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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97화 (9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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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이런 수가 있었군.’

    태자, 루만은 라트의 기지에 입을 벌렸다. 그래 이런 수가 있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기사의 맹세를 들먹여봐야 들을 사람은 없다.

    ‘미르차르드 후작이 바이올런의 종속이라는 걸 이용할 줄이야.’

    신의 종속. 신전에 소속된 사제가 아닌, 주신 홀리가 아니라 다른 신의 힘에 이끌려 스스로 종속이 되기를 자처한 자들이다. 종속이 된 이들은 평상시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만, 신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신전으로 달려간다.

    그런 이들이 모여서, 신전에 소속된 사제와 성기사와 함께 규합되는 경우가 바로, 마의 종속들이 마계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헌신하는 때고, 그렇게 규합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십자군이다.

    그리고 다른 네 신 중 하나인 바이올런은 인간의 폭력을 상징하는 신임과 동시에 고결함과 명예를 상징하는 신이다.

    그렇기에 그의 종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며, 싸움에서 흉포하게 변한다.

    반대로 명예와 고결함을 중요시 여기기에 절대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악독한 짓을 하지 못한다.

    덕분에 이번 비밀 작전이 후작에게 알려지면 안 돼서, 그를 어떻게든 떨어트리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이번 비밀 작전은 태자와 그림자 까마귀가 단독으로 계획한 비인도적인 작전이다. 평민, 노예, 중상층을 가리지 않고 희생시켜 수도에 쳐들어올 셀룬의 군세를 전멸시키기 위한 작전.

    만약 이 사실이 후작에게 알려진다면, 절대로 이번 작전이 시행되게 내버려두지 않겠지. 그를 속박하고 작전을 시행한다면, 자신의 두 눈을 뽑아서라도 작전이 시행되는 걸 보지 않으려 할 거다.

    그럴 수는 없다, 이제까지 공들인 작전을 겨우 한 사람 때문에 백지로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빌어먹을.’

    루만은 이번 작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한 아버님, 켈랑의 국왕이 미르차르드 후작을 호위역으로 붙인 것에 짜증을 느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피장파장인가.

    ‘이 남자를 여기서 죽일 수 없는가.’

    루만은 마음속으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

    바이올런의 종속이 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행하는 의식은 전투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명예를 걸어야하는 일을 중요시 여길 것을 바이올런의 석상 앞에서 서약한다.

    그리고 바이올런의 종속이 된 이들은 이 서약를 절대로 어기지 못한다.

    이 서약을 어긴다면 바이올런의 분노를 목도하게 되기에 라트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건 당연했다.

    신의 분노를 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 아니, 살아남을 수 있는 생물은 없다.

    아니지, 차라리 죽는 게 끝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고작 필멸자에 지나지 않은, 신의 입장 상 벌레와도 같은 이가 자신에게 한 서약을 어긴다면, 과연 신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과거에 한 번 자신들에게 대적하려고 했던 인간이 서약을 어기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할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벌을 내리겠지.

    자신은 물론이오, 어쩌면 그의 모든 혈육들이 영원한 고통 속에서 부유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후작은 기사의 명예를 건 맹세를 어길 수 없어.

    자신의 뒤에 서있는 남자는 그 점을 제대로 파악했다.

    “다시 묻지, 맹세할 수 있나?”

    후작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흙빛이 된 얼굴로 땅을 주시하자, 라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태자를 중요시 여긴다면, 태자를 잃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맹세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이올런의 종속인 미르차르드 후작은 절대로 맹세를 어기지 못한다.

    신의 종속, 나름대로 상당한 메리트가 있는 신분이다. 게임 시스템 상 신의 종속이 되면 종속이 된 신이 관장하는 직업과 관련된 기능에 성장 보너스를 받고, 동시에 스탯도 상당히 올라간다.

    ‘그럼 뭐해.’

    문제는 신의 종속이라는 게 그 정도 메리트가 있음에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거지.

    신의 종속이 된다면, 우선 종속이 된 신이 상징하는 걸 지키거나 만들어야한다.

