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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토리나 산성까지 가는 길에 있는 첫 번째 성은 어렵지 않게 정리되었다. 작은 규모의 성은 대포까지 있는 군단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마법이 걸려있는 튼튼하고 거대한 성벽이라면 모를까, 조그마한 성벽은 폭탄 한 방에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수성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여기까지는 아무런 이변도 없었다. 문제는 두 번째 성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무도 없는데?”
“도망친 게 아닐까요?”
“전원 신중을 가하면서 전진하다.”
성문은 닫혀있었지만, 그 위에는 어떤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까마귀가 날아다니며 빛을 가린다.
“자네, 어딜 가나!”
왠지 모를 불길함이 머리를 엄습하자, 라트는 재빨리 성벽으로 달려가서 무색의 연금술로 성벽을 열었다.
“없어.”
아무도 없었다.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친 걸까? 그런 것치고 거리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손질되어 광이 나는 병장기, 쌓여있는 군량. 싸늘하게 식어버린 물이 들어있는 컵까지. 도망칠 거라면 적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남겨두고 갔을 리가 없다.
마치 어제까지만 해도 누가 있었다는 모양새다. 혹시나 싶어 눈에 바로 보이는 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의 풍경.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주방에는 재료들이 흩어져있었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인형이 거실에 나뒹군다.
혹시나 싶어 다음 집도 그 다음 집도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남겨진 사람은 없고 앞선 집과 비슷한 풍경이 라트를 맞이했다.
“공작님!”
상황을 확인한 라트는 이제 막 성문에 도착한 본대로 합류해 공작을 불렀다.
“자네 왜 그러나. 우선 땀 좀 닦고 말하는 게 좋겠어.”
‘땀?’
그제야 라트는 자신이 비가 오듯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옷소매를 들어 이마를 훔쳤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요동친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다.
“마나 스캔을 해주십시오.”
“이미 해보았다. 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공작의 대답에 라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며칠 사이에 평범한 일상을 남겨두고, 도망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
“공작님 이것좀 보십시오. 병장기와 군량을 내버려두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급하게 도망쳤나 본데요?”
아니야, 이건 급하게 도망친 게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가 사람들을 납치한 거다.
‘설마 흑마법사 놈들이? 아니야. 그 놈들이라면 흔적을 남겼을 거야. 그리고 그놈들은 셀룬과 켈랑의 싸움에선 나서지 않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 중에서도 네크로맨서는 사람을 시체를 부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죽인 흔적과 마력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흑마법의 기운도, 사람을 죽인 흔적도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노르스 대륙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누가 있을까.
‘없어.’
장담하건데 없다. 많은 사람들을 납치할 수 있는 존재야 수없이 많지만, 이렇게 흔적도 없이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설마, 흡혈귀? 아니야 노르스 대륙에는 흡혈귀가 없잖아.’
흡혈귀라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기는 하다. 흡혈귀는 권능이라고 불리는, 몇 안 되는 종족 특유의 힘을 가진 종족 중 하나다.
그러나 흡혈귀는 모두 카르세이나 대륙에서 활동하고, 그 수는 매우 한정적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악신의 사제들과 함께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흡혈귀를 떠올린 이유는 흡혈귀의 권능 중 하나가 최면이기 때문이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최면의 극에 이른 흡혈귀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
“수상하군.”
주변을 살펴보던 공작 역시, 수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의 말에 몇몇 귀족들은 수긍했으나, 그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는 귀족도 있었다.
“무엇이 수상하십니까?”
“병장기와 군량을 보아 하니,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 그런데 저런 준비를 해놓고 도망쳤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저희 군단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망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멍청한 새끼. 라트는 공작의 말에 의문을 다는 귀족을 노려보았다. 첫 번째 성을 함락한지 이제 3일이 지났다.
그 시간이라면 상대해야할 군단의 정보를 얻고, 도저히 싸움이 안 되겠다고 판단 하에 도망칠 시간은 충분하다.
