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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92화 (9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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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고작 두 표 차이, 그러나 그중 한 표는 가볍지 않은 표였다. 무려 공작의 표, 나아가 총사령관의 표다. 설령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이 중 단 한 명도 없다.

    “옳으신 결정이십니다, 공작님.”

    “크, 크흠.”

    세르먼트 후작은 웃음꽃을 피웠고, 피츠로이 백작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서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아들은 노골적으로 라트를 노려보았다.

    ‘이름이 프레만이라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라트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놈이 어제부터 한층 강해진 질투의 시선을 보냈기에 라트는 그의 이름을 알아두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지 대충 이해는 간다.

    후작의 제자라지만, 라트는 평민이다. 평민 주제에 공작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나아가 큰 전공을 세웠다.

    피츠로이 백작의 아들인 프레만은 엘리를 제외하면 귀족의 자제 중에서 굉장히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고 덕분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미천한 놈이 자신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이니, 주목이 사라져서 질투가 배알이 꼴리겠지.

    ‘이래서 평민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싫다니까.’

    우월주의에 빠진 귀족들은 평민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평민이 아무리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 전공의 일정 부분은 귀족이 차지하게 된다.

    아마 라트가 제스맹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후작에게 신뢰를 받고 있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귀족들은 라트의 전공을 빼앗으려고 들었을 터다.

    “하오나, 후작님. 항구 도시를 모두 점령하면 켈랑 왕국의 함대들이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더욱이 배를 통해 저희의 국토를 습격하려는 불온함 움직임을 미리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의견이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피츠로이 백작의 편을 들던 귀족 중 한 명이 피츠로이 백작의 의견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공작은 눈을 찌푸렸다.

    “켈랑 북부에 있는 항구 도시를 모조리 점령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고는 있나?”

    “겨우 하루 만에 이루크 성을 점령한 군단입니다. 북부의 도시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질 게 분명합니다.”

    하루 만에 이루크 성을 점령한 군단, 인가. 공작은 무표정으로 발언을 한 귀족을 바라보았다. 무표정이지만, 그 눈빛이 너무나도 싸늘해서 귀족은 물론이오, 공작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그대들은 이루크 성을 이리도 쉽게 점령한 것이 우리가 뛰어나서라고 생각하나보군.”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뛰어나서 이루크 성을 하루 만에 점령했나? 역사상 단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은 이루크 성을 우리가 뛰어나서 점령했다고 생각하나?”

    그 물음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법조차 견뎌내는 성벽을 그 누가 뚫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지. 저기 있는 청년이 뛰어난 능력 덕분에 우리가 이루크 성을 하루 만에 점령할 수 있었다.”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아무런 활약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귀족들이 이루크 성을 점령하는데, 러프 요새를 점령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것을 뒤집은 것은 녹색 머리의 청년. 제스맹의 제자인 연금술사였다.

    “우리 군단의 힘은 뛰어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이 뛰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들이 뛰어나서? 내가 뛰어나서?”

    현재 셀룬의 군사력은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연금술사들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핸드 캐논과 대포 같은 희귀한 장비를 다루는 병과도 있으며, 기사와 병사들도 다른 국가의 병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질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누구 덕분인가. 귀족들이 뛰어나서? 모두가 가진 재산을 탈탈 털어 육성한 사병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해서?

    아니다.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건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터.”

    대연금술사, 제스맹 기느투스 후작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셀룬의 군사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졌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누리고 있는 혜택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군단이 강하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은연 중 무시하던 연금술사가 전쟁에 가장 큰 도움을 줬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기 바쁘다. 아니, 아예 연금술사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스맹 후작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 건, 세르먼트 후작 브로켄 후작뿐이더군.”

    단 몇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다시 한 번, 공작은 싸늘한 눈빛으로 회의장에 있는 귀족들을 응시한다. 통솔 중인 군단이 강한 원인을 모르고, 그저 있는 힘을 믿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다시 말하지. 맹수굴로 들어간다. 이건 총사령관으로써의 명령이다. 반론은 받지 않겠다. 다들 나가서 진군 준비를 하라.”

    그 말을 끝으로 회의는 막을 내렸고 귀족들은 고개를 떨군 채 공작의 명에 따라 진군을 준비하기 위해 막사에서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공작이 자신더러 여기 남아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라트도 마찬가지로 막사 밖으로 벗어났다.

    다른 귀족들이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만, 통솔할 병사가 없는 라트는 그들과 달리 여유롭다. 그런 라트의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네, 후작 대리.”

    세르먼트 후작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라트에게 감사를 표하자, 라트는 손사례를 쳤다.

    “저야말로 스승님의 노고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르먼트 후작님.”

    브로켄 백작과 함께 유이하게 제스맹의 노고를 알아준 이다. 수명을 깎아먹으며 이 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스승님의 고생을 알아준 이다. 그에게 감사받기보다는, 자신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맞았다.

    “껄껄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네. 기느투스 후작님께서 이 정도 군사 물품을 지원해주셔서, 전쟁을 쉽게 풀어나가는 중이 아닌가.”

    “당연한 일이라지만, 다른 분들은 그걸 모르십니다.”

    “어리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도 십 년 정도 젊었다면, 군사력의 강함에 흥분해서, 당장 켈랑을 정복하자는 혈기를 이기지 못했을 걸세. 그랬더라면 후작님께 감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상대보다 더욱 뛰어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더욱이 상대는 오래 전부터 셀룬의 라이벌이었던 켈랑이다. 다들 켈랑을 정복하고 싶은 혈기에 다른 곳을 보지 못할 뿐이다.

    아마도 공작이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느투스 후작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을 터.

    “나는 자네에게 감사를 듣는 것보다, 사과를 하고 싶군.”

