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82화 (82/229)

0082 / 0229 ----------------------------------------------

1부

동굴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음에도 라트는 쉽사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몸에 힘이 빠진다, 식은땀이 전심을 뒤덮는다.

‘살았다.’

당장은 살았다는 것에 안도하여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안도와 함께 허탈함이 찾아왔다. 튜토리얼 기간 때 레벨 업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어지간한 상대는 이길 수 있다고 자만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들 중 한 명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는 없겠지만, 도망칠 수는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시리아가 살기를 내보이는 순간, 그것이 오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망? 웃기는 소리 집어 쳐라. 저들을 상대로 몇 분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망은 무리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면, 텔레포트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오러를 다루는 이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약하고, 마법사처럼 이동 마법을 쓰지 못하는 연금술사인 이상 그들에게 도망칠 방도가 없다.

“하하.”

입에 쓴맛이 도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웃는다.

‘빌어먹을.’

이윽고 찾아온 것은 분노. 그 파도를 감내하지 못하고 벽을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2년 전 축제에서 엘리를 노리던 인신매매단을 상대했을 때 느낀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는다.

왜 내가 안도한 거지? 죽음을 피할 수 있어서? 그들과 싸우지 않아도 돼서, 그래서 안도했다고?

고작, 고작 첫 번째 메인 퀘스트의 중간 보스를 상대로?

“빌어처먹을…….”

다시 한 번 바위벽을 내리치자 벽은 허무하게 부서졌다. 그 앞에는 누구도 없어, 적막함이 남자를 맞이해준다.

지금의 나는 아직도 약하기 짝이 없다. 뭐가 오러 익스퍼드 정도는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오러 마스터를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니. 그야말로 자만이고, 오만이지 않은가.

어쩌면 무색의 연금술을 배운 직후, 안이해졌을 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고, 연금술사는 사실 강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결국은 생산직. 똑같은 방식으로 성장한다면 전투 계열 직업보다 약한 건 자명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레벨이 더 오른다면, 희귀 기능의 레벨이 오른다면, 완전한 무색의 연금술을 배울 수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

오늘 느낀 굴욕을 되갚아줄 날이 올 거다. 자신을 감히 쥐새끼라고 부른 여자를 처리할 수 있을 터다.

“이대로는 안 돼.”

그러나 지금까지 만난 상대가 너무나도 약했기에, 무려 그림자 까마귀의 전 단주를 막아섰다는 이유를 들어 해이해졌다.

처음 이 캐릭터를 만들 때, 트롤 캐릭터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실을 변하지 않아. 무색의 연금술과 생명의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배틀 알케미스트는 원판 자체가 쓰레기인 직업이다.

트롤 캐릭터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캐릭터와 동등한 효율을 내려면? 간단하다, 그들보다 몇 배로 노력하면 된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저들을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이 상태로 갔다가는 아마도 흑마법사들의 수장을 만나는 순간 그대로 게임 오버를 당했을 테니까.

“돌아가자.”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리오스가 걱정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벽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분명 어둠의 은총 아래 만개했던 그림자 꽃들이 시리아의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모두 시들어 있는 모습에 라트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자신의 몰아붙이던 붉은색 살기를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식물이라지만, 살아있는 것을 살기만으로 죽일 수 있다니.

“하아.”

결국 마지막에 찾는 것은 담배였다. 인벤토리에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든 라트는 불을 붙이고, 폐 속 깊숙한 곳까지 니코틴이 돌 수 있게 연기를 빨았다.

‘이거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담배 연기를 세 네 번 빨았을까? 라트는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담배와 라트의 속은 점점 타들어가는 중이다.

터덜터덜 동굴 밖으로 나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라트는 에스페가 살고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째서 회색의 연금술사를 쫓고 있는가. 이야기를 듣자하니, 무색의 연금술을 익힌 자의 기운을 쫓는 나침반이라는 물건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아이템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그들이 어째서 회색의 연금술사를 쫓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어째서 자신이 만나야할 NPC 중 1순위에 꼽히는 회색의 연금술사가, 하필이면 흑사제들에게 쫓기고 있는 걸까.

