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19화 (119/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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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런트의 왕성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함락되었다. 미르차르드의 예견대로 루만 태자는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고, 왕좌에는 셀틱 루크 판게르 켈랑이 쓸쓸하게 앉아있었다.

    물론 그의 앞에 상당히 많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국왕을 지키기 위하여 서있었지만, 셀틱 국왕의 모습이 처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자신이 모르게 수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모자는 자신의 아들인 루만 페르 제릭 켈랑이다. 어찌 처량하지 않으랴, 어찌 씁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왕으로써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라트는 바로 옆에 있는 미르차르드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을 목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셀틱 국왕의 앞에 서있던 귀족 중 한 명이 호통을 쳤지만, 저 호통은 그저 패배한 충견의 마지막 울부짖음일 뿐이다.

    “미르차르드 후작님 어째서 거기 계신 건가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착각일 일으키는 청아한 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목소리, 우습지만 아름답다고 표현할 만했다.

    그 목소리에 귀족들이 물러서고 그 사이에서 척 봐도 고귀한 외모의 여성이 나타났다.

    수수하지만, 품격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 드레스. 가짓수는 적지만, 기품이 뚝뚝 떨어지는 장신구. 푸른색 머리카락, 푸른색 눈동자.

    ‘아, 공주님이 있었지.’

    그제야 켈랑에 공주님이 있음을 기억해낸 라트는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 나라별로 공주님은 적어도 한 명씩 있다.

    왜 있냐고? 그거야 당연히 판타지의 히로인이라고 하면 공주님이 들어가니까. 세나릭에스토리아 황녀 같이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공주님은 히로인 그 이상의 가치가 없다.

    켈랑의 공주인 시그나룬벨 켈랑의 경우도 공주님이고, 공주에 걸 맞는 기품과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NPC에 불과했다.

    아니 평범한 NPC라고 하기는 그렇지.

    왕국이 멀쩡하다는 가정 하에 공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면, 왕에게 인정받지 못해 사형당하거나, 사랑의 도피를 떠나거나, 왕에게 인정받고 결혼하거나 셋 중 하나의 선택지가 생기니까.

    문제는 공주의 경우,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히로인이라는 거다. 카사노바를 목표로 하던 많은 플레이어들이 공주 앞에 무너졌었다.

    “저는 이제 후작이 아닙니다, 공주님.”

    공주가 자신을 부르자 후작은 주먹을 거세게 쥐고,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답했다.

    “어째서죠?”

    “그것이…….”

    “그만두거라, 시그나. 후작이 곤란해 하지 않느냐.”

    겨우 하룻밤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늙어, 수척해진 왕은 공주를 만류하며 왕좌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후작. 아니, 니콜라벨리. 그대가 그런 꼴을 봤으니 나에게 한 충성의 맹세를 거둘 만도 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나, 겨우 그 정도. 한때 후작이라고 불렸던 니콜라벨리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거친 짓은 허락하지 않는다. 인도적으로 파르스로 이송시킨다.”

    공작의 명령에 병사들이 서서히 다가간다. 거칠게 나가지 않는 건 미르차르드가 보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광인이 되기 전에는 심성이 고왔던 걸까. 아마도 둘 다겠지.

    “여러분 모두, 얌전히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파르스까지 충분히 대우를 하며 모실 것이고 후에 안전도 보장하겠습니다.”

    굳이 공작에게 셀틱 국왕에게 거친 짓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미르차르드는 라트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어찌 너희를 믿고 국왕 전하를!”

    “우리가 셀룬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방에서 소란이 인다. 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수도를 점령당한 상태이니, 그들의 멘탈이 얼마나 처참하게 깨졌을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소란을 일으켜봐야 좋을 건 하나 없다.

    이곳에 남은 건 전부 국왕파 귀족들뿐인지, 국왕 전하의 안위를 생각하는 그 마음은 갸륵하게 그지없으나 당장 저 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국왕을 지킬 힘은 없다.

    힘도 없으면서, 힘을 가진 상대에게 말로 겁박을 주려고 하다니. 멍청한 짓이다. 누가 갑인지, 누가 을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게다가 이쪽 귀족들 중에서도 루아타 공작의 명령을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피츠로이 백작이다.

    “하암.”

    그러나 라트는 이 상황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공작이 저렇게 나온 이상 피츠로이 백작이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엘리를 죽이려고 했던 루만 태자와 케이네의 목숨을 위협했던 케츠. 두 명 모두 놓쳐버렸기에 탈력감이 생겼는지 라트는 하품을 하며 귀찮은 표정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검까지 뽑아, 결사항전을 치를 기세가 역력하다.

    ‘목숨 아까운지도 모르는 놈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목숨보다 충성이 중요한가. 라트는 그제야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들의 왕을 지키려고 한다.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건가.

    ‘나랑 다를 게 없잖아.’

    그래 다를 게 없었다. 나도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까지 역력했던 귀찮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생각한다. 저쪽 귀족이 소란을 일으킨 덕분에 이쪽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폭발 직전인 두 무리를 한 순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미르차르드님.”

    라트는 미르차르드에게만 들리게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나서주세요. 미르차르드님이라면 양쪽 모두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안 좋아지자 그들을 말리고 싶었던 미르차르드는 라트에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대치 중인 두 무리의 사이로 이동했다.

