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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99화 (99/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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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군 이탈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나가라. 그리고…….”

    공작의 나가보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 앉아 탁상공론을 해봐야 적들이 무슨 음모를 계획 중인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라트는 미르차르드 후작과 대면한 몸이다. 한시라도 빨리 쉬게 해주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왜, 말을 저렇게 끌고 라트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인가. 공작의 시선에 라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복을 빌어주마.”

    ‘명복? 어째서?’

    공작이 라트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자, 라트 역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공작이 어째서 자신에게 명복을 빌어줬는지를. 뒤에는 냉기가 풀풀 흘리며, 라트를 노려보고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한쪽은 금발, 한쪽은 은발, 정말이지 아름다워서 한 순간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만약 그녀들이 웃고 있었더라면 미의 여신이 이 자리에 강림했다는 착각마저 들었을 터다.

    “너.”

    “라트.”

    그러나 두 여성 모두, 냉기를 넘어서서 분노를 표방하는 중이기에 라트는 입을 다물고 재빨리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여신이 아니라, 분노에 물든 여신들을 상대로 감히 눈을 마주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야기 계속 하지요, 공작님.”

    “너와 할 이야기는 이제 없다. 따라 가보도록.”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게 먹힐 리가 있나. 공작은 고갯짓을 하며 라트에게 축객령을 내려 명백히 라트의 도움을 거절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옹호를 해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아니지, 오히려 딸을 훔쳐간 놈이다. 구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 분명 이건 의도적으로 엿이나 먹어보라고 하는 일이 분명했다.

    “빨리 이리와!”

    지금 나가면 죽는다. 그건 분명하다.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핍박당해 죽을 게 뻔했다. 그러나 도망칠 길은 없어. 저렇게 입구를 막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돼지의 기분이 이런 것인가. 한숨 한 번을 내쉰 라트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는 엘리와 케이네에게 다가갔다.

    두 여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라트의 양 팔을 하나씩 잡더니 어디론가 향한다.

    “저기…….”

    “조용히 하고, 일단 따라와.”

    “네.”

    이번 일은 본인의 잘못이 컸기 때문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 라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자.

    “한숨 쉬지 마.”

    이번에는 케이네가 사나운 표정으로 라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숨마저 쉴 수 없게 되고만 남자는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엘리의 막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라트의 모습과 달리 그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부러운 표정이 되었다는 건 말한 필요도 없겠지.

    “언니한테 다 들었어. 본대를 이탈했었다면서?”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엘리가 차갑게 물었다. 케이네가 이곳에 있는 이상 딱히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가 뒀기에!”

    어디다두긴, 잠시 저 멀리 하늘에 날려놨지. 전장의 급박감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미 본대는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사실 라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본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합류하지 못했는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길을 잃어버렸어.”

    익숙하지 않은 지형.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현실의 메아리치는 밀림은 굉장히 복잡하고 거대한 미로와 같았다. 그렇다고 길을 찾자고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하면 적의 시선을 끌 수도 있지. 덕분에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루만 태자와 만나지 않았던가.

    “붉은 실을 보이게해서 찾아오면 됐잖아.”

    “까먹……었어.”

    자신이 일류 플레이어임을 자부하는 라트는 그 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침음을 삼켰다.

    “잘하는 짓이야, 아주 잘해.”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케이네가 자신을 비꼬자, 라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존대가 튀어나왔다. 왠지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한 소리 더 들을 거 같아. 그 정도로 두 여성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녀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라트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죄송한 줄은 알고 있어?”

    “응. 뼈저리게 알고 있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처음 느껴보는 광기에 미쳐 되도 않는 짓을 하고 말았다. 지금 내 목숨은 내 목숨이지만, 내 목숨이 아닌 상황이다. 내가 죽으면 엘리도 죽는다. 그 사실을 잊고, 너무 막 나갔다.

    그래 잊고 있었다. 엘리와 내가 모리아의 저주를 받아, 운명에 실에 묶여있는 것을. 저주같지 않은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이 패널티는 의외로 상당했다.

    자신의 목숨만으로 끝날 상황이라면, 목숨을 걸만한 상황에서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던질 수 있지만, 내가 죽으면 연인의 목숨까지 죽는다. 그렇기에 망설임이 생기고, 망설임은 독이 된다.

    “정말 미안해.”

    그렇기에 사과했다. 사랑하는 엘리의 목숨을 한 순간, 가볍게 여긴 꼴이다.

    게다가 케이네는 라트가 이번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며,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처음으로 만든 코어형 골렘까지 주지 않았던가. 백 번을 사과해도 모자란 상황이다.

    “하아.”

    케이네가 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고, 엘리는 여전히 라트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님이 수색대를 조직하려다가 마신 거 알고 있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내가 얼마나 마음 졸인 줄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공작이야 화를 내기 전에 얻어온 정보를 풀었으니까 별 말 없이 끝난 거지. 만약 라트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단순히 길을 헤매다가 본대로 돌아왔더라면, 공작조차도 라트에게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길을 잃은 것치고는 어떻게 잘 찾아왔네?”

    “운이 좋았거든.”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분명 미르차르드 후작과 마주쳤다고 말하면 이제 차츰 화가 줄어드는 중인 두 아가씨는 태세를 바꿔 더더욱 화를 낼 것이다.

    그렇지만 말을 하지 않자니, 군사 회의 시간에 공작이 적의 전력을 말하기 위해서 분명 라트가 얻어온 정보를 말할 거다. 그 때가서 엘리가 라트를 노려보는 상황을 만들 바에야 지금 말하는 게 났다.

