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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 이후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엘리가 공작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라트가 미르차르드 후작과 싸우는 걸 윤허한 게 문제라나, 뭐라나.
진심으로 분노하며 공작, 자신의 아버지를 속사포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라트는 그 다음이 자신임을 직감하고 눈을 떨었고, 공작 역시 딸은 아무리 예쁘게 키워봐야 결국 서방님의 편이라는 걸 깨닫고 치를 떨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바로 미르차르드 후작의 처분 문제였다.
미르차르드 후작의 포로 권리를 라트가 가지는 건 그 누구도 이견을 가지지 않았지만, 라트가 그를 속박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줬고 대접도 극진히 대접 해줄 것을 청했기에 소란이 일어났다.
미르차르드 후작은 공식적으로는 켈랑의 최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다. 당장 고문을 해서 정보를 뽑아내던가, 처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저런 취급이라니.
몇몇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공작이 라트를 옹호해줬기에 반발은 차츰 사그라졌다.
그리고 늦은 저녁, 셀룬의 군세는 해가 지기 전에 메아리치는 밀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곳도 이제 안녕이네.”
밀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고 덕분에 병사들과 귀족들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찌 긴장을 풀 수 있을까. 이곳에서 이틀 정도만 진군하면, 곧바로 적국의 수도인 런트에 도달할 수 있는데.
“지긋지긋했어.”
쏟아지는 장대비와 수많은 벌레를 그리고 숨 막히는 기후까지. 평생을 곱게 자란 엘리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밀림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는 밀림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할 거 같아.”
“그쵸 언니? 으으으. 전쟁이라서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삭였는지 몰라요.”
엘리 뿐만 아니라, 케이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심한 아버지와 양아치 오라버니 사이에서 자랐다지만, 그녀도 귀족은 귀족.
아마도 그녀의 일생동안 겪은 고통은 밀림에서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라.
“저기 좀 떨어져서 가면 안 될까.”
라트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세 마리의 말이 철썩 같이 붙어서 같이 걸어가는 중이다. 왼쪽에는 엘리, 오른쪽에는 케이네. 혹자가 보기에는 양손의 꽃을 쥐고 있는 부러운 상황이겠지만, 현재 라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그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뭐라고? 제대로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볼래? 아니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엘리의 모습에 라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래?”
평소의 따뜻한 웃음이 아닌, 심장을 얼릴 정도로 차가운 웃음. 현재 엘리는 절찬리 분노 중이었다.
“죽기 직전에 포션 먹여주는 것 정도는 해줄게.”
화가 난 건 케이네도 마찬가지인지, 차가운 미소가 비수가 되어 한 번 더 라트의 심장을 찔렀다.
무모하게 미르차르드 후작과 일대일로 싸운 것에, 그리고 그럴 거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에 두 여성은 굉장히 화가 나있는 상태다.
“죄송합니다.”
직감이 괜히 여기서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훅하고 갈 수 있다고 경고했기에 라트는 고개를 숙였다.
라트를 걱정하기에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겠지만, 부담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거기다가 조금 무섭기도 하다. 저 표정, 웃고 있지만 절대로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죄송하겠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인을 두고 감히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려고 들었으니까!”
“맞아. 그러다가 라트가 죽으면 내가 스승님을 어떻게 보라고.”
거침없이 화를 내는 엘리의 모습과 달리 케이네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은연 중 엘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연인 관계인 엘리에 비해 케이네와 라트의 관계는 사저. 남매처럼 친하다고는 하지만, 겨우 그 정도 관계일 뿐이라는 걸 자각했기에 케이네는 조금 자격지심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매만진다.
그 날 밤, 라트의 입술의 온기가 남아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겨우 그 뿐. 라트를 좋아하지만, 이 마음이 가족의 애정인지, 여자의 사랑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게다가 같은 동문이기에 라트를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 만약 케이네가 셀룬의 연금술사 길드 마스터가 된다면 라트에게서 더욱 멀어지겠지.
그건 싫었다. 내가 가장 먼저 알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남동생을 엘리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가슴이 울렁인다.
남동생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으으, 정말 싫다.’
질투가 먼저 타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질투를 하는가. 자신이 계속 라트와 함께할 수 없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엘리와 라트가 사귀는 걸 반대할 이유도, 질투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일렁이는 이 감정은 도대체.
“누나.”
“어, 어! 왜 부르니?”
라트의 부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케이네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급히 라트를 바라보았다.
“어디 안 좋아보여서. 약이라도 먹을래?”
“언니 어디 안 좋아요?”
“아니야, 완전 쌩쌩해.”
두 남녀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케이네는 애써 괜찮다고 말했다. 몸은 건강하지, 불편한 쪽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고, 마음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도록 하지.”
슬슬 해가 떨어지려고 하던 참에 마침 야영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있었기에 공작은 진군 중지 명령을 내렸다.
거센 전투 끝에 드디어 휴식이 찾아왔다.
“후우.”
말에서 내린 라트는 피곤에 지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귀족과 기사들이야 말을 타고 있었기에 그다지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그런 전투를 치르고도 이곳까지 걸어왔으니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라트 어디가?”
연인이 자신을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걸어가자 눈을 번쩍이는 엘리의 모습에 라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설마 일일이 자신을 살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와주려고.”
