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28화 (1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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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이리해도, 저리해도 흡혈귀가 이쪽을 노린다면 큰 일이 벌어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슬렌베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선택지가 없어, 그렇기에 귀족들은 결국 슬렌베로 계속 행군하기로 결정했다.

    소란이 일어나고 하루가 지났다.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아, 반대로 고요하기만 한 숲길을 맞이한다.

    이틀 째 역시 어제와 같다. 바람결이 새의 지저귐과 향긋한 풀냄새를 가져다준다. 너무 고요해서 지금 이 상황이 마치 폭풍의 핵에 둘러싸인 기분이다.

    삼일 째, 이제 토리나 산성까지 남은 거리는 약 5일 정도 남았다. 아직까지도 귀족들은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지만, 조금씩 그것이 옅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오일 째 되는 날 아침, 잠깐의 소란이 일었다. 토리나 산성에서 보낸 척후병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를 고문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토리나 산성은 현재 셀룬의 군단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 이뤄지고 있었고 그 외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소멸괴담은 한 번 뿐이었나 보오.”

    소멸괴담. 이전 성에서 일어난 일을 칭하는 단어였다. 정말이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흡혈귀가 토리나 산성으로 가지도 않았고 군단 쪽을 공격할 낌새도 보이지 않자, 소멸괴담이 그 성에서만 일어난 괴변이라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아졌다.

    ‘소멸괴담이라.’

    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 년이 자주 부르는 노래의 제목도 소멸괴담이었지?’

    망태 도깨비와 관련된 일화가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그 노래는 시리아의 또라이 같은 성격과 합쳐져 커뮤니티 내에서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자아냈다.

    설정 상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 온기리드 제국에서 유행하던 일이 동요로 와전된 거라고 했던가.

    “결국 그 아이들이 도깨비에게 죽었는지, 아니면 장애인이 돼서 살아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괴기스런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 이런 동요는 한두 개 있겠지.

    별 거 아닌 노래다. 그러나 부르는 이가 별 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이 노래도 별 거 아닌 게 아니게 되어버렸다.

    ‘시리아가 아니었나.’

    시리아와 마주했던 당시의 일이 워낙 강렬했기에 라트는 저도 모르게 노르스 대륙에 온 흡혈귀가 시리아라고 단정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뭐, 다른 흡혈귀가 왔을 수도 있지.’

    게임에서도 변수가 하도 많아서 유저들의 원성까지 튀어나왔던 게임이다. 그리고 지금은 현실, 변수가 더 심해도 이상하지 않다.

    혹시나 흑사제 집단에 있는 다른 흡혈귀가 카르세이나 대륙으로 넘어가지 않고, 장난삼아 인간들을 세뇌해서 데려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불안하다.’

    단순히 불안한 것뿐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은 기능 중 하나인 날카로운 직감 때문에 생긴 불안이다.

    날카로운 직감은 희귀 기능 중 하나인 미래 예지의 하위 기능이자, 그냥 직감 기능보다는 상위에 있는 기능으로 플레이어에게 다가올 위험을 추상적으로 알리는 기능이다.

    이 직감이 발동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있으면 위험이 다가온다는 소리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위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토리나 산성에서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직감이 위험하다고 알려오는 걸 수도 있다.

    “라트 같이 먹자.”

    고민이 점심 식사 시간까지 이어지자, 엘리가 라트의 곁으로 와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공녀님에게 쫑알거린다는 표현은 심히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적어도 라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라트의 정보에 따르면 엘리는 적어도 4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케이네도 마찬가지. 마법사는 아니지만, 연금술도 마나를 다룬다. 케이네의 수준을 마법사와 비교해보자면 적어도 5서클, 최대 6서클은 될 것이다.

    그러니 두 명 모두 세뇌에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프아!”

    엘리가 입술을 잡아당기는 예상치 못한 기습을 펼치자 라트는 눈을 찡그리며 고통을 내뱉었다.

