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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88화 (8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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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오러 마스터는 한 왕국에 한 명이나 있을까싶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자다. 실제로 핀스크 왕국과 차리친 왕국에는 오러 익스퍼드에 오른 기사는 있었지만, 오러 마스터에 오른 자는 없다.

    제국에는 그렇게 희귀한 오러 마스터가 5명이나 있었지만, 제국은 다른 왕국에 비해 땅 덩어리부터가 차원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설마 남부로 내려간 겁니까?”

    남부는 지리적으로 항구가 모여 있지 않은 곳이니, 상대적으로 북부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아니, 남부에서도 미르차르드 후작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공작의 가신 중 한 명이 대신해서 대답하자, 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도대체…….”

    “그건 나도 알고 싶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중에 행적을 감춘 후작이라.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나, 일부로 행적을 감추고 기습을 노리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던, 이루크 성을 공략하기에는 수월해졌다.

    “그럼 제일 주의해야할 인물은 쿠룬 백작이네요.”

    쿠룬 백작은 오러 익스퍼드의 경지에 오른 기사다.

    “그렇다. 그러나 분명 감시 마법이 발동되고 있을 것인데, 정말로 아무런 지원도 필요 없나?”

    “예.”

    난공불낙의 성 안에 있는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을 소모해가면서 감시 마법을 펼치고 있지는 않아.

    바깥에서 시선을 끌어줄 필요조차 없다. 아주 조용히, 성 안으로 잠입하면 그만이다. 잘 된다면, 공성전이 하루 만에 끝날 수 있다.

    “자신만만하군.”

    자신만만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현실에서야 처음 겪어보는 일이지만, 이루크 성에서 공성전을 치루는 건 수도 없이 많이 겪은 일이다. 어떨 때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어떤 때는 수비하는 입장에서.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이루크 성에 있는 이들이 성벽을 굉장히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조차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이루크 성의 성벽을 그토록 맹신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통한다. 성벽을 맹신하는 자들이기에 안쪽에서 누군가 잠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겠지. 라트라고 해도, 무색의 연금술을 알지 못했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위험하면 도망쳐라.”

    “염려해주시는 겁니까?”

    “당연하다. 자네는 제스맹의 두 번째 제자이며, 친손자 같은 이니까.”

    스승 때문에 공작이 저리도 염려하는 것이었나. 어쩐지 정말로 지원이 필요 없는 지 재차 확인해보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확실히 내가 죽게 내버려둔다면 루아타 공작은 스승님께 어마어마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겠지.

    또한 서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신분을 떠나서 지금은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 딸 아이를 가졌는데, 죽어서는 곤란해.”

    “네?”

    “아, 아버님!”

    어, 잠시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왜 그런 말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하시는 건데요.

    “어, 어떻게.”

    당황으로 인해, 말이 떨리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솔직히 그렇다.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은 엘리와 라트의 비밀이었으니까. 그래서 설마 공작이 저런 말을 예고도 없이 내뱉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나 공작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신들은 아무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키득키득 웃으며, 라트를 바라볼 뿐이다.

    “나이에 안 맞게 냉철하면서, 이럴 때보면 그 나이 또래 반응이란 말이야? 안 그렇습니까, 주군?”

    반응을 보니, 공작은 물론이오, 그의 가신들도 라트와 엘리가 맺어졌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리가 직접 말이라도 한 건가? 아니, 엘리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에라, 이놈아. 우리 중 가장 늦게 들어온 요 녀석도 아가씨가 어릴 때부터 지켜봐왔다. 네가 떠나고 아가씨가 진짜 숙녀가 됐다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 성 싶으냐?”

    “아, 수석 마법사님. 저 좀 막내 취급 하지 말아주시지 말입니다. 주군을 모신지 15년이나 됐지 말입니다.”

    “그래서 니 짬이?”

    “닥치겠습니다.”

    가신 중에서 제일 젊어 보이는 이가 수석 마법사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곧바로 입을 다문다. 그 외에도 다른 가신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중이나 라트를 비난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엘리의 행복을 바라고, 하물며 몇 번이나 그녀의 목숨을 구한 라트이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딸아이의 선택이니 뭐라고 타박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운명의 실로 엮인 사이니까.”

    운명의 실이라는 단어에도 가신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일렀을 뿐,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지. 다만.”

    공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라트를 응시하기를 잠시, 그의 입이 열렸고.

    “혼전임신은 자중하도록.”

    “아빠!”

    “쿨럭.”

    충격적인 발언에 목이 막혀서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엘리도 당황한 나머지, 평상시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아빠라는 호칭까지 내뱉었다. 아니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공작의 팔을 때리고 있는 중이다.

    “콜록, 콜록.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까지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귀여운 폭력을 행사하는 중인 딸을 바라보며 자상한 웃음을 짓는 공작. 그리고 그런 엘리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가신들.

    한 눈에 봐도, 엘리가 얼마만큼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공을 세워라.”

    오랜만에 딸아이의 투정을 마음껏 받는 중이기에 공작은 엘리에게 채통을 지키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라트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전쟁에서, 내 딸의 남편 자리에 걸 맞는 공을 세워라. 아니 될 수 있다면 내 딸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을 세워 줬으면 좋겠군.”

