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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 그것이.”
공작의 물음에 프레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당황할 만도 하지. 그가 탈영병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오로지 라트를 엿 먹이기 위해서다.
전쟁에 참여한 젊은이들 중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자신이 라트에 의해 관심 받지 못하게 됐다. 나아가 엘리와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그녀의 관심이 라트에게 쏠려 있어서 어떻게든 라트를 군법을 이용해 처벌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권한이 없다고 하지만, 고작 평민 놈을 잡는 일이다. 일이 수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평민은 귀족보다 못한 존재다. 귀족이 평민을 잡는데 그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고작 평민을 잡는 일에 공녀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프레만의 명에 따라 라트를 포박하려고 드는 병사들을 말렸다.
그것뿐인가? 평민을 두둔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천막 밖으로 걷어차인 것은 자신임에도 엘라자넷 공녀는 자신이 아닌 평민을 걱정했다. 질투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상황에 소리까지 지르지 않았던가.
“그것도 감히 후작 대리를 잡으려고 하다니. 네놈이 감히 내 친우인 기느투스 후작을 무시한 것이냐? 이게 바로 하극상이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 분명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공작이 분노를 보이는 중이다. 예상과 달리 그의 분노는 라트가 아닌 프레만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후작 대리, 이 일에 대해서 설명해보게.”
“다짜고짜 저를 탈영병이라고 말하면서 포박하려고 들더군요. 더군다나 저를 평민 취급하면서요.”
“평민 취급을 했다고?”
어지간해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는 무표정을 고수하던 공작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붉어졌다. 라트가 누구인가? 무려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인 기느투스 후작의 제자이자, 대리인이다.
공작을 제외하면 전쟁에서 라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아니 공작이라고 하더라도, 라트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후작 대리가 후작과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그와 동등한 권한과 존중을 받아야함은 마땅하니까.
그 존중 덕분에 군기를 중요시 여기는 전장에서도 라트가 분대에 편성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저더러 연금술사 따위, 라고 하더군요.”
이 전쟁을 위해 수명까지 깎아먹은 친우를 둔 공작이다. 그에게 있어 연금술사를 천시하는 건, 자신을 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질 것이다.
“뭐하고 있나, 당장 피츠로이 백작을 데려오지 않고!”
라트의 말을 끝으로 공작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명을 따릅니다.”
가신 중 하나가 급히 피츠로이 백작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떴다.
“기분이 어때? 니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실제론 니 편이 아니라니. 당황스럽지?”
오로지 프레만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속삭이자, 그는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 어째서 저런 평민 놈을 감싸시는 겁니까! 저 미천한 놈이 공녀님과 사귀고 있다고요!”
오, 탈영병 건이 먹히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그걸로 몰고 가려는 건가. 프레만의 말에 수많은 좌중의 눈빛이 변한다. 지금은 후작 대리라는 신분이 있지만, 어찌됐든 라트의 신분은 평민.
제아무리 기느투스 후작의 두 번째 제자라고 하지만, 평민은 평민일 뿐이다. 그런 자가 귀족과, 그것도 공녀의 연인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 자리에는 병사들은 물론이오, 귀족들도 모여 있다. 덕분에 라트는 그들의 시샘과 부러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황은 없다. 이루크 성을 공략하기 전, 공작이 엘리와 자신이 그렇고 그런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있음을 몰랐다면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당황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다만, 라트는 주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바람에 바로 뒤에 있는 케이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모두가 예상했다. 루아타 공작의 분노가 프레만에게서 라트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프레만을 바라보았다.
“예?”
공작이 그런 식으로 나오자, 프레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의문을 자아낼 뿐. 자신의 딸이 하나 뿐인 자식이 고작 평민과 사귄다는데 어째서 그것에 분노하지 않는가.
“내 딸이 어떻게 사는지는 내 딸의 선택이다. 네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것에 참견하려고 드느냐?”
속닥거리던 모든 좌중이 공작의 말에 의해 침묵한다. 이 자리에서 공녀의 짝이 공작에 의해 공인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께서 평민과! 컥.”
인정할 수 없어서, 자신이 사모하던 이가 다른 이와, 그것도 평민과 사귄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기에 프레만은 부르짖듯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공작은 분노와 함께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프레만의 배를 걷어찼다.
“네 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공작은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위에는 왕만 있을 뿐이고, 공작은 친왕파다. 그 자리를 넘볼 이유가 없지. 그렇기에 딸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하나 뿐인 자식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지.
“이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한다. 현 후작 대리, 원래 신분은 기느투스 후작의 두 번째 제자인 라트가 내 딸과 사귀는 건 내가 공인한 일이다. 쓸 때 없는 염문이 세어나갈 시, 엄중히 벌하겠다.”
뒤를 이어, 호사가들에 의해 이번 일에 살이 붙어서 무성한 소문이 나기를 원치 않은 공작이 현재 이곳에 있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경고를 날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렇게 분위기가 침체되던 중.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 피츠로이 백작은 자리에 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신의 아들을 봤지만, 아들을 부축하는 것보다 먼저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혹시 제 아들이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마도?”
잘못을 했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공작이 살며시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자네의 아들이 탈영병을 잡으려고 정규군을 움직였다네. 그러니 묻겠네, 자네가 시킨 일인가?”
일순간 침묵,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피츠로이 백작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프레만을 살펴보기를 잠시, 표정을 감추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을 보지 못했겠지만, 공작과 라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명백한 당황, 이번 일을 피츠로이 백작이 시킨 일이 아닌, 프레만의 독단이다.
“예. 제가 시킨 일입니다.”
그러나 피츠로이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거짓을 고했다. 분명 공작이 자신의 당황을 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했다.
왜?
