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27화 (1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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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끔찍하군.”

    “누가 이런 짓을, 흑마법사 짓인가?”

    귀족들을 시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마법사 짓이 아니다. 이건 아무래도 흡혈귀의 소행인 것 같군.”

    시체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공작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흡혈귀라면 카르세이나 대륙에만 있는 괴물들 아니었습니까?”

    “시체가 이렇게 되는 건 3가지 경우뿐이다.”

    공작은 자리에 모인 귀족들에게 라트와 똑같은 생각을 들려주었다. 흑마법사나 서큐버스의 짓이 아니라면 남은 경우는 흡혈귀 뿐.

    “신전도 없는 좁은 성이니, 흡혈귀가 이런 짓을 벌이기에는 최적일 터. 그러나 흡혈귀가 노르스 대륙까지 왜 왔는지는 모르겠군.”

    “추르벡 자작!”

    모두의 시선이 미르차르드에게 몰린다. 뒤늦게 이쪽으로 온 미르차르드는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추르벡 자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미르차르드님 이 시체가 추르벡 자작인 게 확실합니까?”

    “저 반지, 추르벡 자작의 결혼반지입니다. 제가 장만해준 것이니, 틀림이 없습니다.”

    반지라, 시체의 손 쪽을 바라보자 미르차르드의 말대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껴져있었다.

    “누가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이어지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그래, 극악무도한 짓이다. 그러나 그 정체를 제대로 알 길이 없어. 남은 것은 오로지 공포 뿐.

    “진격을 멈추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길로 가야합니다.”

    피츠로이 백작이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흡혈귀가 다시금 출현할지도 모른다. 위험 요소가 가득한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은 자살 행위.

    그러나 라트의 귀에는 피츠로이 백작의 의견이 굉장히 멍청하게 들렸다. 여기서 물러나서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백작님 말에는 동의하나 지금 와서 돌아가기에는 군량이 부족합니다.”

    보급을 담당하고 있는 벨크론 자작은 피츠로이 백작의 말이 옳으나 군량이 부족함을 알린다.

    이 좁은 성에 남아있는 군량을 모두 가져간다고 해도 이 정도 대군을 얼마나 먹일 수 있겠는가.

    “런트로 돌아가서 군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나.”

    “그렇게 하면 저희는 안전하겠지만, 슬렌베로 진격 중인 브로켄 후작님 쪽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귀족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라트는 눈을 감고 상황을 정리했다. 저들의 말은 들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중이니까.

    아마도 지금 일은 흡혈귀의 짓이 맞을 거다.

    이 시체도 그렇고,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흡혈귀가 벌인 짓이라면 맞아떨어진다.

    ‘지금 이 일이 시리아가 벌인 짓이라고 생각해보자.’

    보통 흑사제 집단에 속한 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시리아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친년 중 하나다.

    그러나 그녀가 루만과 켈랑을 도와줄 이유는 없다.

    ‘아니, 있긴 하지.’

    만약 런트에서 벌어진 일이 시리아의 귀에 들어갔다면? 그 미친년은 분명 루만에게 관심을 가질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단정 지을 수도 없는 게 분명 시리아는 그 당시 헤톤과 함께 있었다.

    헤톤은 흑사제 중에서도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며 시리아를 통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흑사제다. 헤톤과 같이 다니는 이상 시리아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두 번째, 플래그가 꼬여서 정말 우연히 노르스 대륙으로 다른 흡혈귀가 왔을 경우.’

    흡혈귀 중 대부분이 흑사제 집단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흡혈귀도 몇몇 있다.

    그러나 그런 흡혈귀들은 흑사제 집단에 몸을 의탁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떨거지이거나.

    반대로 어마어마하게 강대하기에 인간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거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 1세대 뿐.

    ‘1세대 흡혈귀가 둥지를 떠날 리가 없잖아.’

    1세대, 최초로 태어난 흡혈귀이자 단신으로 용과 맞먹는 힘을 낼 수 있는 지고의 군주들.

    그런 놈들이 자신의 둥지를 버리고 노르스 대륙까지 올 리가 없다.