    “이렇게 예쁜 연인께서 몸소 같이 식사를 해주고 있는데 어딜 딴 생각을 하고 있어.”

    아무래도 라트가 계속 딴 생각을 하느라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아 삐진 모양이다.

    그래도 계속 라트의 입을 잡아당길 생각은 없었는지, 엘리는 라트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의 입술을 놔주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뭘 걱정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그렇지만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그 날은 엘리와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날 역시 평화로워, 그럴수록 라트의 불안함은 배가 되어간다.

    그리고 척후병을 잡은 지 3일째, 소멸괴담을 목도한지 8일이 지난날. 군세는 드디어 슬렌베로 가는 길목의 최종 방어벽이라 할 수 있는 토리나 산성 앞에 도달했다.

    “고요하군.”

    공작의 말대로 토리나 산성은 정말이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 고요의 이유는 지금 시간이 늦은 밤이라서 그런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렇게 늦은 시간이라면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성벽에 횃불이 올라와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 성벽을 보라. 성벽 위에 횃불 하나 올라오지 않고, 적막히 어둠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어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성벽 쪽에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 대군이 왔으면 그만한 반응을 보여야 정상인데.

    “공작님, 토리나 산성 안에서 마나가 느껴집니다.”

    불길함을 느꼈는지, 공작의 가신 중 한 명이 급히 마나 스캔을 돌린 후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마나가 느껴진다고?’

    그렇다는 건 산성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 저, 저기 보십시오!”

    표정이 굳어져있던 귀족들이 마나 스캔 결과에 안심하고 있을 무렵,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성벽 위에 불이 들어왔고.

    “백기입니다!”

    어둠이 걷히자 바람결에 펄럭이는 순백의 백기가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항복?”

    말도 안 된다. 붙잡았던 척후병이 그랬다. 토리나 산성은 군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항복할 준비가 아닌,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항복이라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군, 돌입한다.”

    그러나 함정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그렇기에 공작은 비장한 표정과 함께 선봉에 서서, 군단을 이끌었다.

    성 앞에 도달하자, 차가운 금속 소리와 함께 성문이 스르륵 열린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 뿐. 사람의 형상조차 보이지 않아, 몸이 절로 으스스해진다.

    “분명 마력 스캔을 할 때는 반응이 있었는데,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거지?”

    조금 전 마력 스캔으로 토리나 산성을 살펴봤던 공작의 가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를 했나 노심초사한 모습도 얼굴에 보인다.

    “잠시 대기한다.”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 공작은 잠시 기다리라는 명령과 함께 눈을 감았다. 직접 마력 스캔을 하기 위함이다.

    “그대의 말이 옳다. 보이지 않을 뿐. 확실히 저 안에서 마력이 느껴지는군. 그것도 다수의 마력이.”

    무엇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리도 불안한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남은 선택지는 오직 하나 뿐이니까.

    공작이 제일 먼저 성문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귀족들과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워, 워!”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말들이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란을 일으킨다. 그 모습에 몇몇 병사들이 겁을 먹고 동요한다.

    “셀룬의 군단이 가진 긍지가 겨우 그것뿐인가!”

    단 한 마디, 마법으로 증폭시킨 목소리를 이용한 공작의 일갈에 병사들의 동요가 차츰 사라져갔다.

    그러나 몰랐으리라. 긍지라는 건, 강한 자에게만 통용되는 것이라는 걸.

    눈앞의 거대한 공포를 목도하면 긍지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되리라.

    “찍, 찍, 찍. 찍, 찍, 찍!”

    그래 바로 지금처럼.

    “도망쳐, 도망쳐! 밤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해. 밤이 오면 도망갈 수도 없어. 오고 있어, 오고 있어. 망태 도깨비가 오고 있어!”

    어두운 밤, 홀로 아름답게 빛나는 기나긴 붉은색 머릿결. 바람에 나부껴 자연히 피를 연상하게 할 만큼 붉은 머리카락.

    “서둘러, 도망쳐! 꾸물거리지 말고 도망쳐! 늦었어, 어서 숨어! 머리를 숙여, 눈을 뽑고.”

