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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96화 (9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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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현재 미르차르드 후작과 라트의 거리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다. 저 정도 거리에서 몸이 굳어버릴 정도의 살기를 목소리에 담은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이게 절망의 고함인가.’

목소리에 오러를 담아 상대방을 속박하는  미르차르드 후작의 절기를 직접 맛본 라트는 이를 악물었다.

라트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절망이 무시무시할 속도로 달려온다. 한손에 쥔 검에는 지금까지 봐왔던 오러와 달리,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는다. 직감하고 말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고 만다는 사실을.

절망의 고함은 신체를 마비시키는 기능이 아니다. 단순히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서 상대방을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하는 기능이다.

그럼에도 몸은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제까지 죽음의 공포는 많이 마주했다.

그렇다면 고작 살기를 이겨내지 못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건가?

그 동굴에서, 악신의 사제와 처음 마주쳤을 때와 달라진 게 무엇 하나 없단 말인가.

그런 거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미 한 번 겪어본 공포다. 이미 한 번 맛본 절망이다. 익숙하지는 않아도, 경험을 해봤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감당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 그러니까 움직여, 그리고 생각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발버둥 치면서 머리를 굴린다. 라트는 마음 같아서는 실실 쪼개고 있는 태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태자를 죽인다면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은 없다.

이 죽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변수는 단 하나, 태자뿐이다. 라트에게 주어진 패는 겨우 하나 뿐. 그렇다면 이 패를 어떻게 사용해야할까. 어떻게 이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나.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해도,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살아남는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난다면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죽을 수 없다.

그러나 추잡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해도, 라트를 살려주지 않을 상대라는 건 알고 있다.

미르차르드 후작의 정보를 생각해봐. 그가 어떤 인물이었지?

탐욕이 많은가? No.

불의를 참지 못하는 자인가? Yes.

야망이 있는 사람인가? No.

청렴결백한가? Yes.

멍청한 사람인가? No.

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국가를 사랑하는 자인가? Yes.

한 번 내뱉은 말을 무조건 지켜야하는, 기사의 신의를 가진 이인가?

Yes. Yes. Yes!

‘움직여.’

답은 정해졌다. 이제 몸을 움직이면 된다. 그러니까 움직여라. 죽음의 공포, 이미 많이 맛보지 않았던가. 대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함을 주시해본 적이 있지 않았더냐.

그러니까 움직여. 도대체 뭘 겁먹고 있는 거야? 충분히 강해졌음에도 아직도 상대를 할 수 없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나? 상관없다, 시간은 나의 편이니까. 그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가면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서, 움직여!

천리길과 같았던 한 발자국을 움직이자, 그 뒤로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고작 몸을 움직이게 됐다고 좋아할 수는 없다. 지금도 후작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5초 안에는 이곳에 도달해 저 소름끼치는 오러 블레이드로, 라트의 머리를 베어버릴 터.

“오호.”

라트가 절망의 고함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자 루만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사용하는 기술을 봐서는 분명 마법사, 마법사 중에서도 검을 다루는 어중간함의 대명사인 마검사라고 생각했는데 후작의 고함을 듣고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줄이야.

나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

“이건 위험하군.”

난생 처음 진심으로 위기를 맞이했다는 생각이 든 루만는 이마에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눈앞의 남자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시간보다, 후작이 이쪽에 도달하는 시간이 더 짧으리라고 예상하고 그를 도발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끈 거였는데, 실패인가.

라트가 태자의 등 뒤로 돌아가고, 대검을 들어 올리는 기색이 느껴지자 태자는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어?”

뒤통수에서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해지자, 루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남자는 대검을 휘두르지 않고 루만의 목에 대검을 대더니.

“태자 저하!”

“멈춰.”

다가오던 절망에게 정지 선언을 내린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이 자의 목숨은 없다.”

미르차르드 후작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태자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혹시나 자신의 실수로 태자, 차기 폐하가 되실 분의 옥체가 손상된다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충이 되고 만다.

“이 역적 놈이,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느냐!”

기사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다. 태자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다. 힘의 상하 관계는 라트가 뒤질지 몰라도, 이 대화의 갑은 라트에게 있다.

“조용히 해. 내 허락 없이 입 열면, 마찬가지로 이 자의 목숨은 없다.”

그러나 그가 지금 상하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입장인 거 같았기에 확실히 갑과 을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큭.”

미르차르드 후작은 침음을 삼키면서도, 라트의 뜻에 따라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리를 제대로 굴렸군.’

뒤에 있기에 라트는 태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작이 나타나고, 겨우 10초 남짓한 시간, 죽음의 공포와 싸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한 것도 놀라운데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을 인질로 잡을 계획까지 세웠다니.

‘여기서 어떻게 풀어나갈까.’

자신을 인질로 잡았다고 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죽일 거라면 인질로 잡을 필요도 없었다. 즉, 이 남자는 자신을 인질로 이용해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을 거다.

루만의 생각은 정확히 반은 맞았다. 라트는 이 자리에서 루만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그를 죽인다면 자신도 죽는다는 걸 알기에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까지 생각해뒀다.

