만든 순수한 철에 비교하면 라트가 만든 순수한 철은 조족지혈에 불가했다.

    “그걸 모르고, 그냥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보들도 있지만.”

    그리 말하며 브로켄 후작이 몇몇 귀족을 노려보자, 그들은 몸을 살짝 떨며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꼴을 보아하니 브로켄 후작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다.

    “아아, 공작님, 잠시 후작 대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슬렌베 공략 회의부터 할까요?”

    왠지 예순이 넘은 늙은이의 얼굴에서 보기 힘든,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이 브로켄 후작의 얼굴에서 나타났다.

    “그쪽 귀족들도 피곤할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회의를 하도록 하지. 라트는 데려가도 좋네. 아, 미르차르드님도 데려가시게나.”

    무슨 연유로 브로켄 후작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는 루아타 공작은 쓰게 웃으며 라트와 미르차르드를 데려가도 좋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브로켄 후작의 손에 의해 막사에서 이끌려 나온 라트는 그가 무슨 연유로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미르차르드도 브로켄 후작도,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대부분 무(武)에 미친 자들이다.

    그러니 연금술사인 라트가 오러 마스터인 미르차르드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게 분명했다.

    “한 잔 들게.”

    막사에 들어온 후작은 술잔에 투명한 액체를 따라 미르차르드와 라트에게 넘겨주고 자신 역시 액체를 따른 술잔을 집어들었다.

    ‘전시에 술을 마신다고?’

    라트는 티가 나지 않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브로켄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쪽 군단은 그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런트를 점령했을 때도 혹시나 그곳에 남아있는 귀족들이 무슨 짓을 벌일까 술을 마시지 않았었는데.

    “크으, 좋구나.”

    술잔에 담긴 액체를 한 입에 마신 브로켄 후작은 또다시 술잔을 가득 채우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런 젊은이한테 졌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자네의 목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나도 그리 생각했네.”

    서로가 면식이 있는지, 브로켄 후작의 말에 미르차르드는 쓰게 웃으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자네도 한잔하게.”

    브로켄 후작이 미르차르드의 술잔을 채우며 라트에게 어서 마시라고 손짓하자 라트는 마지못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뭐야 물이잖아.’

    당연히 술이라고 생각했던 액체는 물이었다.

    ‘이게 그거지?’

    술을 마시지 못하니, 분위기만 술을 마시는 것처럼 해서 대리 만족을 하는 그런 거지?

    ‘어이가 없네.’

    노인네치고 발상은 어린 아이와 같았다.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술잔을 내려놓자 브로켄 후작이 라트의 술잔을 채웠다.

    “어때 물맛 괜찮지 않나? 오늘 아침에 이리로 오면서 떠온 물이라네.”

    “아주 좋습니다.”

    “라트님을 놀리지 말게나, 브로켄.”

    “라트님? 자네 정말로 바이올런님께 맹세한 모양이군.”

    “기사의 명예를 걸었네.”

    허허, 쓰게 웃으며 브로켄 후작이 술잔을 들이켰다.

    “이제 자네와 결판을 낼 수가 없게 되었구먼.”

    씁쓸한 표정으로 검을 매만지는 브로켄 후작의 모습은 오래된 라이벌을 뜻하지 않게 잃고 허탈해하는 자의 모습과 일치했다.

    ‘진짜 라이벌이었지.’

    방어적인 검술을 펼치는 미르차르도와 공격적인 검술을 펼치는 브로켄 후작은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한 라이벌이었다.

    오러 마스터가 되기 이전부터 서로 교류를 나눴던 남자는 서로가 시간을 할애해 비밀리에 검을 나누기도 했다.

    셀룬과 켈랑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브로켄 후작과 미르차르드의 오래된 관계도 끝이 났지만.

    “그런데 자네 이런 젊은이에게 어떻게 지게 됐나.”

    “라트님은 특이한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으시다네.”

    “그건 공작님께 들어서 알고 있다네. 그렇지만, 나무나 바위를 움직이는 것 정도로는 자네를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브로켄 후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무색의 연금술만으로는 미르차르드를 이길 수 없다.

    “제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쪽은 미르차르드의 힘을 알고 있고, 미르차르드는 라트의 힘을 몰랐다.

    염동력을 배운 지금도 다시 싸우라고 하면, 미르차르드를 다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

    “운도 실력이다.”

    라트의 말을 겸양으로 취급한 브로켄 후작은 어서 말해보라는 듯, 미르차르드를 바라본다.

    “지금도 사실 라트님께 진 것에 어안이 벙벙하기는 하네.”

    미르차르드 역시, 다시 싸운다면 라트에게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안 이상, 미르차르드는 라트에게 여지를 두지 않고 처음부터 라트를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일 테니까.

    “그렇지만 후회는 없네. 검사로서 평생동안 한 번은 봐야할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게 뭔가.”

    “소드 엠프레스 6번.”

    “뭐?”

    “나는 공평함의 검을 보았다네.”

    미르차르드 후작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자, 브로켄 후작이 고개를 돌려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시무시한 표정에 잠식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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