과연 왕국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가 도망치고 있을 수 있을까?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건, 꽤 나중에 일어나겠는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지 포기하고 회색의 연금술사를 쫓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노르스 대륙에서 카르세이나 대륙으로 가려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제국 반란 퀘스트의 시작이 늦춰질 것이고, 나아가 두 번째 메인 퀘스트의 시기도 늦춰졌다.

어쩌면 반란을 일으킬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회색의 연금술사를 찾는 일을 그만두고 반란에 집중할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 변수으로 인해 회색의 연금술사는 안전해진 셈이다.

‘좋은 일인가?’

조건을 만족했던, 만족하지 못했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메인 퀘스트는 결과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회색의 연금술사의 안전을 도모한 것은 물론이오, 진 엔딩을 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기 위한 시간을 번 셈이니 좋은 일이라고 할 법했다.

‘문제가 있다면 제국 반란 퀘스트에 내가 모르는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인가.’

반대로 왕국 전쟁은 모를까. 제국 반란은 초장부터 변수가 생겼으니, 라트가 알고 있는 상황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어지는 다른 메인 퀘스트도…….

“후우.”

착착한 마음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를 뱉고, 인벤토리에 담배를 열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어느 사이에 현자의 집은 코앞에 있었다.

“오, 왔는가. 그대.”

“오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스페와 리오스가 태평한 모습으로 라트의 귀환을 맞이해준다.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 전까지 겪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분명 여왕님이라고 했지?’

라트는 잠시 에스페의 모습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그 연놈들이 말했던 여왕이라는 자는 아마도 에스페를 가리킨 단어일 것이다. 이 근방에는 에스페를 제외하면 살고 있는 이가 없다고 알고 있으니까.

“그대여, 왜 그렇게 본량을 쳐다보나. 혹시 본량의 본 모습이 궁금한 것인가?”

라트의 시선을 느낀 현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구나. 본량은 본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다.”

‘말이나 하지 말던가.’

현자는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타이트한 로브로 온 몸을 감싸고 있으며, 장갑까지 끼고 있기에 그 정체를 추측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오빠, 물 마실래?”

“응? 아, 고마워.”

리오스가 건넨 물을 마신 라트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 전 겪은 상황을 에스페에게 말해야 하나? 회색의 연금술사가 흑사제에게 쫓기는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 모른다. 직감이지만, 라트는 에스페가 그 답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흑사제를 만났다는 말을 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까지도.

“그림자 꽃은 가져왔나?”

“여기.”

인벤토리에서 꺾어온 그림자 꽃을 꺼내자, 현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림자 꽃을 가지고 석판이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그러더니 그림자 꽃 한 송이를 유리병에 담고 천장에 있는 여러 가지 시약을 섞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포션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시약을 섞고 유리병을 관찰하던 에스페는 원하는 반응이 나타났는지 유리병을 들어서 석판 위에 떨어트렸다.

그 모습을 가까이 보기 위해서, 들고 있던 컵을 근처에 있는 탁자 위에 놔두고 책상 쪽으로 걸어간다.

“좋아.”

완성된 시약을 석판 위에 떨어트리고 종이 위에 올린다. 그러자 잠시 후, 석판의 그림자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모습에 조금 거부감이 든다. 리오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라트의 뒤로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스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종이 위를 기어 다니는 그림자의 모습에 오히려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추자 석판을 옆으로 치우고 종이를 들어올린다.

“보자꾸나, 보자꾸나.”

노래처럼 리듬을 맞춰 말하며 종이를 지긋이 관찰하던 에스페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 설마 모르는 문양이야?”

“아니 그것이 아니라.”

침음을 삼킨 현자는 라트를 향해 종이를 내밀더니, 흐릿하게 보였던 문양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문양은 말이다, 인간이 모시는 다섯 신을 의미한다.”

인간이 모시는 다섯 신을 의미한다고? 고작 조각 하나에, 다섯 신을 담은 의미를 넣었다는 거야? 그럼 다른 조각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담긴 문장이 새겨져있는 거지?