“댁이 미르차르드 후작인가?”

“그렇다.”

“댁이 어째서 여기 있지?”

“폐하께서 나더러 태자 저하를 호위하라고 하셨다.”

호위라, 일국의 태자를 호위하는데는 오러 마스터나 고써클에 도달한 마법사만큼 적격인 인물이 없다.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태자를 그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태자의 호위를 하고 있는 건 국왕의 명령 때문이었다. 문제는 미르차르드 후작은 태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서 걱정과 불만이 쌓일 때로 쌓인 상황이었다.

“딱 두 가지만 질문해도 되나?”

“해봐.”

라트가 선뜻 질문을 허락하자, 미르차르드 후작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건, 너의 짓인가?”

암살자들은 당연히 아직까지 땅에 파묻혀있었고, 몇몇은 죽지 못해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그래 내 작품이다. 라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실력자다.’

후작은 라트가 당연히 마법을 이용해서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저런 섬세한 마법이라니,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저런 검을 들 수 있는 걸 보니, 근력도 상당해 보이는데.’

섬세한 마법을 사용하고, 대검을 다루는 실력자. 어중간함의 대명사가 마검사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중이떠중이의 경우다. 마검사가 상당한 경지에 오르면 마법사의 약점인 근접전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기에 그 어떤 이들보다 상대하기 까다롭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전쟁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군.’

태자도, 후작도 라트를 마검사로 오해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무색의 연금술에 대해서 모르니까. 전장에서 마법사가 위험한 이유는 원거리에서 직격하는 강력한 마법 때문이다. 그러나 무색의 연금술에는 그런 기능이 없다.

모든 게 착각, 그들의 착각에 불가하다. 그러나 자신의 상식에 붙잡혀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후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두 번째 질문, 너는 누구냐.”

“노코멘트.”

자신이 셀룬, 특히 엘리와 관계된 사람이라는 건 이미 퍼질 때로 퍼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확한 정체, 제스맹 기느투스의 두 번째 제자라는 걸 아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굳이 정체를 알려줄 필요는 없지. 적에게 정보가 넘어가서 좋은 건 없으니까.

“질문해도 좋다고 말한 건, 네놈이지 않은가!”

“질문을 하라고 했지, 대답해준다는 말은 안했어.”

후작은 허망하다는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다. 라트는 질문을 허락했을 뿐, 무조건 대답을 해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은 태자가 눈앞에서 봤던 일이기에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라 대답해줬다.

“이제 내 차례야.”

질문이 끝났으니, 이제 라트가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다. 이미 할 말은 정해졌다.

“태자와 내 목숨을 바꾼다.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무, 뭐?”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은 태자의 목숨을 팔아서 자신의 목숨을 사는 것이었다.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에 이 방법이 아니라면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

“왜 황당해하지? 굉장히 합리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네가 태자 저하를 끌고 갔다가, 저하께서 네놈에게 변이라도 당하신다면”

하아? 내가 왜 태자를 끌고 가야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일 수 없는 새끼를 끌고 가봐야, 화만 더 일어날 뿐이다.

“몇 가지 대답을 들으면, 태자를 먼저 풀어줄 생각이다.”

“태자 저하를 먼저 풀어주겠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라트를 바라보는 후작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래. 몇 가지 대답만 듣고 나서.”

몇 가지 대답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정말로 태자 저하를 먼저 풀어준다면 교환의 가치는 넘치고도 충분했다. 당장 저 악적을 처죽이고 싶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태자 저하의 목숨이었으니까.

혹시나 곤란한 질문을 한다면, 태자 저하를 풀어주는 즉시 저 남자를 죽이면 그만이다.

“이곳에 1군단과 3군단, 그리고 켈랑의 기사단까지 전부 모여 있지?”

“그렇다.”

‘역시.’

태자가 무슨 작전을 수행하고 있더라도, 셀룬의 군단을 보고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렸으면 도망을 쳤어야 했다. 그러나 태자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유유자적 셀룬의 군단에 맞서려는 중이다. 그 행동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2개 군단에 기사단. 그리고 오러 마스터까지.’

메아리치는 밀림에 들어온 군단에 속한 병사의 수는 무려 셀룬의 총 병사 수의 절반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침략하기 위한 병력의 반일뿐이다. 당연히 수비를 위해서 본토에 남겨둔 병사들이 있었다. 그에 비해 켈랑은 나라의 모든 병력을 운용할 수 있고 위급 시 징집병까지 모을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2개 군단 뿐이라지만, 승산은 충분하다.

“현재 너희 진지의 위치는?”

“끙. 저쪽에 있는 언덕에 있다.”

좋아, 적의 병력과 진지의 위치까지 알아냈다. 정보는 이걸로 충분하다.

“마지막이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뭣이!?”

라트가 필요 이상의 정보를 물어보았기에 태자를 풀어주는 순간, 그를 죽이리라고 마음먹었던 후작은 라트의 마지막 질문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맹세할 수 없다면, 태자를 죽이겠다.”

그의 당황에 라트는 몰아치듯 한 마디를 더 꺼냈고, 오러 마스터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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