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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중무장을 한 남자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오러에 휘감아져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어야할 검은 형체도 남지 않은 채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고개를 내려 어깻죽지를 바라본다. 은빛으로 빛나야할 풀 플레이트 아머는 엉망진창으로 깨져,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조금 더 고개를 내리자, 어깨부터 가슴까지 깨끗하게 베인 상처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 검신이 보였다.
“어…….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에 고개를 올려 대검의 주인을 바라본다. 투구에 가려져 그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대검의 주인은 분명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느끼고 서서히 손을 뻗는다.
“알 거 없고, 죽어.”
그러나 그 손이 닿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소름끼치는, 그러나 이제는 익숙한 살을 베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뇌까지 스며드는 걸 느낌과 동시에 기사는 시체로 변모하였다.
오러를 다루는 자나, 마법을 다루는 자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보다 잘난 이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래. 그래서 상대방이 오러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은연 중 무시하고 만다.
그게 댁의 패착이었어, 기사 아저씨. 아, 물론 안 그랬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기사님이……. 당하셨다고?”
“도망, 도망쳐라! 기습은 실패다!”
이제는 시체, 전직 기사였던 자가 매복 작전의 지휘관이었는지 켈랑 측 병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떨어져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지휘관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던 병사들도 갑자기 아군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자 상황을 파악하고 뒤로 돌아섰다.
전장의 분위기가 역변한다. 필시 조금 전까지 사냥을 당하던 입장이던 셀룬의 병사들이 반대로 사냥꾼이 되어, 도망치는 적군을 쫓는다.
라트 역시 사냥꾼 중 한 명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일 시간도 아깝다고 느낀 라트는 재빨리 도망치는 병사들의 등을 베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보병대야 아군이 알아서 잡아줄 테니까, 궁병대를 쫓자.’
골렘이 날뛰고 있는 쪽으로 뛰어가, 코어 두 개를 회수한 후 도망치는 궁수들을 쫓았다.
불화살을 쐈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파괴시켰을 나무 골렘을 어째서 지금까지 처리하지 못했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의문을 해소할 시간이 아니다.
켈랑이 이곳에서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이라는 걸 알았으니 최대한 많이 적군의 숫자를 줄여놔야 한다. 대검을 든 남자는 발걸음을 놀려, 도망치는 궁병대를 쫓았다.
*****
“망했다.”
제아무리 숲속이고, 민첩성을 중요시 여기는 궁병대라고 하더라도 타고난 민첩성이 달랐기에 라트는 무리 없이 궁병대의 목숨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망했다는 걸까?
간단하다, 적을 쫓는데 너무 열중하고 말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적을 죽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미아가 되어버렸다.
“망했어! 지리도 모르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단순한 게임 속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 펼쳐진 메아리치는 밀림은 이곳이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군단 쪽으로 돌아가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무리.
미아가 된 뒤로 무려 30분 동안 길을 해매는 중이었다. 라트가 길치인 게 아니라, 메아리치는 밀림의 지형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하는 수 없나. 라트는 눈에 띄는 언덕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금 라트가 바라보는 언덕이, 공작이 진지를 차리기로 마음먹은 언덕일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음부터는 지리가 복잡한 곳에서 나대지 말아야지.’
마음속에 한 가지 교훈을 새긴 라트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본대랑 빨리 합류 못하면 사저랑 엘리가 걱정할 텐데.’
걱정만 하면 다행이지. 열이 받은 케이네가 저번처럼 배빵을 날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엘리가 냉기를 풀풀 내뿜겠지? 루아타 공작은 딸아이를 걱정시켰다면서 갈굴 거고?
“하아.”
한숨에 섞인 담배 연기가 허공을 타고 흘러가더니 덧없이 지워진다. 내 고민도 저렇게 덧없이 지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언덕 쪽으로 가자. 거기에 아군의 진지가 없어도, 어디에 진지를 쳤는지 볼 수는 있을 거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 언덕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수풀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라트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원래라면 누가 나오던 관여치 않고 아군이라면 합류하고, 적군이라면 베어버렸겠지만, 직감이 지금은 숨어있는 게 좋다고 알려왔다.
