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32화 (13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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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보이시아라는 아티팩트의 존재가 이 세계에 알려졌다면 연금술사가 이런 푸대접을 받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보이시아는 전부 소실되었다. 소실된 것을 라트가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 년 왜 이래?’

    라트의 당당한 부정에 시리아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미친년답지 않은 행동에 라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리아 맞아?’

    눈앞의 흡혈귀가 자신이 아는 시리아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아니 시리아인건 확실하다. 대지의 척추는 시리아에게 귀속된 신화 등급 무기다.

    시리아를 죽이지 않는 이상, 대지의 척추는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다. 아니 시리아를 죽인다고 해도 대지의 척추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면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든 신은 관대하기 그지없는데 비해 무기는 까다롭기 그지없다니까.’

    대지의 척추를 평가하던 라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명실상부 월드 세리아의 NPC 중 최고의 광년이라고 불리는 시리아가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다.

    아니 그거보다, 이 년은 어떻게 무색의 연금술을 보조해주는 아티팩트의 이름이 보이시아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오래 살아서 그런가?’

    그거야 그럴 수 있겠거니 싶지만, 흑사제 집단에 속한 시리아가 왜 무색의 연금술에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보이시아 없이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어, 음, 으으음. 너무 놀라서 흥분이 완전히 가셨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라트를 관찰하던 시리아는 자신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무색의 연금술은 어디서 배웠는데.”

    “니들이 쫓는 사람이 남겨둔 책으로.”

    “헤에. 회색 놈이 남긴 걸 찾은 게 역시 너였구나?”

    돌아온 대답에 시리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회색의 연금술사를 언급하는 시리아에게 친근함이 느껴졌다.

    뭐지? 저번에 들었던 이야기대로라면 흑사제는 회색의 연금술사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 너였단 말이지. 마지막으로. 너 인간 맞지?”

    “순수 100% 인간이시다만.”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라트는 어이가 없어서 시리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드래곤이었으면 널 노예로 만들어버렸겠지.’

    시리아가 드래곤에 맞먹는 강대한 존재인건 확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정 상황에서다. 그 특정 상황은 바로, 시리아가 자신의 둥지에 있을 때였다.

    흡혈귀라는 것들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는 몇 배로 강해진다. 1세대 흡혈귀들이 둥지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흐음. 믿겨지질 않는데. 피 한 방울만 먹어보면 안 될까?”

    ‘아니, 왜 믿겨지지가 않는데.’

    피를 먹어보고 싶다는 시리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반박하려는 찰나, 라트는 이게 마냥 어이가 없는 질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보다 훨씬 실력이 좋았던 고대의 연금술사들도 아티팩트 없이는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시리아가 라트를 인간이 아니라고 의심해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기회다.’

    라트에게 있어 시리아 쪽에서 원하는 게 있다는 건 기회였다. 협상을 할 수 있는 소재이지 않은가.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면 줄게.”

    “아하!”

    라트의 말에 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그래 거래, 피는 소중하니까 거래를 해야지. 니 말이 맞아, 당연한 거지. 깔깔.”

    그러더니 별안간,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거래 조건은 이 대화가 끝난 후 니 목숨으로 하자.”

    ‘씨발.’

    입에서 절로 욕설이 내뱉어지려는 걸 간신히 씹어 삼킨 라트는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미친년 주제에 머리를 진짜로 잘 돌아간다.

    하긴 이런 모습을 봤으니 앞으로 시리아가 마냥 미친년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말하면 짜증나지? 그치? 꺄하하항!”

    “놀리는 거였냐.”

    “어머 화났어? 화내지 마. 다시 흥분해버리려고 하잖아. 내가 또 흥분하면 감당할 자신 있어?”

    라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시리아를 노려본다.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시리아의 말마따나 그녀가 다시 흥분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염동력을 쓸 수 없는 지금, 시리아의 놀이 상대를 해주는 건 버겁다.

    ‘그래 놀이였지.’

    다시 한 번, 몸을 안개로 바꿨던 시리아의 모습을 기억해낸 라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아는 지금까지 라트와 논 것뿐이다. 궁금한 건, 어째서 게임을 할 때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건가.

    “한숨까지 쉴 정도로 화난 거야? 우웅, 좋아. 니가 무색의 연금술을 쓸 수 있는 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래.”

    알고 있었던 건가.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간을 보고 있었다니. 눈앞의 흡혈귀가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친해지기 싫은 상대인 건 분명했다.

    “어서 줘.”

    시리아의 독촉에 라트는 생명의 연금술로 조그마한 단검을 만들어 손가락을 살짝 베어 시리아에게 내밀었다.

    “핥아 먹, 야!”

    “츄읍, 츄…르릅. 하웁……. 하앙.”

    혀로 핥아먹으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시리아는 라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손가락을 입에 놓고 빨기 시작했다.

    시리아의 혀 놀림은 라트가 조금만 긴장을 풀면 얼굴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외설스러웠다.

    “좀!”

    붉디붉은 입술에서 손가락을 때내자 시리아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진짜 오리지널 인간이네. 인간 특유의 짙고 단 피 맛이 나. 다 빨아먹고 싶을 정도야.”

    탐욕이 깃든 얼굴로 라트를 바라보던 시리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식욕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많이 먹었으니까, 자중해야지. 난 돼지가 아니니까. 응응. 잘 먹었어.”

    라트가 진정 인간임을 깨달은 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 용건이 끝났으면 나도 뭣좀 물어보자.”

    “하앙? 뭐, 좋아. 물어봐, 물어봐.”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함에도 일단 물어보라고 해주는 게 참으로 고맙다. 물론 반어법이었다.