    “밀림을 헤매다가 말이야.”

    밀림에서 태자를 만난 일과 그를 죽이려다가 미르차르드 후작을 만난 일을 설명하면서 엘리와 케이네의 얼굴을 바라본다. 분명 다시금 분노로 물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창백해짐과 동시에 케이네는 라트의 손을 매만졌고 엘리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미, 미르차르드 후작이 왜 여기에?!”

    “라트 괜찮은 거야?”

    ‘뭔데, 이 반응은.’

    미르차르드 후작, 켈랑 유일의 오러 마스터이자 검의 길을 걷는 기사이며 동시에 바이올런의 종속이다. 오러 마스터이자 바이올런의 종속이며 동시에 귀족인 자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렇기에 엘리와 케이네는 라트가 미르차르드 후작을 만나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중이고, 동시에 감사하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오러 마스터라는 존재의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것이겠지.

    “괜찮아, 몸 멀쩡히 다친데 하나 없어. 말했잖아, 운이 좋았다고.”

    말을 이어, 미르차르드 후작이 어째서 여기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준 후 그가 등장하자마자 태자를 죽이려는 것을 멈추고 태자를 인질로 잡은 일.

    그리고 미르차르드 후작이 바이올런의 종속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강제로 맹세를 시킨 일까지 말하자, 엘리와 케이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놀라운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미르차르드 후작한테 우리 쪽 본진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여기로 왔어.”

    “운이 나빴네, 아니 운이 좋은 건가?”

    그 아버지의 그 딸이 아닐까봐, 공작과 비슷한 소리를 하는 엘리와 달리 케이네는 라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야.”

    엘리와 달리, 오러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 옆에서 지켜본 케이네는 그들의 무서움을 정확히 알고 있다. 만약 미르차르드 후작이 바이올런 종속이 아니었다면?

    라트는 이곳으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그곳에서 끝을 맞이했을 터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새하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계속 다행이라고 되뇌이는 케이네를 보자니, 라트는 양심에 찔렸다. 운이 좋아서 목숨을 연명한 상황이라고 하나 잘못을 따져보면 그 원인은 라트 본인에게 있었다.

    결국 자신의 잘못 때문에 누나가 이렇게 마음을 졸이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 메아치리는 밀림에 켈랑의 본 병력이 있다는 거야?”

    케이네가 정신없이 라트의 머리를 쓰다듬던 중, 엘리가 물음을 던졌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케이네가 라트의 머리에서 손을 땠다.

    “그렇지.”

    수도를 방어해야하는 1군단, 그리고 남부 쪽에 있어야할 3군단과 미르차르드 후작이 여기 있다는 말은, 그의 사병들도 이곳에 있을 게 분명했다.

    병력의 숫자는 셀룬 측이 2배 이상 앞선다지만, 이곳은 메아리치는 밀림.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지리를 고려한다면 양측의 전력은 막상막하다.

    “큰일 난 거 아니야, 라트? 메아리치는 밀림에서 전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쪽으로 온 거잖아.”

    “반대로 여기서 이기면 런트를 쉽게 뚫을 수 있을 거야, 누나.”

    본 병력이 빠져나온 런트는 현재 최소한의 병력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적의 병사들을 최대한 많이 도륙할 수 있다면 런트를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단 한 가지, 태자가 꾸미고 있는 작전이다.

    게임에서는 이루크 성을 그렇게 쉽게 뚫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루만 태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째 굉장히 불안하단 말이야.’

    메아리치는 밀림에서 사라진 몬스터, 그리고 수도로 끌려가는 피난민. 이 두 가지에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불안하다, 불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던 중 별안간 라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갔지만, 라트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또라이라도 그런 짓은 안 하겠지.’

    “실례하겠습니다, 공녀님.”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그런 짓을 벌이면 그 이후에 민심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오른 가능성을 배제해버린 순간 한 남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피츠로이 경?”

    천막 안으로 들어온 것은 프레만 베칼 피츠로이, 요전부터 라트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남자였다. 잠시였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번들거리는 욕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투의 창이 라트의 몸을 찌른다.

    “여기에 군을 이탈한 자가 있다고 들어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온 프레만은 라트를 바라보더니 등 뒤에 대동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 탈영병이 있다. 포박하라.”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지만, 이탈병은 군법 상 엄중히 처벌해야하는 게 맞다. 물론 그 안에 사심이 있는 것도 알고 있어.

    분명 나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거겠지. 엘리에게 마음이 있고, 게다가 나는 이루크 성을 혼자서 함락한 영웅이니까. 질투에 미쳐서 이런 짓을 벌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어.

    “다가오지 마라.”

    그럴 거면 내가 혼자 있을 때 일을 벌였어야지. 그랬더라면 내가 당황한 사이에 포박할 수 있었을 텐데. 뭐, 포박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라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만을 바라보았다. 왕국 유일의 공작, 왕을 제외하면 그 위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자의 후계자인 엘리자넷 공녀의 앞에서 이런 일을 벌이려고 할 줄이야.

    병사들이 누구의 말을 따를지는 자명하다. 예상대로 병사들은 엘리의 명령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프레만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피츠로이 경? 제 막사에 함부로 들어온 게 실례인지는 알고 계시겠죠?”

    공녀는 자신의 연인을 데려가려고 하는 자를 더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선풍기 막 틀어놓고 자지 마세요. 어제 일어나보니 감기라 글을 못썼습니다...선풍기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그나저나..이제 100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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