    예를 들어 생상직의 신인 에니그마의 경우, 비밀을 상징하는 신이기 때문에 그의 종속이 된 이들은 무조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어야 한다. 비밀이 없으면 만들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분노를 받는다.

    신의 분노가 뭐냐고? 게임 오버다, 게임 오버. 신의 분노를 받는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의 스텟이 엉망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캐릭터가 갑자기 노인이 되기도 하고, 어린애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없으니, 당연히 게임 오버다.

    ‘신이라는 것들이 치졸하다니까.’

    정말이지, 인간이 모시는 신들은 치졸하기 그지없다. 다른 신을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어. 모리아를 봐라, 이름 좀 팔아먹어도 아무런 짓도 하지 않잖아.

    그래 뭐,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툭하면 신이 신앙을 보이라면서 퀘스트를 주는 건 비일비재하고, 마족이 침공하면 신전으로 모여 크루세이더가 돼야한다.

    신의 종속은 누구라도 될 수 있지만, 만약 해당 신의 영향력이 10인 상태로 신전에 들려 신의 석상의 앞에 선다면, 그 신이 강제로 종속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신의 종속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니까 신전이 싫을 수밖에 없지.’

    이름 모를 소년을 구했을 때, 신전에 부속된 고아원에 들렸지만, 신전 안까지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슬슬 신전에 들려야하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

    강제로 신의 종속이 되는 이벤트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맹세……하지.”

    잡념이 끝났을 때쯤, 수많은 고뇌를 한 후작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맹세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야 셀룬 쪽으로 정보가 세어나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기사의 명예를 걸고 나를 이 자리에서 놔줄 것. 그리고 내가 셀룬의 본대로 돌아갈 때까지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해.”

    “기사의 명예를 걸고, 너를 이 자리에서 놔주겠다. 그리고 네가 셀룬의 본대로 돌아가기 전까지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됐나?”

    고민이 끝났는지, 후작은 거침없이 맹세를 했고 어서 태자를 풀어달라는 듯 라트를 노려보았다.

    ‘죽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라트는 태자를 풀어주려고 하다가, 문뜩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르차르드 후작은 맹세를 했으니, 라트가 본대에 돌아갈 때까지 어떤 방해도 하지 않겠지만, 태자는 아니다.

    사실상 태자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그를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맹세를 더 추가하겠다. 그 이후 태자를 놓아주지.”

    “나와 장난하는 건가!”

    “조용히 안하면 태자의 육신에 흠집이 생길 거야. 그래도 좋다면 소리 지르던가.”

    당장이라도 라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으나, 협박 때문에 후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갑인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으득.”

    전장이라면 모를까 라트가 태자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지금은 라트가 갑이고 미르차르드 후작이 을이다.

    “내가 무엇을 더 맹세하면 되나.”

    “간단해. 내가 본대에 도착하겠다싶을 시간까지 이 주변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태자와 함께 여기있겠다고 맹세하면 돼. 아, 태자가 말을 못하게 하는 것도 추가.”

    태자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 후작을 이용해서 태자를 강제하면 그만이다.

    ‘제법 용의주도하군.’

    후작은 살짝 감탄했다. 자신은 라트가 본대에 귀환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지만, 태자는 아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즉시, 이 근방에 있는 본대에게 명령해 라트를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기에 제법 타당한 조건이다.

    반대로 라트가 수작질을 부릴 수도 있지만, 그가 본대로 돌아갈 시간까지만 이 자리에 있어야하는 조건이라면 라트가 본대에 귀환해서 이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셀룬 쪽에서 태자를 잡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쯤이면 이곳엔 누구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아니 오히려, 이치에 맞는 조건이다.

    “자네가 셀룬의 본대와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걸 주신 홀리께 맹세한다면, 나도 맹세하겠다.”

    다만 혹시나, 라트가 본대와 연락할 수단이 있다면, 이 맹세가 역으로 독이 될 수도 있기에 후작은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주신 홀리께 맹세하건데, 본대와 연락할 수단은 전혀 없어.”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은 가볍지 않다. 특히나 인간이 모시는 다섯 신은 과거 인간이 감히 자신들에게 대적한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고하는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과 같은 합당한 사유가 없다면 인간 따위가 자신의 이름 아래 맹세하는 걸 불쾌히 여겼다.

