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3 / 0229 ----------------------------------------------
1부
일주일 하고도 3일의 행군 끝에 메아리치는 밀림에 도착한 라트는 시야에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대적으로 추운 북부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밀림에는 바깥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세 개의 언덕이 그 장엄함을 자랑한다.
“여기가 그 유명한 메아리치는 정글인가?”
“휘유. 듣던 거보다 더 끔찍하잖아.”
병사들은 저마다 여유롭게 잡담을 나누면서도, 굳은 표정으로 밀림을 바라본다. 모두가 익숙하지 않은 장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부담감을 느낀다. 적이 어디 있는지 낌새조차 알아차리기 힘든 곳이다. 이곳에 적이 주둔해있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반대로 이곳을 안정적으로 점령한다면, 이 밀림은 최악의 침략 요새로 변모하게 된다. 밀림 안에 있는 군사의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켈랑의 수도, 런트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켈랑 쪽에서도 생각이 있다면 분명 이 밀림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전군, 경계를 하면서 들어간다!”
당연히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귀족들은 경계를 허투루 하지 않게 주의를 요하며 우거진 나무속으로 진군한다.
“누나, 병사들 옆에 꼭 붙어있어. 알았지?”
“응…….”
케이네가 약간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자, 라트는 그녀에게 항상 병사들 옆에 붙어있으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케이네와 라트가 후미에 있다지만, 이런 곳에서는 후미의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적이 만약 기습을 노린다면, 맨 앞에 있는 자들보단, 뒤쪽에 있는 이들이 맛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테니까.
‘가장 중요한 건 언덕.’
라트 역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눈에 띄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저곳이다, 저곳을 점령하면 이 밀림의 경치를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적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군의 목적지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언덕이 될 터.
문제는 적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전제다. 세 언덕 중 하나를 차지함으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전술적인 이점은 어마어마하다. 우선 언덕을 얻는다면 기습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적이 있다면 언덕을 쉽사리 내줄 리가 없다. 내준다고 하더라도, 그 전에 기습을 한 번 가해서 피해를 주려고 들겠지.
아무리 적습을 주의하고, 대비하고, 예상하고 있더라고 하더라도 이런 환경에서는 쉽사리 기습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으, 더워.”
“여기만 남쪽 날씨 같구먼. 이대로 가다가는 쪄죽겠어.”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언덕에 거의 도달할 때까지 적의 기습은 없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적습에 주의를 하며 천천히 행군을 한 탓에 병사들은 평소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피로를 피력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수통의 물은 전부 마셔버린 지 오래다. 몇몇은 더위를 잊기 위해서 갑옷을 벗으려고 하기까지 한다.
‘안 좋은데.’
라트야 평상시에는 갑옷을 입지 않고 있기에, 그리고 일반 병사들보다야 체력이 좋기 때문에 더위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 병사들의 피로가 빨리 축적된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던 병사들이 탈진하여 허물어진다. 지금이다, 자신이 적이라면 지금까지 매복해 있다가 병사들이 지금 이 틈을 타서 기습을 가할 것이다.
“컥?!”
“매, 매복이다!”
‘역시나.’
갑옷을 벗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화살에 맞아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적습을 알리는 비명 소리에 허겁지겁 갑옷을 입고 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당황하지 마라!”
후미의 지휘를 맡고 있던 귀족이 소리를 질렀음에도 병사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다.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어도 화살 앞에서 살아남기는 힘든데, 하물며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면 말할 것도 없다.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의해 순식간에 수많은 병사들이 눈을 감는 모습에 라트는 재빨리 손을 바닥에 댔다.
“만연하라.”
지친 상태에서 당한 기습에 의해 병사들은 혼비백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글로 도망치는 병사도 있고, 동료의 시체를 방패삼아서 살려고 발악하는 병사도 있다.