    시체나 병자 같은 새하얀 피부. 어두운 밤 유독 빛나는, 오팔과 같이 형형색색을 뽐내는 눈동자.

    “호흡을 멈춰, 다리를 잘라! 그리고 울어봐, 찍찍! 찍찍찍! 망태 도깨비는 들쥐를 무서워해. 그러니까 울어. 커다랗고, 눈이 작은 쥐새끼처럼 정신없이 울어!”

    절망을 등에 짊어진 흡혈귀. 시리아 C. 아미라니. 그녀가 나타났다.

    “안녕, 여러분. 반가워.”

    ‘지랄, 반갑기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과 실제로 그 모습을 본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존나 머리 아프네.’

    시리아 혼자 있다면 이곳에 있는 전력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8서클 아크메이지와 오러 마스터. 게다가 라트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만약 이곳에 헤톤과 파르시가 있다면?

    ‘그럼 승산이 좀 없는데.’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재 라트의 전력은 예전, 두려움에 몸을 떨며 숨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한다. 지금 시점에서 흑사제 집단에게 노려지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발아하여 무참히 피어라, 핏빛 장미여.”

    “어이쿠!”

    비명을 지르면서도 루아타 공작의 마법을 간단하게 피해낸 시리아는 공중으로 뛰어 올라 저 멀리 지붕 한 켠에 착지했다.

    “아저씨가 그 아크 메이지구나? 아저씨는 마법 배우느라 소설도 안 봤지? 원래 자기 소개할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거라고!”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를 확실히 귓가에 내리꽂힌다.

    ‘진짜 미친 년.’

    자기소개는 무슨. 등장할 때마다 소름끼치는 노래를 부르고, 항상 자기소개를 하며 웃는다. 아니 저년은 웃지 않을 때가 없지.

    사람을 죽일 때도, 임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지어 자기가 죽을 때조차도 웃는다.

    또라이 중 또라이. 모든 플레이어가 시리아를 그렇게 불렀고, 이것만큼 그녀에게 어울리는 별명이 없었다.

    “놀아주는 건, 내 소개가 끝나고 나서야.”

    그러나 실력은 진짜다. 몸을 억죄는 살기에 라트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시 인사할게. 반가워, 여러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네.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시리아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분명 라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날 동굴에서 맡았던 라트의 피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그쪽은 나를 모를 테니 내 소개부터 할게요. 나는 시리아 C. 아미라니.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범람하는 역병≫의 후계자.”

    2세대 흡혈귀 시리아 C. 아미라니. 1세대 흡혈귀 군주 중 하나인 범람하는 역병의 후계자. 모를 리가 있나. 니년한테 당한 것도, 니년을 죽인 것도 수 백, 수 천 번이다.

    “이쪽은 떨거지, 페르시.”

    ‘페르시는 있고, 헤톤은?’

    시리아의 말에 페르시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아직까지 헤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헤톤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맞아떨어진다. 헤톤이 볼 일이 생겨서 어딘가로 갔다면? 페르시는 시리아를 제어할 수 없고 시리아는 언제나 쾌락을 탐한다.

    그러니 이런 짓을 벌였겠지. 어쩌면 루만이 한 짓거리를 듣고 그 새끼한테 흥미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하아. 난 숨어있을 생각이었다만.”

    “남자가 왜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들어? 놀 수 있을 때 놀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넌 언제나 놀고, 언제나 즐기잖아.”

    “그거야 일은 재미가 없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시리아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큰 장대를 가진 거대한 낫을 꺼내들었다.

    “자, 놀아보자고. 아저씨, 아줌마, 청년, 아가씨들. 아리따운 흡혈귀와 달밤에 파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거대한 낫을 들어 올린 시리아가 비어있는 반대 손가락을 튕기자.

    “지금부터 화려한 무대 개막!”

    이곳에서 느껴지던 마력의 정체, 구울이 하나 둘 땅속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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