천막을 세우려고 하는 병사들을 가리키자 엘리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귀족 특유의 의식이 남아있는 아가씨라고 하지만, 오늘 격전을 치른 병사들을 도와주겠다는 것을 말릴 정도로 특권 의식에 쩔어있지는 않았다.
“괜찮겠어? 피곤하지 않아?”
그래도 라트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난 괜찮아.”
정신이 피곤하기는 하지만, 포션 덕분에 체력과 마력은 충분했다.
“만연하라.”
땅에 손을 집고, 주문을 외운다. 대상은 천막을 치기 위한 기초 뼈대인 나무. 계산을 끝내자, 순식간에 천막의 뼈대가 세워졌고 그 모습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후 천막이 일사분란하게 세워졌고 불길이 순식간에 장작을 잡아먹고 타올랐으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생을 했으니 그에 합당한 식사가 배급이 될 모양이다.
“이게 연금술이라니. 언제 봐도 놀랍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스맹 후작님께서 어마어마한 제자를 키우셨군요.”
세워진 천막을 둘러보던 귀족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빛나는 눈으로 그리고 조금은 아쉽다는 눈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케이네가 있기 때문에 라트는 길드 마스터 직위에 오를 수 없다. 그를 가신으로 영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눈을 빛냈다.
그러나 공작의 사위를 가신으로 영입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아쉬웠다.
저 어린 나이에 미르차르드 후작과 싸워 이긴 연금술사라니. 세간에 알려지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빛나는 원석이다. 아니 그는 이미 정제되어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는 보석 중의 보석이었다. 인재를 원하는 귀족이라면 가지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공녀님의 짝으로 손색이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
가신들의 말에 루아타 공작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능력 면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아직 그의 신분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어떨까.
잠시 후 배급이 시작되자, 라트는 한 사람 몫의 배급을 들고 후방에 있는 막사로 걸어갔다.
“실례합니다, 후작님.”
“식사인가. 괜찮나? 패장에게 식량을 나눠줘도.”
“뭐, 한 사람 더 먹는다고 축나지는 않겠죠.”
그 말에 후작은 라트가 건네준 식량을 주저 없이 받았다.
‘벌써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정말이지 징그러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라트가 후작이 당한 공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며칠 동안 사경에 헤맸겠지. 징그럽다 못해, 경이적이기 까지 하다.
“하나만 묻지. 태자 저하는 어떻게 되셨나.”
음식을 입에 넣기 전, 후작은 태자의 안위를 물었다. 일단 후작은 켈랑의 귀족이니 태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안타깝게도.”
라트는 이를 갈며 얼굴을 구겼다. 공작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루만 태자는 미르차르드 후작이 패배하기도 전에 메아리치는 밀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 전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소리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니, 루만 태자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새끼는 내가 죽인다.’
감히 엘리를 죽이려고 한 놈을 죽이는 것뿐.
“그런가.”
라트의 반응이 범상치 않았지만, 후작은 먼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자네는 식사 안 하나?”
“저는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요.”
엘리랑 케이네와 함께 먹지 않으면 제 자리에 성이 서있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날 챙겨주겠다고 온 건가? 이거 조금 미안한데.”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으니까요.”
“부탁?”
그 말에 후작은 식량을 바닥에 놔두고 라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 덕분에 포로 신세임에도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기에 후작은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다 드시면, 저한테 한 수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미르차르드 후작과 칼부림을 나눈다고 해서, 루아타 공작이 딱히 말리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눈앞의 남자는 오러 마스터에 이른 자다. 범인 아니, 천재라고해도 감히 닿을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경지.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라트의 입장에서는 경험치 덩어리였다. 그가 가르쳐주는 것만으로 경험치는 물론이오, 기능 레벨도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한 수라 함은 검을 말하는 뜻이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현재 라트에게는 가르침이 필요했다.
연금술이야 이 시대 최고의 연금술사를 스승으로 뒀으니 더 이상의 가르침은 필요 없지만, 검술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게 아니다.
물론 검과 관련된 기능은 착실히 레벨 업 하고 있었고 희귀 기능 마르쿨의 검술을 가지고 있지만, 매번 부족하다는 걸 체감한다.
거기에 마르쿨의 검술은 아무래도 공격을 중시하는 검술이다보니, 자신보다 더 강한 자를 상대로는 발휘하기가 힘들다.
“적에게 한 수 가르쳐주라니. 허허.”
“런트에 도착할 때까지만 가르쳐주셔도 좋습니다. 가르쳐주신다고만 하면, 체력 포션을 드리겠습니다.”
라트의 말에 후작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적에게 검을 가르쳐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런트까지 남은 거리는 겨우 이틀 남짓. 이틀이라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겨우 그 정도 시간만으로는 상대가 강해지지 않을 터. 그렇지만 적에게 검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일.
“한 수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대련이라면 생각해보지.”
가르치는 건 좀 그렇지만, 마음에 든 젊은이와 다시금 검을 나누는 건 고려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한 수 가르치는 거나, 대련이나. 어차피 검을 나누다보면 미르차르드 후작은 어쩔 수 없이 라트에게 충고의 한 마디를 던질 거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러 마스터와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수련에 도움이 될 거다.
“그럼 그렇게 하지. 식사하고 이쪽으로 오게나.”
“여기 체력 포션입니다.”
인벤토리에서 체력 포션 2병을 꺼내 미르차르드 후작에게 넘겨준 라트는 지체 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엘리와 케이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