일단 확실한 건, 악신과 관련된 석판은 아니라는 점인가.

“그러니까 신과 관련된 문양인 건 확실하지만, 정확히 이 석판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결국, 석판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건가. 라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여기서 더는 시간을 소비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 셀룬으로 돌아가서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었으니까.

원래는 뒤에서 암약하며 오미너스의 피를 막을 생각이었지만, 내가 아직도 약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차라리 전쟁에 참여해서 경험치와 공헌도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책상으로 다가가 석판을 집으려고 했지만, 에스페가 한 발 먼저 앞서 석판을 집어들어 껴안았다. 뺏기지 않겠다는 매우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지금 당장은, 이라고 했다. 앞으로 연구를 하면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이제 셀룬으로 돌아가야 해.”

물론 지금도 졸개들만 깔짝깔짝 죽이는 거라면 충분히 뒤에서 활약할 수 있다. 그러나 리오스를 데리고, 그런 여행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좋던, 싫던, 셀룬으로 한 번 돌아가기는 해야한다.

“그렇다고 이 석판을 너한테 맡기고 갈 수는 없어.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거든.”

“뭔지 알 수도 없는 이 석판이 중요한 물건이라고?”

“그래.”

진 엔딩을 보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인 석판이다. 아마도 두 번째 조건은 이 석판의 조각을 전부 맞추는 것일 터.

라트의 확답에도 석판을 내주지 않은 채, 잠시 고민을 하던 에스페는 이내 명쾌하게 말한다.

“그럼 본량도 그대와 함께 셀룬으로 가도록 하지.”

“뭐?”

“어차피 그대 혼자서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지 않느냐. 본량이 거처를 셀룬으로 옮겨, 석판을 조사하도록 하마.”

“언니도 저랑 가는 거예요?”

“그렇다, 기쁘지?”

“네!”

리오스는 어째서 기뻐하는 건가. 설마 단 둘이 있던 그 짧은 시간에 둘이서 친해지기라도 한 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숲의 현자는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이 숲에 정착하여 지식을 탐구하는 NPC다. 그런 NPC가 고작 석판 하나 때문에 거처를 버리고, 속세로 나서려고 하다니.

“오랜만에 탐구할 수 있는 물건이 찾아왔다. 본량이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성 싶은가.”

탐구라는 게 그렇게도 즐거운 건가. 라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 뭐, 좋아. 좋은데. 과연 여기서 셀룬까지 여행하는 걸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셀룬으로 급히 가려는 이유는 여기서 셀룬까지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라이 왕국은 대륙의 남서부, 셀룬 왕국은 대륙의 북부에 위치한 왕국이다.

전쟁 때문에 포탈을 이용할 수도 없고, 국경을 넘는 것도 까다롭기 그지없다. 적어도 8개월, 어쩌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른다.

“본량이 그대와 함께 간다면, 그 문제도 해결해줄 수 있다만.”

“음? 어떻게?”

“어떤 마법사에게 빚을 지워놓은 게 있어서 말이야. 수도인 파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외각의 성까지는 텔레포트 시켜줄 수 있을 터.”

미친, 사라이에서 셀룬까지 텔레포트를 시켜줄 수 있는 마법사라고? 그럼 적어도 7서클 아니, 8서클은 되야 하잖아. 8서클에 들어선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아크 메이지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위대한 마법사이지 않은가.

그런 자에게 빚을 만들어놨다는 건가.

“본량이 이리도 유능하다네.”

라트가 놀랍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자, 에스페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쭉 폈다. 여자가 저런 포즈를 취하면 필히 가슴이 강조되기 마련이었지만, 슬프게도 에스페의 그것은 평평하기 그지없었다.

“그대여, 왠지 불손한 눈으로 본량을 바라본 것 같다만?”

“착각이야, 착각.”

바라본 건 맞지만, 불손한 눈이 아니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으니 착각이 맞겠지.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라트는 에스페와 함께 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 마법사가 정말로 셀룬까지 텔레포트를 시켜줄 수 있다면 약 1년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었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