프레만이 멋대로 정규군을 움직였다면 군법에 어긋난 일이지만, 피츠로이 백작의 지시로 정규군을 움직였으면 군법에 어긋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들을 감싸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숙여진 고개 사이로 보이는 시선에 프레만을 향한 분노가 보이고 있지만, 어떻게든 아들을 감싸려고 하는 중이다.
“그런가.”
피츠로이 백작이 거짓을 고했지만, 거짓말이 아니라고 잡아 때면 그만이다. 탈영병을 잡는 명령은 굳이 명령서를 남길 필요 없이, 구두 명령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후작 대리를 잡을 수는 없지요. 명을 물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라트는 눈을 반짝이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역시 피츠로이 백작이다. 이곳에 이제 도착해서 지금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를 것인데 어떤 일로 프레만이 쓰러져있고, 공작이 화를 내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차리고 있다.
내가 거짓을 고했지만, 네가 불편한 일은 넘어가줄테니 서로 윈윈을 하자는 제안이다.
‘과연 공작이 미쳤으면, 정계를 휘잡을 인물이네. 완벽해.’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라트가 프레만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갔을 때.
“자네의 배려는 고맙지만,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군. 후작 대리는 군을 이탈한 게 아니라 내 지시로 비밀리에 첩보 활동을 하기 위해 난전에서 자리를 비운 것뿐이다.”
‘그렇게 하자는 건가.’
과연, 공작 덕분에 군에서 이탈한 게 군법 회의에 치부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라트의 군 이탈을 비밀 첩보 활동으로 치부해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없애려는 건가.
‘물어온 정보도 있으니까.’
이곳에 미르차르드 후작과 루만 태자, 그리고 켈랑의 1군단과 3군단이 있다는 걸 알아왔으니, 첩보 활동을 했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비밀 첩보 활동이요?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후작 대리는 혹시나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을 했다. 그 결과, 이곳에 미르차르드 후작과 루만 태자, 그리고 1군단과 3군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왔다.”
“예!?”
“1군단과 3군단이?”
“그럼 기사단도 여기 있다는 소린가?”
“미르차르드 놈이 여기 왔다고!?”
“그, 그게 정말인가. 후작 대리?”
수많은 귀족들이 한 마디씩 할 때, 피츠로이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라트에게 진실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운이 좋아서 미르차르드 후작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의 절기인 절망의 고함을 들었기에 몸을 가누기가 힘듭니다.”
라트의 대답에 피츠로이 백작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해야겠지만, 라트가 고작 군 이탈이라는 불명예를 지우기 위해서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이 말을 사실이다.
“홀리여, 맙소사.”
피츠로이 백작은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탄식어린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정말로 미르차르드 후작이 있다고?”
좌중 사이에서 세르먼트 후작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표결이기는 했지만, 그의 의견에 따라 메아리치는 밀림에 왔는데 이곳에 가장 큰 전력이 있다고 하니까.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예. 정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러니까, 제가 북쪽으로 가자고!”
한쪽은 고개를 숙이고, 한쪽은 언성을 높인다. 오러 마스터의 파급력은 이 정도로 강력하다. 마법사는 전장에서 광범위한 파괴를 도맡지만, 선두에 서서 병사들에게 사귀를 북돋아줄 수 있는 건 오러 마스터니까.
“안전하게 북쪽으로 가면 됐을 것을!”
“우리가 이곳에 미르차르드 후작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귀족들의 소리도 높아진다. 소리를 높이는 귀족들은 당연히, 피츠로이 백작의 의견에 찬성했던 이들이다. 몇몇 귀족들이 반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 두면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만.”
바로 그 때, 조용하나, 크나큰 목소리가 좌중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공작에게로 집중한다. 마법을 사용해서 목소리를 크게 만든 공작은 매서운 표정으로 좌중과 피츠로이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 떠들 바에야, 지금 당장 일어난 일에 대해서 토론하는 게 생산성 있다고 생각하네만. 자네들은 과거를 후회하는데 시간을 쓸 생각인가?”
옳은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한탄과 분노를 토해내기 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작전을 강구해야하는 게 옳다.
“진지 공사는 부관과 가신들에게 맡기고, 전원 회의장으로 모이도록 해라.”
“명을 따릅니다.”
조금 전 피츠로이 백작을 데려온 가신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곧곧에 흩어져있는 귀족들을 모으기 위해 자리를 떠났고, 공작의 말을 들은 귀족들은 하나 같이 회의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정신이 없는 시간에, 라트는 아직도 자리에 쓰러져서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고 있는 프레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위기를 모면했네. 운 좋은 줄 알아.”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속삭이자, 프레만은 표정을 굳히고 라트를 노려보았지만, 라트는 이미 등을 돌리고 공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도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까?”
육체는 모르지만, 정신은 죽음 직전에 내몰리기도 했고, 프레만 덕분에 휴식도 취하지 못했다. 잠이 필요하다, 쉬고 싶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 회의 전까지는 쉬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겠군. 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받아드리게나.”
“제가 자초한 일이 아닌데요.”
“내 딸을 꼬셨으니, 네 놈이 자처한 일이지.”
와,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라트는 한숨을 내쉬고, 조금 전 나왔던 공작의 천막으로 다시금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귀환! 연중러는 역시 연중러야 절레절레 하신 분들...연송합니다.
25살이라 집안 대소사에는 관여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머니 재혼부터 할아버지 팔순 잔치까지..5월 말경부터 정신이 없었습니다. 크아아아....어떻게든 하루에 한 편씩 올리려고 노력은 해봤지만, 결국 팔순 잔치가 다가오니 그러지도 못하고. 힘들었습니다..진짜...
내일부턴 다시 페이스 찾아서 연재해볼게요.
P.s 리퀴드와 eg를 후두려팬 피닉스는 어째서 미네스키에게 그리 고전을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