무색의 연금술의 범위를 넓힌다. 후미에 있는 모든 병사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우선 구할 수 있는 사람들만 구한다. 나무가 뻗어지고, 땅이 요동쳐 근방의 모든 병사들이 몸을 맡길 수 있는 바리케이트를 만든 라트는 남은 마력을 확인했다.
바리케이트를 만드는데 소모한 마나는 대략 7천. 남은 마나는 약 3천. 마나 물약 한 병으로 회복할 수 있는 마나는 2천. 그것도 고급 마나 포션이어야지 2천이지, 중급 마나 포션은 마나를 500 밖에 채워주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무색의 연금술을 더 쓰는 건 보류.
“누나를 부탁한다.”
케이네와 연금술사들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정예 중 정예다. 이 전쟁에서 연금술사를 잃으면 장비를 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작이 세심한 배려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밀림에서 기병대를 활용하기는 어려우니까 기병대가 들이닥치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바리게이트도 만들어놨으니, 이 병사들에게 케이네를 맡길 수 있다.
기병대는 오지 못한다지만, 보병대는 아니다. 화살로 충분히 재미를 봤으니, 슬슬 보병대가 출연할 터. 전방에 있는 병사들이 지원을 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색의 연금술을 쓰는 건 보류를 해야 하니, 지금부터는 몸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안 돼!”
라트가 대검을 꺼내들자, 케이네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황급히 말리려고 들었다. 그러나 케이네가 라트에게 달려오는 것보다, 라트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더 빨랐다.
“라트!”
케이네의 목소리르 뒤로하고 연금술을 이용해 팔찌를 얼굴까지 뒤덮는 갑옷으로 연성한 후 적을 향해 내달리면서, 예상대로 이쪽을 향해 보병대가 오는 걸 확인하고 인벤토리에서 코어 두 개를 꺼내들었다.
두 개의 코어를 바닥에 던지자, 코어 안에 저장된 마력이 몰아침과 동시에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모조리 끌어당겨, 거대한 골렘으로 변모한다. 주변 사물이라고 해봐야 나무뿐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골렘이라니, 왠지 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저쪽으로 가서 날뛰어.”
약해보여도 명령에 충실한 창조물이니 믿을 수 있다.
인접한 아군이 없는 곳, 적들의 궁병이 있을 장소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자 두 체의 골렘은 들리지 않는 포효를 내지르며 천천히 지상을 밟았고 그 때마다 땅이 울린다.
“골렘? 골렘이 왜 갑자기 나타나!”
“겁먹지 마라. 불은 최대한 자제하고 나무를 부숴!”
골렘의 출현에 적들이 당황한 틈을 타, 궁병대를 골렘에게 맡기고 보병대를 향해 매섭게 질주한다.
“진정해라, 적은 소수다!”
“이,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될 수 있는 만큼 죽여라.”
“도망치는 놈들은 내버려두고 본대를 노려!”
적습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자들, 그리고 그를 진정시키려는 소수. 자국을 침입한 이들을 죽이려고 이를 가는 이들. 서로의 목적이 다른 무리들이 맞물려 혼란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사이, 남들과는 다른 목적을 지닌 남자는 묵직한 대검을 휘두른다.
일반인은 들기조차 버거워할 대검의 먹잇감이 된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눕힌다.
“뭐야 저 새끼는!”
분명 맛좋은 먹잇감이었을 터. 그러나 바리게이트가 생긴 걸 기점으로 여기저기서 반항이 일어나자 켈랑의 병사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반항하는 놈들부터 처죽여!”
그러나 전장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그 수가 미약하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생각보다 효과는 대단했다.
갑자기 나타난 두 체의 골렘 때문에 궁수진은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게 됐으며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오던 보병대 중 대다수가 발이 묶이고 말았다.
“와아아!”
기합과 함께 돌진해오는 병사의 창을 팔로 막고, 복부에 발길질을 먹여 뒤로 물러서게 만든 다음 그 목을 베어버렸다.
