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112화 (112/229)
  • 0112 / 0229 ----------------------------------------------

    1부

    “……이만 들어 가보겠다.”

    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와 자신까지 계승된 검술의 묘리를 전부 보여준 후작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천막이 있는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라트는 그가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그를 소리없이 배웅했다.

    “하하하.”

    메마른 웃음이 나무를 타고 흐른다. 최근 상태창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레벨이 얼마나 올랐는지 몰랐는데, 마침 스탯 포인트가 널널할 때 이런 기연을 만날 줄이야.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미르차르드 검술(Lv 1 + 근력 민첩) - 필요 기능 : 한손검

    * 미르차르드 가문이 수백 년을 투자했음에도 완성되지 않았던 방어적인 검술. 현재는 니콜라벨리라는 천재의 손에 의해 완전히 완전해졌다고 평가받는다.

    “나이스!”

    후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트는 주먹을 움켜쥐며 짧게 환호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르쿨의 검술은 너무 패도적인 검술이라 방어적인 검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후작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그의 검술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치도 않았는데 이런 행운이 일어날 줄이야.

    “이젠 망캐인지, 축캐인지 헷갈리네.”

    처음 이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는 분명 완벽한 트롤 캐릭터였는데. 상태창에 있는 희귀 기능의 숫자를 보니, 도저히 트롤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는다.

    ‘트롤 캐릭터가 맞기야 하지만.’

    연금술사 주제에 검술과 관련된 기능이 2개나 있으니 트롤 캐릭터인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엘릭서 덕분에 오른 스탯까지 보자면 슬슬 트롤 캐릭터가 아니라 축캐 아니, 사기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다.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공격력은 스탯과 무기 그리고 기능에 비례한다. 희귀 기능이 사기인 이유는 비례값에 희귀 기능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괜히 스탯 포인트 100개를 소비해서 희귀 기능을 배우는 게 아니지. 스탯 포인트 100개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으니까.

    “이걸로 방어 쪽도 그럭저럭 괜찮아지겠네.”

    물론 지금 당장은 희귀 기능 레벨이 1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도 들어갈까.”

    혼자 검술을 연습해봐야 희귀 기능의 경험치는 쥐꼬리 밖에 오르지 않음을 알기에 편히 쉴 생각으로 천막으로 향한다.

    마주치는 병사, 혹은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에 인물이 라트를 맞아주었다.

    “왔어?”

    “무슨 일이야 누나.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쏟아지는 은색 머릿결과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는 얼굴로 라트를 환대해준 건 케이네였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왜 의문형인데.”

    보고 싶다니, 낮 동안 엘리와 함께 라트의 옆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으면서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라트는 쓰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누나가 온 게 싫어?”

    “그건 아니고.”

    지난 3년 간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준 사람 중 한 명이다. 어찌 싫을 수 있을까. 제스맹과 케이네 덕분에 익숙지만 낯선 이 세계에서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내 말은 내일부터는 쉴 시간도 없을 텐데 안 쉬고 왜 왔냐는 거지.”

    런트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반나절 정도. 내일, 켈랑의 국운을 건 전투가 펼쳐질 거다.

    케이네는 안전하게 후진에 있겠지만, 그래도 그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체력을 보존해야 될 텐데.

    “아~ 누나 걱정해주는 구나?”

    라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네는 활짝 웃으며 라트의 옆에 앉았다.

    “그 꼬마가 이렇게 커서, 오러 마스터도 이겼다니.”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어릴 적부터 오러 마스터를 옆에서 보았던 케이네는 그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라트라 미르차르드 후작을 이겼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곳을 찾은 이유도 저녁 식사 후 잠에 들었다가 라트가 미르차르드 후작의 손에 죽는 악몽을 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이렇게 큰 꼬맹이가 어디 있다고.”

    3년 전에는 케이네보다 키가 작았기에 꼬맹이 취급을 받아도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케이네의 얼굴이 라트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키가 컸으니 꼬맹이 취급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나 눈에는 만년 꼬마로 보이는 걸.”

    “진짜로?”

    그 물음에 케이네는 라트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때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본다. 처음 본 날 케이네는 라트가 자신의 동생이 되어주길 바랐다.

    가족의 정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에게 정을 쏟았고, 정을 쏟은 만큼 돌려주는 아이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그래서.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은? 그 물음에 케이네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의 재능은 너무나도 빛났다. 자신의 실력을 따라잡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2년 정도.

    순식간에 자신을 추월한 아이는, 영원히 꼬마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케이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 날, 어디 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키스를 했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지금 자신은 과연, 눈앞의 남자가 꼬마로 보이는가? 동생으로 보이는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다.

    보고 싶다는 것 또한 그래. 악몽 때문에 라트를 보러온 것도 맞지만, 사실은 엘리와 함께 있으면 엘리를 바라보느라 자신을 잘 보내지 않았기에 찾아온 것도 있다.