    사과? 어째서? 라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르먼트 후작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고마움을 표할 때보다 그의 고개가 더 많이 내려간다.

    “기느투스 후작님을 제외하면, 경의를 표할 연금술사는 없다고 생각했다네. 후작 대리와 후작 대리의 사저가 전쟁에 참가한 것도, 탐탁지 않았네.”

    그리고 고백한다. 대연금술사라는 칭호를 받은 제스맹을 제외한 다른 연금술사는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연금술이라는 학문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스맹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유는 아무리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해도, 그 학문의 끝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연금술에 의해 병사 한 명 한 명이 타국의 병사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하다.

    “나이가 먹어서 고지식해졌는지, 연금술사를 얕봤다네. 그러나 자네의 사저가 금이 간 장비를 즉석에서 고쳐주었지. 자네는 이루크 성을 점령했고. 그래, 자네 혼자서 말일세.”

    눈앞의 청년은 연금술을 사용해서 난공불낙의 성을 함락시켰다. 혼자서, 그래 혼자서다. 성문이 열린 순간, 성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게다가 청년이 안쪽에서 소란을 일으킨 덕분에 성벽 위에 병사들이 갈팡질팡한 덕분에 아군의 피해는 거의 전무했다.

    “자네와 경의를 표하네. 그리고 연금술사에게 경의를 표하겠네, 후작 대리.”

    그래서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단순히 라트라는 연금술사에게 경의를 표한 게 아니다. 일국의 후작이 제스맹, 케이네, 라트 나아가 이 전쟁 때문에 수많은 고생을 했을 연금술사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후작에게 똑같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라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늙은이는 공작님의 명령대로 진군 준비를 해야 하니, 이만 실례하겠네.”

    길다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나자 세르먼트 후작은 자리를 떠나 분주한 걸음으로 자신이 통솔하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세르먼트 후작님께 인정을 걸 축하해.”

    어느 사이에 막사 밖으로 나왔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는 박수를 치며 라트에게 축하를 보내왔다.

    “곤란했지?”

    그리고는 갑자기 곤란했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의 의미를 알기에 라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갑자기 라트에게 투표를 하라고 하자, 공작을 포함해서 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서 얼마나 곤란했는가.

    “사전에 말을 못해줘서 미안. 이미 메아리치는 밀림으로 들어갈 생각이셨으면서, 너한테 그런 질문을 하실 줄은 몰랐어.”

    “좀 당황스럽기는 하더라.”

    역시나 공작은 이미 뜻을 결정한 모양이다. 단지 관례상 다른 귀족들의 뜻을 듣기 위해서 회의를 열었던 것뿐인가. 그러나 엘리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작이 자신에게 투표를 하라고 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

    “저기 라트. 밀림은 어떤 곳이야?”

    “숲보다 나무가 우거져있고. 습기 때문에 늪지대가 있어. 게다가 사방에 벌레들이 있지. 밀림에서 밖에 볼 수 없는 몬스터도 있고.”

    메아리치는 밀림이라.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게임에서는 자주 갔던 장소다. 전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메아리치는 밀림에서만 채집할 수 있는 약초 때문에 자주 갔었다. 과연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웩. 듣기만 해도 싫어지는 장소네.”

    라트의 설명만 들어도 정이 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했는지, 엘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벌레가 많은 장소를 여자가 좋아할 리가 없다.

    ‘쟨 또 노려보네.’

    엘리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자 프레만이 라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아까보다 질투가 더 짙어진 것 같다. 설마 엘리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헤헤헤.”

    시험 삼아서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는 행복하다는 듯 웃었고, 프레만은 질투를 넘어서서 살기까지 보였다.

    하기야 엘리는 아름다운 아가씨니까, 질투를 하는 것도 같은 남자로써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또 저러고 있네.”

    라트의 손길을 느끼던 엘리도 노골적으로 살기를 내뿜는 프레만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혀를 찼다.

    “아는 사이야?”

    “4년 전에 나한테 구혼했었어. 피츠로이 백작이 아버님과 긴밀한 관계가 되길 원했거든. 프레만이 나한테 관심이 있기도 했고.”

    4년 전이라면, 성년이 되기 전에 구혼을 했었다는 건가.

    “내가 싫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거절하셨지만.”

    그렇구나, 그렇다면 처음 봤던 날에도 라트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라트가 엘리의 목숨을 구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관심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손에 구해졌고, 더욱이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보이고 있으니 살기가 섞인 질투를 보낼만하다.

    “4년 전에 구혼을 받았으면, 지금도 구혼하는 귀족이 있는 거 아니야?”

    “있어. 많지. 그렇지만 나한테는 라트 뿐이니까, 전부 거절했어.”

    “너, 잘도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한다.”

    라트의 말에 엘리는 뭐가 낯부끄러운 소리냐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뭐, 공작이 인정해준 연인 관계이니 부끄러울 게 없긴 하다.

    “아, 맞다. 할 것도 없는데 가서 누나 좀 도와줘야겠어.”

    “그렇게 해. 언니 고생 많이 하더라.”

    엘리야 공작이 보호를 겸해서 전쟁에 데려온 것이지만, 케이네는 이곳에 있는 모든 연금술사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서있다. 파손된 장비를 고치는 것은 물론이오, 귀족들이 위급 시에 마실 포션을 준비하느라 굉장히 바빴다.

    스승님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케이네가 나날이 피로에 찌들어가는 중이다. 엘리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별다른 시샘 없이 어서 케이네에게 가보라고 말하더니,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막사 밖으로 나온 건 그저 라트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가 보다.

    ============================ 작품 후기 ============================

    낮잠좀 잔다고 오후 3시에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보니 새벽 1시. 이게 무슨.......허허허허.....뒤늦은 수술 후유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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