적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군량과 병장기를 굳이 놔두고 급히 도망칠 시간이 아니란 말이다.
“그게 아니면…….”
“병신도 아니고, 어떤 지휘관이 적에게 도움이 될 군량과 병장기를 놔두고 갑니까.”
계속해서 귀족 중 하나가 토를 달려고 하자, 라트는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독설을 날렸다.
“그, 급하게 도망쳤다면!”
“만약 적이 급하게 도망을 쳤다면 거리가 이렇게 평온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못합니까?”
이어지는 말에 귀족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납득은 하지 못했다는 게 그 얼굴에 절절히 드러난다.
짜증이 치민다. 이런 놈이 무슨 귀족이라고. 이만큼 말했더니 나머지 귀족은 대부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이 새낀 뭐하는 놈인데 이렇게 이해력이 느린가.
“되도 않는 소리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직접 보세요.”
귀족에게 시간이 정지된 것 마냥 일상이 남아있는 집으로 들어가 보라고 말한 라트는 고개를 돌려, 미르차르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르차르드 님. 이 성을 관리하는 건 누구였습니까.”
“추르벡 자작입니다.”
“어떤 귀족이었는데요.”
“추르벡 자작은 명예를 알고 있는 남자입니다. 적을 코앞에 두고 도망치는 귀족이 아니라, 승산이 없다고 해도,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켰을 자입니다.”
미르차르드의 대답에 루아타 공작은 이마를 쓰다듬었다. 명예를 알고 있는 귀족이라고 해도 승산이 없다면 도망쳤을 수도 있다.
도망쳐서 병력을 온전히 지키고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성에 모든 걸 남겨둔 채 떠나는 건 명예로운 방식이 아니다.
게다가 병사들만 도망쳤다면 모를까, 백성들까지 같이 도망치는 건 무리한 일이다. 피난민과 함께하면 자연히 진군 속도가 늦춰지게 되니까.
“공작님과 후작 대리님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집 안을 보고 온 귀족은 그제야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집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더군요. 군인은 몰라도, 생활이 막막한 백성들이 저렇게 집을 내버려두고 갈 리가 없죠.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고 있는 귀족에게서 시선을 돌린 라트는 공작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성 내를 돌아다니며 철저히 살펴보았다.
관찰력 기능의 레벨도 높으니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겨져 있다면, 발견할 수 있을 터.
“없어.”
철저하게 성 내부를 전부 살폈음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벌였음에도 진짜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은 건가?
흡혈귀라면 최면을 이용해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흡혈귀가 노르스 대륙에 있을 리……아, 설마!’
계속해서 노르스 대륙에 흡혈귀가 없다고 생각하던 중, 동굴에 숨어서 몸을 떨던 때를 기억해내고 입을 벌렸다.
그 날, 라트는 시리아라는 이름을 똑똑히 들었다. 악신을 모시는 사제 중에서 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NPC는 단 한 명뿐이다.
‘미친년.’
특유의 정신 나간 성격 때문에 안티가 많았지만, 그만큼 팬도 많은 여자.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나긴 붉은 머리를 최흉의 흡혈귀 중 하나.
시리아 로우. 그년이라면 이런 짓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 년이 아직도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시리아는 현재 카르세이나 대륙으로 급히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라트의 기억대로라면 시리아가 없는 이상 제국 반란 퀘스트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는 시리아가 제국의 황자 중 2명을 꼬셔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불길함을 어떻게든 떨치기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던 라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뭘 묻었어. 그것도 극히 최근에.”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땅에 무언가를 묻은 흔적이 보인다.
“만연하라.”
무색의 연금술을 이용해 급히 땅을 헤집자, 묻어져있던 것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진짜, 왜 이리 퀘스트가 꼬이는 건데.”
그것을 확인한 라트의 입에서 한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땅속에 있던 것은 수분이 완전히 사라져 메말라버린 시체였다.
이런 시체를 만들어지는 경우는 단 3개뿐이다.