    “너 루만 태자랑 손을 잡았지.”

    “아니. 그냥 놀아줬을 뿐인데. 너처럼.”

    “그래 그렇다고 치고.”

    ‘니가 진심으로 대하는 놈이 어디 있겠냐.’

    이제 와서 생각하건데 메인 퀘스트 도중에 중간 보스로 등장하는 시리아는 사실 진심전력이 아니지 아니었을까 싶다.

    중간 보스 시리아라면 현재 라트 정도의 스팩을 가진 캐릭터로  부상을 입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시리아는? 부상은커녕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야.”

    “널 좀 보고 싶었어.”

    “날?”

    왜? 어째서? 아니 보고 싶었다면 그냥 불쑥 찾아오면 된다. 이런 거창한 짓을 하면서까지 나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뭐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말했잖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니까. 자, 봐. 내 심장 멈춰 있지?”

    또다시 손톱으로 자신의 가슴을 베어내, 심장을 보여주는 시리아의 작태에 라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녀의 말대로 흡혈귀의 심장은 조금도 뛰지 않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내 심장을 뛰게 해줄 상대를 만나러 왔어.”

    “단지 그것뿐?”

    웃긴 소리다. 미르차르드나 루아타 공작도 충분히 시리아의 심장을 뛰게 해줄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

    미르차르드야 대지의 척추 때문에 상성 상 무리라고 쳐도, 루아타 공작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도 시리아는 굳이 라트를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동굴에서와 다르게 무색의 연금술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다.

    두 가지 상황을 종합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아마도 시리아는 흑사제 놈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짜로 그것뿐이야?”

    라트의 집요한 질문에 짜증을 낼만도 하건만, 시리아는 진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너도 좀 똑똑한가 보구나? 그렇지? 너 무슨 짐작을 하고 나한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거지? 그치?”

    “그래 맞아. 알려줄 거야, 안 알려줄 거야.”

    “지금은 안 알려줄래. 이 대화의 주도권은 나한테 있으니까, 대답을 안 해줘도 상관없잖아. 그렇지?”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건가. 정말이지, 미친 주제에 똑똑해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저렇게 말하면 뭐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읏챠.”

    땅바닥에 버려두었던 대지의 척추를 회수한 시리아가 다시금 라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내 이름은 소개했는데, 니 이름을 못 들었네.”

    “라트.”

    “성은 없어?”

    어깨를 으쓱여 시리아의 질문에 긍정한다. 현재 평민인 라트에게 성이 있을 리가 없다. 뭐, 평민 신분도 조금 있으면 벗어날 수 있겠지만.

    “라트라. 그래 뭐, 성은 없을 수도 있지. 잘 지내길 바라, 라트. 머지않아서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말이야. 그럼, 안녕.”

    인사를 끝낸 흡혈귀는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소리 없이 소멸했다. 마치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사라지는 괴담과도 같이.

    “하아.”

    시리아가 사라지자, 라트는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고 담배를 태웠다.

    “젠장, 다리가 풀렸어.”

    뒤늦게 죽음의 공포와 시리아의 힘을 실감한 덕분인지 다리가 풀려버렸다.

    ‘아, 대지의 척추 좀 만지게 해주라고 할 걸.’

    생명의 연금술로 만들 수 있는 신화 등급 아이템을 추가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야.

    ‘아, 하긴. 대지의 척추는 못 사용하려나.’

    생각해보니, 대지의 척추는 생명의 연금술로 만들어봐야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템이었다. 생명의 연금술은 가짜가 아닌 일시적인 진짜를 만드는 연금술이다.

    그렇기에 아마, 생명의 연금술로 대지의 척추를 만들어봐야 시리아를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지의 척추의 특수 효과는 사용할 수 없을 거다.

    고작 만들어봐야, 잘 드는 낫 정도. 겨우 그 정도라면 굳이 아쉬워 할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도대체 뭐지.”

    그저 미친년인줄 알았던 시리아가 사실은 정상적인 대화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은 라트는 생각에 빠졌다.

    ‘어디서 꼬인 거지? 아니, 진짜 시리아가 맞는 지도 확신이 안 서네.’

    대지의 척추를 가지고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 라트의 앞에 있던 건 분명 시리아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캐릭터성의 변화 때문인지, 그녀가 진짜 시리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부질없는 고민이지.’

    다시 생각해보면 여긴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성격은 입체적이다.

    당장 엘리만 봐도, 특권 의식을 가진 공녀지만 라트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는 귀여운 아가씨로 변한다.

    게임 안에서는 평면과도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입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게 마땅했다.

    ‘그 년이 너무 입체적이라 혼란스러운 거지.’

    처음으로 시리아가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리도 혼란스러운 것뿐이지, 현실이라는 이게 맞다.

    ‘정상도 아니었지만.’

    사실 시리아의 행동이 정상은 아니었다. 많이 쳐줘도 평소보다 조금 덜 광년이었다, 정도. 그 정도로도 충분히 놀랍긴 했지만.

    “돌아가자.”

    시리아가 물러났으니, 좀비들도 힘을 잃을 거다. 아마 지금쯤이면 페르시도 죽었거나, 도망쳤겠지. 후자의 가능성이 높지만.

    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리나 산성으로 향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여인이 구슬피 입을 열었다.

    “부디 강해져. 내 앞에서 서서, 미친 광기를 끝내주기를.”

    찬란한 보름달이 뜬 밤에 울려 퍼진, 누군가를 위한 진혼곡. 그 노래는 누구를 위한 울림이었을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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