직감이 뒤가 위험하다는 시호를 보내자마자, 고개를 살짝 틀어 창을 피하고 창대를 잡은 후 그대로 어깨와 근력을 이용하여 창대를 꺾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병사는 인간의 근력을 넘어선 라트의 기행에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섰다. 그것이 패착, 라트가 굳이 병사를 처리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옆으로 다가오던 셀룬의 병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서서히 전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궁병대는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에 숨어있어서 그 수를 짐작할 수 없지만, 보병은 대략 4천명. 후미에 있는 모든 병사를 처리하기에는 적은 수다. 소란을 일으키고, 매복으로 최대한 많은 병사를 죽이는 게 목적인 모양이다.
“이 자는 내가 맡겠다. 2부대는 골렘을 처리하고, 나머지 부대는 적에게 응징을 가하라!”
‘뭐야 이놈은.’
라트는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중무장한 남자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필요 이상의 중무장이다. 라트의 갑옷이야 액체 갑옷이기에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저 갑옷은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이었다. 저런 갑옷은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저번에 만난 흑사제들 덕분에 자신이 아직도 약하다는 걸 체감했지만, 그래도 이름도 모르는 NPC에게 질 정도는 아니다.
이 남자에게 뺏길 시간은 없다. 최대한 많은 병사를 죽여야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아군의 피해를 줄여야 전쟁에서 이기기 수월해진다. 이번 전쟁은 물론이오, 다음 전쟁까지도.
양손에 쥔 대검이 묵직하게 종을 그린다. 평소 한 손으로 휘두르던 것과는 들어간 속도부터가 달라. 평범한 병사라면 반응조차 할 수 없겠지. 설령 반응하고 대검을 막는다고 해도, 대검에 실린 힘에 의해 무기 째로 베어질 것이다.
“흡!”
그래 평범한 병사였다면 분명 그랬겠지. 그러나 라트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는 기합 소리와 함께 육중한 갑옷을 입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민첩한 움직임으로 장검을 꺼내 라트의 검을 막아냈다.
어떻게?
라트는 놀라움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고 남자를, 정확히는 남자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 두루뭉술하지만 오러가 깃들어있었다. 오러 익스퍼드가 다루는 오러 소드처럼 날카로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러 베너렛인가?
그렇다면 자신 있게 라트의 앞을 가로막은 것도 불필요한 중무장을 한 이유도 이해가 된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면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러니까 저런 갑옷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
“왜 놀라고 있나. 내가 네 검을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켈랑 쪽의 기사인가. 귀찮게 됐다. 그냥저냥 매복한 부대가 있는 줄 알았더니, 기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사라고 함은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이를 뜻하는 단어다. 물론 베너렛에 경지에 오르지 못해 오러를 검에 담을 수는 없을 수도 있지만, 오러로 신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고급 인력이다.
그런 인력을 자살 부대에 넣을 리가 없으니, 켈랑 쪽에서는 사력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최소한, 점령당한다면 최악의 침략 요새로 변모할 수 있는 밀림을 내주지 않고 이곳에서 막겠다는 속셈이 분명하다.
“겁먹은 건가? 그럴 만도 하지.”
아직까지도 놀라움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라트를 보고, 자신이 기사라는 것을 알고 겁을 먹었다고 지레짐작한 남자는 라트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오러 베너렛, 본격적으로 검에 오러를 담을 수 있는 경지이며, 한발자국만 더 나아간다면 오러 익스퍼드에 닿을 수 있는 경지다. 베너렛 아랫 등급인 베철러야 범인이라도 죽어라 노력하면 닿을 수 있지만, 베너렛은 재능이 없다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경지다.
“편안하게 보내주마.”
그러니까 남자의 입장에서는 비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편안하게 죽음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하는 것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기사 중에서도 상위 10%에 달하는 이들 밖에 도달하지 베너렛의 경지에 오른 자니까.
그런데 그게 뭐.
“풉.”
입가를 씰룩이면서 방아쇠를 당기자, 검신 안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오랜 만에 12시 연재!...안자고 버티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흑흑흑.... 내일 오후 쯤에 한 편 더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