    그럼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시리아가 이런 짓을 벌였다? 흑사제에게 몸을 의탁한 다른 흡혈귀라면 함부로 나대지 않겠지만, 시리아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일 만 하다.

    “하아.”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은 시리아말고는 이런 짓을 벌일 다른 흡혈귀는 떠오르지 않았다.

    “으스스하군요. 사람들이 소멸한 것처럼 사라지다니.”

    “괴담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라트가 생각을 마치자, 귀족들은 제각각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다.

    “미르차르드 님.”

    “왜 부르십니까.”

    그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시체를 바라보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르차르드를 부르자, 그는 라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근처에 혹시 신전이 있습니까?”

    “수도 근방에는 대신전말고 다른 신전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르차르드의 확인 사살이 떨어지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전쟁 중에 사제를 대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민다. 사제 한 명만 있다면 성수를 이용해서 흡혈귀의 세뇌 권능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브로켄 후작님께 연락해서 우선 슬렌베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리고 런트로 가서 신전 쪽에 도움을 청합시다.”

    “그게 옳긴 하지만, 적에게 시간을 줘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전 쪽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보장도 없어요.”

    “그리고 흡혈귀가 저희를 노리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켈랑을 노리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런트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계속 진격하느냐 고민을 하는 귀족들의 모습에 라트는 싸늘히 웃었다. 저들의 고민은 근본부터가 잘못됐다.

    “흡혈귀가 진정 저희를 노리고 있다면 런트로 돌아갈 수도 못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후작 대리?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전진해야한다는 건가?”

    이대로 진군을 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런트로 돌아가는 것도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이다.

    “진짜로 이것이 흡혈귀의 소행이라면 당연히 이대로 진군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후퇴한다고 해서, 런트로 돌아갈 때까지 흡혈귀와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흡혈귀가 그냥 재미 삼아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것뿐이라면 이대로 진군을 해도, 후퇴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다.

    그러나 흡혈귀가 만약, 근방의 인간을 노리고 있다면. 후퇴를 한다고 해서 흡혈귀의 노림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런트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약 일주일.

    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지라 숲이 만연해, 신전조차 없는 이런 곳에서 후퇴한다고, 흡혈귀와 마주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과연.”

    라트의 말을 깨달은 피츠로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이쪽이 어떤 결정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흡혈귀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의 문제다.

    “후작 대리의 말이 옳다. 근처에서 마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이 정도 소행을 벌일 수 있는 흡혈귀라면 마력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니겠지.”

    다시 한 번 마나 스캔을 사용한 루아타 공작은 침음을 삼키며 성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군. 당장 이곳에 머무른다고 해도 변을 당할지 모르니.”

    주도권은 이쪽에 있는 게 아니다. 상대편에게 있다. 지금 가장 문제되는 건, 도대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일을 했는지다.

    그리고 과연 우리 군단에 피해를 줄지, 아니면 지나칠지도 관건.

    ‘어지간하면 이쪽을 노리지는 않겠지만.’

    이름 모를 흡혈귀의 소행이라면 이쪽을 건드리는 짓은 하지 않겠지. 그러나 한참 전에 제국으로 돌아갈 배를 타야할 시리아가 만약 이곳에 남아 있다면.

    제국 반란 퀘스트의 시기가 더더욱 늦춰지겠지만, 반대로 이쪽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 미친년이 무슨 짓을 벌일 지는 라트조차 모른다.

    프로그램일 때도 플레이어의 예측을 벗어나는 온갖 또라이 짓은 다하고 다녔는데, 현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일까.

    “그럼 선택지가 없군. 내가 계속 마나 스캔을 하면서 진군할 수밖에.”

    “안 됩니다.”

    루아타 공작의 말에 라트는 재빨리 반대했다.

    “공작님은 우리 쪽에서 제일 중요한 전력 중 한 분이십니다. 혹시나 흡혈귀가 이쪽을 노린다면, 공작님은 마나를 최대한 아끼셔야 합니다.”

    “자네, 흡혈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나?”

    노르스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흡혈귀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공작이라고 해도, 서적에서나 봤을까?

    어쩔 수 없지. 흡혈귀와 마주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나 라트는 다르다. 게임 내에서 마주한 흡혈귀의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이던가.