“생존자는 너희뿐인가?”
“도망치는데 급급해서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자 저하.”
‘뭐야, 켈랑의 태자가 왜 여기 있어?’
절대로 여기 있으면 안 될 인물이 등장했다. 켈랑의 태자, 왕위 제 1후계자.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위치이지만, 목숨이 위험한 격전지에 나설 이유는 없다. 승률이 비등하다면 모를까, 적어도 이렇게 승률이 낮은 전장에 나설 필요는 없는 인물이다.
현재 메아리치는 밀림에는 셀룬의 총 군세 중 1/2의 숫자가 집결해있다. 이루크 성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뚫릴 줄 몰랐던 켈랑의 입장 상, 지금 이 상황은 불의의 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가.
‘잠깐만, 승률이 안 낮다면?’
겨우 일주일 사이에 이곳으로 군세를 모았다면? 그렇다면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사라진 제 3군단이 혹시나 이곳으로 왔다면? 그리고 수도를 방어해야하는 제 1군단과 기사단까지 이곳으로 왔다면?
비약적인 추측이기는 하나, 이곳에 왕태자가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거, 큰일이 날 수도 있겠는데.’
적의 수뇌부는 우리의 전력을 알고, 우리의 수뇌부는 적의 전력을 모른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월드 세리아가 공개되고 대략 1년 동안 그 누구도 글란츠 백작을 이기지 못했지만, 1년 6개월이 지나고 공략글이 나온 순간부터는 간간히 붉은 대지 전장에서 글란츠 백작을 이겼다는 인증글이 올라오지 않았던가.
‘전력상으로는 밀리지 않겠지만.’
아니 오히려 전력상으로는 1군단과 3군단, 그리고 기사단까지 합쳐졌다고 해도 셀룬의 군세가 켈랑의 군세를 압도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쪽에는 정보가 없다는 거지.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셀룬의 군세와 맞설 수 있는 군세를 모을 수 있었느냐다.
“쯧쯧. 우톤이 당할 줄이야. 허영심이 강하긴 해도 실력이 괜찮았던 놈인데. 우톤을 죽인 놈은 누구였나. 우톤을 단숨에 죽일 정도라면 분명 이름이 알려진 실력자였을 텐데.”
“그것이 전신을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기에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신을 갑옷으로? 흐음.”
라트가 평소와는 달리 화살을 대비해서 얼굴 부분까지 갑옷으로 두르길 천만다행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루아타 공녀 암살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태자라면 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만약 그의 얼굴을 병사가 봤더라면, 태자는 우톤이라고 불린 기사를 죽인 자가 공녀 암살을 막은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녹색 머리는 흔하지만, 녹색 머리에 백색 눈동자는 흔한 게 아니니까.
“계획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아나?”
태자는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고 있었다면 셀룬의 기사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거의 다 끝났다고 했습니다.”
“진지에 있는 미르차르드 후작에게는 들키지 않게 한 번 더 주의해라. 원래 계획이라는 건 마지막에 틀어지기 마련이니까.”
아, 그런가.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 태자가 말하는 계획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켈랑 측에서는 그 계획 때문에 메아리치는 밀림에 군대를 모았는데 하필 메아리치는 밀림을 통해 런트를 기습하려고 했던 셀룬의 군단과 마주치게 된 거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합리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루크 성에서 몇 달이라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켈랑 측에서 메아리치는 밀림에 군대를 대기시켜놨을 리가 없다. 그래서 루아타 공작과 라트가 메아리치는 밀림을 지나쳐, 런트를 기습하려는 계획에 동의한 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켈랑 쪽에서는 어떤 계획 때문에 메아리치는 밀림에 군대를 모았다.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는 상황이다.
‘미르차르드 후작도 여기 있다고?’
앞서했던 생각을 전면 수정한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공작이 어째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러 마스터가 있다면 이곳에 있는 두 군세의 전력은 비등하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적에게 있어 최악의 수를 선택했는데, 칼자루가 반대로 돌아서서 아군에게 있어서 최악의 수가 되어버렸다. 익숙지 않은 지리와 환경에서 싸우는 것도 불리한데, 거기에 오러 마스터까지 있다니.