    “켈랑을 배신하고, 셀룬에 투항한 자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켈랑의 귀족들을 향해, 한 때 자신의 왕이었던 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한다. 미르차르드의 등장에 켈랑의 귀족들은 침착해지기는커녕 더더욱 노발대발한다.

    그렇겠지, 사정을 모르는 그들 입장에서 미르차르드는 배신자일 뿐이니까.

    “여러분이 그리고 셀틱 국왕께서…….”

    그러나 다음 순간 미르차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느꼈으리라. 이제는 전하라고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깊이 자책하는 목소리를.

    “셀룬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셀룬과 켈랑은 오래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가 숙적이었음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켈랑의 귀족들이 쉽사리 이쪽을 믿지 못하는 거다.

    그렇지만 미르차르드의 말이라면 또 다르다.

    “그러나 믿어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여러분뿐만 아니라 국왕님의 안위도 위험합니다.”

    명백한 사실. 지금은 루아타 공작이 신사적으로 나오고 있을 뿐이다.

    원래 시나리오대로 루아타 공작이 광인이 됐고, 피츠로이 백작이 이 군단의 지휘를 맡았을 경우 셀틱 국왕과 시그나룬벨 공주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이 자리에서 죽었다.

    “셀룬 측이 여러분께 국왕께 감히 실례를 한다면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바이올런의 이름 아래 맹세하겠습니다.”

    ‘와 이건 좀 큰데.’

    그의 말에 셀룬 쪽이 술렁거린다. 오러 마스터가 한 명 더 왕국에 영입되면 셀룬의 국력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진다.

    그런데 그 오러 마스터가 목숨을 끊겠다고 맹세했으니, 그 누구라도 셀틱 국왕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리라.

    미르차르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루아타 공작이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반평생토록 국왕 전하께 충성을 다했던, 저를 봐서라도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아직 자신의 충심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을 끝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이제 그만.”

    아직까지 씁쓸한 표정을 풀지 않던 왕은 왕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귀족들에게 다가간다.

    “내 안위는 걱정하지 말게.”

    “하, 하오나 전하!”

    고개를 저으며 귀족들을 만류한 셀틱은 자신의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미르차르드에게 건넸다.

    “여기 오케만의 친서일세. 받아가 저들에게 보여주게나, 미르차르드 공.”

    이제는 자신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 셀틱 국왕은 미르차르드를 후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와, 미르차르드 얼굴이 구겨진다.

    “침울한 표정 짓지 말게. 그대의 탓이 아닌, 전부 부족한 내 탓이니까.”

    가져가라며, 편지를 내민다.

    “어서. 팔이 아파오네.”

    몸이 떨려와 그것을 차마 받을 수 없던 후작은 간신히 떨리는 몸을 다스리며, 편지를 받아 루아타 공작에게 전해주었다.

    그것을 읽은 루아타 공작의 눈에 한순간 당황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 뿐. 관찰력 기능이 뛰어난 라트가 간신히 알아봤을 정도다.

    이 자리에서 그의 당황을 알아챈 건 라트와 미르차르드 뿐.

    “보아라, 제군들. 여기 국왕 전하의 각인이 찍혀있는 편지다.”

    공작은 편지를 높게 들어올려, 셀룬의 귀족들에게 그리고 병사들에게 오케만 국왕의 각인을 보였다.

    “국왕 전하께서 셀룬 루크 판게르 켈랑 국왕과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을 수도까지 잘 모시라고 하신다. 명을 어기는 자, 반역죄로 엄히 벌할 것이니 무례한 짓은 삼가도록.”

    “명을 따릅니다!”

    루아타 공작은 원래부터 셀틱 국왕을 편히 이송하려고 했지만, 국왕의 명령이 떨어졌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권이 강력한 셀룬에서 국왕의 명령을 어기는 짓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표정에 불만이 서려있던 셀룬의 귀족들도 그 즉시 불만을 지우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제군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켈랑의 백성들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약탈 및 파괴 행위는 모두 금하겠다.”

    “충!”

    보통 성이나 도시를 점령하면 약탈을 하기 마련이지만, 약탈을 금했음에도 그 누구도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루아타 공작의 마법 덕분에 대부분의 백성이 다치지 않고 구조되기는 했지만, 오늘 일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모습을 눈으로 직접 봤는데, 그 백성들을 약탈하라고? 인간인 이상 그러지는 못한다.

    “끝났네.”

    미르차르드의 활약 덕분에 켈랑 측 귀족들의 반발도 사그라졌다.

    게다가 셀룬의 국왕이 직접 명령을 했으니, 셀틱 국왕의 안위도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얌전히 셀룬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무기를 넘겨준다.

    “공작님. 저는 좀 쉬어도 괜찮겠습니까?”

    일이 잘 마무리되자, 라트는 루아타 공작에게 다가가 쉬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오늘의 전투 역시, 라트의 전공이 가장 높았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후방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혼자서 막았고 오러 마스터급이라고 평가받는 그림자 까마귀의 단주인 브라일까지 처리했다.

    물론 브라일이 암살자인만큼, 일반 병사들은 그의 존재를 몰랐지만, 귀족들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전공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누가 라트보다 자신의 전공이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네는 피곤할 만도 하지.”

    두 번의 전투 모두, 적의 핵심 전력을 처리했기에 공작은 라트가 피곤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사저도 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신적으로 힘들 거예요.”

    다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은 케이네였다.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고 멀쩡히 서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어마어마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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