    그렇기에 흡혈귀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흡혈귀라고 모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2세대 흡혈귀 정도는 되야 이 정도 숫자의 사람을 세뇌할 수 있습니다.”

    1세대 군주, 혹은 2세대 후계자급 정도는 되어야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 시리아는 2세대 흡혈귀에 속했다.

    그 정도 되는 흡혈귀를 상대로는 성수가 없다면, 대군은 무력해지고 만다. 일정 수준 이하의 인간은 흡혈귀의 세뇌에 저항할 수 없으니까.

    세뇌가 무적이라는 건 아니다. 제아무리 강대한 흡혈귀라고 해도 성수를 머리에 뿌린 인간은 세뇌를 할 수 없고, 거리에도 제한이 있으며 세뇌할 수 있는 숫자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아군이 적으로 돌변한다면 인간은 당황할 수밖에 없지.

    조금 전까지 잡담을 나누던 전우가 무언가에 홀려 자신을 공격한다면, 인간은 과연 망설임 없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가.

    ‘불가능하지.’

    막대한 힘을 가진 셰크티 제국이 반란의 불화를 막아내지 못한 건, 갑작스럽게 등장한 흡혈귀가 병사들을 교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트가 대충 흡혈귀의 전력을 말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귀족들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 3서클 마법사나 오러 스콰이어 정도라면 흡혈귀의 세뇌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아닙니다.”

    말이 좋아 3서클 마법사, 말이 좋아 오러 스콰이어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 귀족들의 가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군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병사들은 세뇌에 저항할 수 없다. 전우가 적으로 돌아서는 걸 봐야한다는 뜻이다.

    “혹시나 흡혈귀가 이쪽을 노린다면 방법은 하나. 공작님과 미르차르드님이 최대한 빨리 흡혈귀를 처리하시는 겁니다.”

    성수를 구할 수 없는 이상, 흡혈귀가 이쪽을 노릴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흡혈귀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거다.

    그러니 공작은 최대한 마나를 아껴놓는 게 낫다.

    “그리고 오늘 일은 병사들에게 말해놓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동료에게 공격당하는 것보단 미리 긴장하고 있는 편이…….”

    “그건 흡혈귀가 왔을 때 말하면 된다.”

    이번에는 루아타 공작이 라트의 말을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병사들에게 과한 긴장감까지 불어넣을 수는 없다. 만약 정말로 흡혈귀가 이쪽을 노린다면, 그 때 병사들의 바로 잡으면 된다.”

    “저도 공작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세르먼트 후작 역시 루아타 공작의 의견에 동의했고, 주변 귀족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다.

    과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위협 때문에 병사들의 피로를 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건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에는 루아타 공작의 의견이 옳았기에 라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나름대로 수준이 높은 편이다.

    루아타 공작이 엄선한 귀족들이다. 적어도 돼지같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행동하는 이는 없다.

    피츠로이 백작도 야망인 큰 거지, 바보 같은 놈은 아니다. 그의 아들인 프레만도 능력만 보자면 뛰어난 편이기도 하고.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아군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문제는 라트다.

    ‘진짜로 시리아라면, 무색의 연금술은 자제해야 되는 거 아니야?’

    만약 시리아가 진짜 이 사건의 원흉이라면 생명의 연금술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무색의 연금술은 위험하다.

    (회색 놈이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걸 익혀봐야 어떻게 써먹는다고.)

    에스페를 만난 날 그림자 꽃을 채취하기 위해서 동굴에서 갔을 때 마주했던 페르시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는 연금술사를 잡으려고 혈안이다. 회색의 연금술사를 찾기 위해서 이 대륙까지 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들 앞에서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면 라트 역시, 회색의 연금술사와 마찬가지로 흑사제들에게 노려질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무리지.’

    강해지기는 했다지만, 흑사제 집단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니 이 사건의 원흉이 밝혀질 때까지 무색의 연금술은 자제하도록 하자.

    ‘당장 무리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승리하는 건 결국, 나다.’

    훗날 있을 달콤한 승리를 기약하며 라트는 아직까지 이후로 어떻게할지 떠들고 있는 귀족들의 대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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