“그런데 담배 냄새가 나지 않나?”
‘이런.’
급하게 숨는다고 냄새를 생각하지 못했다. 황급히 담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태자의 말에 그와 함께하던 두 병사도 담배 냄새를 맡았는지 주변을 경계한다.
“쥐새끼가 숨어있는 것 같군. 나와라.”
‘나오라고 잘도 나오겠다.’
겨우 세 명 뿐이지만, 라트는 섣부르게 태자에게 덤비지 않았다. 물론 알고 있다, 그를 잡는다면 훌륭한 포로가 되리라. 그러나 직감이 태자를 공격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온다.
“명령을.”
그 순간, 나무 사이에서 흑색 인영들이 차례대로 나타나 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트더러 나오라고 한 게 아니라, 저들에게 나오라고 한 거였나.
태자 한 명에 병사 두 명 뿐인 거 같았지만, 사실은 세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찾아서 내 앞으로 데려와. 물어볼 게 많으니까.”
“존명.”
흑색 로브를 입은 자들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확히 라트가 숨어있는 수풀을 바라보았다. 이미 알아채고 있었구나. 나서지 않은 건, 태자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림자 까마귀, 최정예부대.’
그들의 정체를 유추한 라트는 식은땀을 흘러내림을 느꼈다. 일전에 루아타 공녀를 암살하려고 했던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다. 한 명, 한 명이 전대 가주보다는 못해도 3명이 있다면 그와 동수를 이룰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9명이라니.’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도망칠 수는 없다. 익숙하지 않은 지리에서 추적술의 달인인 암살자를 상대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아.”
이미 어디에 있는 지까지 들켰으니, 담배를 감출 이유가 없었기에 라트는 인벤토리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고 수풀 밖으로 나왔다.
“전신 갑옷? 네가 우톤을 죽인 자인가?”
“그 덜떨어진 오러 베너렛을 말하는 거면 맞아.”
“하하하하하.”
라트의 대답에 태자는 박수를 치면서 웃는다.
“덜떨어진 오러 베너렛이라. 그래, 성격은 덜떨어지긴 했지. 그렇지만 실력은 덜떨어지지 않았다.”
오만한 성격이야, 오러 베너렛에 오른 이라면 대부분 그러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기사 중에서도 상위 10%, 재능이 없으면 오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니까. 어찌 오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 조심해라. 오러 익스퍼드급 실력자이니까.”
그렇기에 태자는 라트의 실력을 오러 익스퍼드급으로 판단했다. 그것은 실수다. 라트의 전력이 오러 마스터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오러 익스퍼드에게 견줄 만큼 낮지는 않다.
“태자 저하. 뒤로 물러나주십시오.”
태자의 판단이 실수라고 알린 것은 라트가 아닌 암살자 중 한 명이었다.
============================ 작품 후기 ============================
하루를 내리 잠만 잤더니, 페이스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거 같습니다.
대략 20시간 정도 잤어요. 최근 기운이 없고, 잠이 계속 오는 건 아무래도 수면 부족 때문이었나 봅니다. 잠이 안 와서 한 편 더 적어서 올려봐요. 내일은 평소처럼 2편을 들고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20000
P.s 혹시나 연중을 걱정하시는 분이 계실까해서 말씀드리는데. 글쟁이가 어느 독자 분과 친구에게 이 글을 연중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터, 연중은 없습니다.
P.s2 물론 위의 말은 장난이고요. 이 글 마저 연중하면 과연 내가 완결을 낼 수 있을까....과연 내가 글을 쓰는 게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만 하면 잠을 못잡니다. 최근 잠을 너무 많이 잔 이유가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을 설쳐서 그런 거에요. 제가 아무리 프로 작가가 아니라지만, 이 글 마저 연중하면 글쟁이로써 자존감이 떨어져서 다시는 글을 못쓸 거 같은 그런 생각이 자꾸만 스칩니다.
그러니 죽는 게 아니라면 이 글 완결내고, 연중 작품들도 차례차례 리메이크를 하던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