    ‘모리아, 그 년이 좀 특이케이스지.’

    이 세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유저들은 여러 유저들의 검증에 의해서 운명을 다스리는 신인 모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는다고 해도 결코 분노하지 보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영역인 운명을 뒤바꾸는 일을 했다고 해도, 다른 신에 비해 그 분노는 가볍기 그지없다.

    운명의 실이라니, 솔직히 신의 저주라기에는 귀여운 수준이다.

    “자네가 말하는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맹세하겠다.”

    라트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신 홀리의 이름 아래 맹세하자 후작도 바이올런과의 서약에 의해 절대로 어길 수 없는, 자신의 명예를 건 맹세를 한다.

    이것으로 대화는 끝, 이제 태자를 놓아줄 차례다.

    “아, 진짜로 마지막인데.”

    그랬어야했는데, 라트는 태자를 풀어주지 않고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또 뭔가.”

    참을대로 참았는지 미르차르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온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갑자기 물어볼 게 하나 더 생각났는데.

    “셀룬의 본대 위치가 어딘 줄 알아?”

    라트는 본대가 어디로 향했는지 전혀 모른다. 이루크 성에서 치룬 공성전은 너무 쉽게 끝났기에 사실상 이번 전투가 라트에게 있어 난생 처음 겪어보는 대규모 전투였다.

    피와 땀이 튀고 뼈와 살이 분리되고, 죽은 자와 산 자가 활보하는 살육의 현장. 사방에서 죽음이 메아리치고, 모든 이가 살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운다.

    처음 겪는 현장에서 흐르는 그 긴박감과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멋대로 날뛰는데 치중해서 본대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적을 추적하느라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군 이탈은 막중한 죄지만, 이런 고급 정보를 물고 왔으니 루아타 공작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문제라면 엘리와 케이네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거?

    그래도 한 번 이런 일을 겪었으니 앞으로 이런 실수는 하지 않겠지.

    “하아?”

    라트의 물음에 후작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멍하니 라트를 바라본다.

    “설마 정찰을 나온 게 아니라, 본대에서 떨어진 거였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침묵,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작은 손으로 볼을 문지르더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기 위해 볼을 힘껏 꼬집었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군.”

    목적을 가지고 이곳까지 온 자가 아니라, 본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자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루만도 마찬가지였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린다.

    ‘그래 웃어라, 웃어.’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 상황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라트는 그들이 웃는 것을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인 일이지.

    “아까까진 굴욕적이었는데, 이제는 허탈하군.”

    이런 상황 자체가 굉장히 굴욕스러운 상황이지만, 저런 말을 들으니 굴욕보다는 허탈하다는 감정이 앞섰다. 웃음을 멈춘 미르차르드 후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켈랑의 본대가 있는 언덕과 정 반대에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셀룬의 본대는 현재 저쪽 언덕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이런 일까지 맹세해야한다는 것이 참으로 서글프게 느껴졌지만,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그 말과 함께 대화는 드디어 끝이 났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이 한 편이 끝입니다. 그냥 음..다음편에 설명하겠지, 하고 기다리실 줄 알았는데 수정하라, 뭐라, 뭐라, 코멘이 많아서 한 편에 몰아서 설명충처럼 설명했습니다.

    원래는 2~3편 정도 본진으로 돌아가 공작이나 엘리랑 대화를 통해서 천천히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이런 말쓰면 굉장히 불쾌하실 줄 압니다만, 제발 부탁인데 글 수정하시죠? 같은 어투의 코멘은 좀 자제해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각이 있는 것처럼 글쟁이도 생각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알아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걸 못 기다리시고 수정하라니. 지금 저는 제가 생각한 글을 쓰는 건가요? 아니면 여러분이 저를 조종해서 글을 쓰게 만드시는 겁니까.

    이런 생각이 드니까 멘탈이 깨져서 글이 안 써지네요. 들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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