    공을 세워라, 그것은 서로의 목적이 같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연금술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라트가 활약하는 모습도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라트가 공을 세워야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래야, 도둑놈이 조금 예뻐 보일 거 같다.”

    “푸하하하하!”

    “하하, 도둑놈이라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주군!”

    “으으으으!”

    그들 입장에서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데, 사랑스러운 딸을, 어릴 적부터 지켜왔던 아가씨를 빼앗은 셈이니. 도둑놈이라는 호칭은 그야말로 절묘하기 그지없다.

    “따르겠습니다.”

    “그걸로 됐다. 나가보도록, 도둑놈.”

    “아빠아아아!”

    엘리의 원성이 메아리쳤지만, 라트는 그것을 무시한 채 밖으로 나가서 한동안 웃었다. 이렇게 진심으로 유쾌하게 웃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

    “터무니없네.”

    다음날, 오후. 이루크 성의 위용을 목도한 라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게임 상에서야 몇 번이나 봐왔던 성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압감이 달라.

    별다른 장비도 없는 인간이 이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성벽과 그 뒤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산맥. 천혜의 요새라는 건 바로 이런 성이 아닐까.

    병사들은 지시에 따라 진지를 세우느라 정신이 없다.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공성전, 적의 기습을 막고 편히 쉴 수 있는 진지를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오늘 안에 끝날 수도 있지만.’

    혹시나 라트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진지를 세우고 있는 중이지만, 라트는 딱히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보겠습니다. 문은 밤중에 열겠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지.”

    공작에게 작전을 시행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첩자가 숨어있을 수도 있었기에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걸어가서 땅에 손을 댔다.

    “만연하라.”

    한 손에 랜턴을 들고, 무색의 연금술을 이용해 땅굴은 판다. 그렇게 넓게 팔 필요는 없다. 아주 조그맣게,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파면 그만이다. 굳이 땅굴을 넓게 파면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하게 된다.

    라트가 생각해낸 작전은 간단하다. 무색의 연금술로 땅굴을 파서 성에 잠입해, 성문을 여는 것.

    ‘에스페를 만난 게 천운이었어.’

    토 속성을 다루지 못했더라면 생각도 못했을 작전이었다. 만약 에스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몇 달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천혜의 요새를 천운 덕분에 공략할 수 있다. 제법 웃기지 않은가.

    “만연하라.”

    단숨에 성까지 이어지는 땅굴을 팔 수 없기에 중간 중간 계속해서 땅굴을 이어간다. 마법은 이런 섬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일반 병사들도 땅굴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이런 땅굴을 만드는데 몇 달이 걸릴 거다.

    그렇다면 적이 낌새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농후하지. 그러니까 이 작전은 오로지 라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후우.”

    중간에 산소가 부족해짐을 느끼자 담배를 태워서 생명의 연금술로 공기를 만든다. 이런 활용법을 따지고 보면 생명의 연금술은 단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한다면 활용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사정거리가 지나치게 짧은 게 문제지.’

    생명의 연금술의 문제점은 사정거리가 너무 짧다는 거다. 폭발을 일으킨다던가, 허공에 강철을 만들어서 상대를 짓누르는 등 공격 방법도 상당히 많지만, 연성할 수 있는 거리는 담배 연기가 퍼져나가는 거리, 3m가 채 될까 말까한 거리다.

    물론 그런 약점까지 고려해서, 전투에 어떻게 써먹을지도 생각을 해놓기는 했지만.

    “만연하라.”

    다시 한 번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해 땅굴을 판다. 거리감각으로는 이제 겨우 반이나 도착했을까? 관찰력 기능 덕분인지, 거리감각과 방향감각은 신뢰할 수 있었다.

    “후우.”

    무색의 연금술로 땅굴을 파고,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면 생명의 연금술로 산소를 만들고 호흡한다. 오로지 연금술, 연금술로 인해서 천해의 요새가 손쉽게 뚫린다.

    라트의 성과를 스승이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놀라워하실까? 기뻐하실까?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마력이 슬슬 부족해지자 마나 포션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무색의 연금술과 생명의 연금술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하며 이루크 성으로 다가간다.

    성벽을 과신한 나머지, 보통 성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을 해자가 없는 성이기에 이번 작전을 결행할 수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해자는 안 만들겠다.’

    무려 1만여 가지의 방어 마법. 만 명의 마법사가 수고를 들인 성벽이다. 어찌 과신하지 않을까. 인간이 이룩한 업적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그런 성벽인데, 어찌 자신만만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과신이, 그 자신이 독이 되어 숨통을 조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이쯤이면 다 온 거 같은데.’

    약 1시간에 걸쳐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한 끝에 이루크 성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트는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담배를 태웠다.

    명상을 통해 회복 속도가 빨라진 마나로 생명의 연금술을 이용해 공기를 만든다.

    지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첩자 문제를 고려해서 이른 시간에 먼저 성 바로 아래로 침입했다. 이제는 밤이 될 때까지 여기서 버티다가, 조용히 성문을 열면 된다.

    그렇게 몇 시간 후, 태양이 지고 찬란한 별빛이 떠오른 밤. 라트는 감았던 눈을 뜨고 이루크 성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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