    지금만큼은 라트가 엘리가 아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누나?”

    “응, 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던 케이네는 라트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때고 라트를 바라보았다.

    녹색 머리, 백색의 눈동자.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 있는 조합이다. 그렇지만 멋져.

    “무슨 고민 있어?”

    어제 그리고 오늘. 케이네가 최근 들어 자꾸 딴 생각을 하느라 대화의 갈피를 못 잡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기에 라트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라트는 케이네가 전쟁에 참여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전하게 길드에 있었으면 했다.

    이번 전쟁이 아무리 셀룬에게 유리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전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물론 케이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혹여나 그녀가 전쟁에 참여한 걸 후회하느라 딴 생각을 하는 게 잦은 거라면 지금도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고민은 당연히 있지.”

    “어떤 고민?”

    “스승님도 걱정되고, 이번 전쟁도 걱정되고. 그리고 앞으로의 내 미래도 걱정되고. 라트랑 엘리도 걱정……되고.”

    마지막 말이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걸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은 케이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라트와 엘리가 연인 사이가 된 건 분명 축하해줘야 할 일이다.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면 라트의 미래는 보장된다.

    그런데 왜 가슴이 타오르는가. 이유를 모르겠어.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먼저 만났는데.’

    라트와 엘리랑 함께 행군하고 있을 때 그녀는 조금씩 소외감을 느꼈다. 엘리나 라트가 딱히 케이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 혼자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왠지 평상시처럼 라트를 대할 수가 없어. 라트는 이제 엘리의 연인이니까. 내가 라트를 편하게 대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

    그래서 길드에 있을 때처럼 그를 껴안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을 자제했다. 엘리와 라트가 말할 때, 되도록 끼어들지 않게 조심했다.

    이상하게도, 웃기게도 스스로 그렇게 했는데,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다니.

    “나랑 엘리는 걱정할 필요 없지만, 확실히 스승님은.”

    단언, 엘리와의 관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단언에 케이네는 라트 몰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동생을 바라본다.

    스승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동생 앞에서, 내일이면 다가올 전투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동생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안해 나 때문에.”

    케이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괜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트는 케이네에게 사과하는 걸 멈추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애간장이 탔다.

    ‘이러면 안 돼.’

    몇몇 왕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국 그리고 제국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지만, 상대는 공작의 유일무이한 외동딸이다. 공작의 모든 것을 받을 여성이다.

    공녀가 있는데 다른 연인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이런 마음도 가져서는 안 돼.

    이미 한 번, 라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적 있지 않은가. 그 소란을 일으켜서 그 착했던 아이가 화를 내면서 자신에게 소리 지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 라트는 착해서 지금 이 마음을 그대로 말한다고 해도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을 피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감추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감추면 적어도 누나로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길드 마스터라니, 누나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라트가 부르기 전에 정신을 차린 케이네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나라면 잘 할 수 있어.”

    제국은 모르겠지만, 노르스 대륙에서는 제스맹 그리고 라트를 제외하면 케이네의 실력을 따라갈 연금술사는 없다.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실력만 따지는 연금술사이기에 길드 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큰 셀룬의 길드 마스터 자리에 앉을만 했다.

    제스맹 기느투스의 제자인 거 말고는 경력이 없는 게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건 케이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 참가한 거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케이네의 이름도 한층 알려지겠지.

    “그렇게 말해주니까 조금 안심이 되네. 사실 조금 불안했거든.”

    “내가 짬이 나면 옆에서 도와줄 건데 뭐가 불안해.”

    그 말에 케이네는 가슴이 떨림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고개를 들면,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동생에게 들켜버리고 말거다.

    “도와 줄 거야?”

    “뭐 바쁜 몸이라 자주는 못 도와주겠지만…….”

    메인 퀘스트 때문에 이번 전쟁이 끝나도 바쁘게 움직여야하고, 진엔딩으로 가는 방법도 찾아야하기에 나름 굉장히 바쁜 몸이다.

    들려오는 대답에 케이네가 조금 침울해지자, 라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도와줄게.”

    어차피 길드에 리오스와 에스페도 있고, 케이네가 조금 걱정되기도 하니까 짬이 날 때마다 들릴 생각이었다.

    케이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메인 퀘스트를 내팽개치고 달려갈 생각이다.

    “자 약속.”

    그리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라트의 모습에 3년 전 새끼손가락을 걸었을 때, 그리고 그 날 밤 새끼손가락을 걸었을 때가 생각나 더더욱 얼굴이 빨개진다.

    “그래, 약속.”

    간신히 자신의 얼굴을 수습한 케이네는 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을 나눴다.

    “이런 너무 늦었다. 누나가 동생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민폐라고 생각한 케이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자렴, 내 동생.”

    “누나도 잘 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케이네는 황급히 라트의 천막에서 빠져나갔다.

    “피곤한가?”

    케이네의 모습에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그저 피곤해서라고 단정 지은 라트는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