하나는 흑마법에 당해 생명이 모조리 빨렸을 경우. 그러나 이 성에서는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기에 제외.
두 번째는 서큐버스에게 정기가 빨렸을 경우. 이 경우도 마찬가지. 두 번째 메인 퀘스트인 마족 침공이 진행되지 않았으니 서큐버스가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경우, 흡혈귀에게 피가 빨렸을 때다.
월드 세리아에서는 흡혈귀에게 피가 빨렸다고 흡혈귀가 되는 게 아니다. 흡혈귀는 오로지 흡혈귀끼리 성교를 해야만 태어난다.
흡혈귀가 흡혈 행위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건 흔히들 좀비라고 부르는 권속뿐이다.
그것도 흡혈을 하면서 약간의 마력을 주입해야 만들 수 있는 거지, 이런 말라빠진 시체로는 좀비조차 만들 수 없다.
“결국 흡혈귀 짓이라는 거지.”
세 가지 경우를 모두 고려해본 결과, 이것이 흡혈귀의 소행이라고 결론을 지은 라트는 공작에게 이 시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본대로 돌아갔다.
***
어두운 밤, 여인과 남자는 수많은 사람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한다. 여인을 따라오는 사람들 모두가 넋을 잃은 상태.
“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지 않아?”
자신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피리를 부른 사내와 같은 모습에 흥이 겨웠는지, 붉은색 머리의 여인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도망쳐, 도망쳐! 밤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해. 밤이 오면 도망갈 수도 없어. 오고 있어, 오고 있어. 망태 도깨비가 오고 있어!”
노래는 단조로웠으나, 여성의 목소리 덕분에 듣기에는 편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서둘러, 도망쳐! 꾸물거리지 말고! 늦었어, 어서 숨어! 머리를 숙여, 눈을 뽑고.”
“시리아. 그 괴상한 노래 좀 어떻게 하면 안 되겠나.”
갑자기 이상해지는 노래에 남자는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여성에게 노래를 그만 부르라 청했지만.
“호흡을 멈춰, 다리를 잘라! 그리고 울어봐, 찍찍찍! 찍찍찌익! 망태 도깨비는 들쥐를 무서워해. 그러니까 울어, 커다랗고, 눈이 작은 쥐새끼처럼 정신없이 울어!”
안타깝게도 여인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언제 들어도 소름끼치는 노래로군.”
“에이, 겨우 이 정도로 뭘. 우리가 하는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새끼 수준이지.”
꺄르륵 웃으면서 남자의 말에 장난스럽게 반론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그래 지금부터 하려는 짓에 비하면, 이런 노랫말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다만. 그런데 그곳에서 왜 흡혈을 했나. 그렇게 배고파 보이지는 않았는데.”
페르시는 전날 들렸던 성에서 시리아가 자신의 정신 지배를 견뎌낸 인간을 흡혈해서 땅에 묻은 이유가 궁금했는지 지금 와서 그 이유를 물었다.
“아, 그거? 별 이유 없는데.”
“별 이유가 없다고?”
“응. 그래도 군단을 이끌고 오는 건데, 그냥 죽여 버리면 심심하잖아. 거기에 있는 놈들 중에서 그 시체를 발견하면 놈이 있으면 적어도 대비는 하고 오지 않겠어? 일종의 시험이지.”
정말로 별 이유 없군. 페르시는 표정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체를 발견했다고 해도 과연 대책을 만들어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대책을 만들어와도 또 어떤가.
그 때는 도망치면 그만이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시리아의 변덕 때문에 맡았을 뿐. 페르시는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티끌도 없었다.
“약속대로,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의 머리는 당장 제국으로 돌아가 조직이 내린 사명을 다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시리아는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홀한 눈빛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리비추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아아, 8서클 아크메이지니까 이번에는 조금 즐겁겠지? 어떤 피 맛이 날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거 같아.”
야릇하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어둠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Rukia님 레이세아님, 쪽지로 고칠 부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