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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포탈을 이용해 다른 도시에 도착한 라트는 은행에 들려서 백작이 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꾼 후, 우체국에 들려서 곧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엘리와 케이네에게 남기고 여행길에 나섰다.
낮에는 길을 따라 달리고, 밤에는 근처에 보이는 마을에서 쉬는 일을 반복하기를 일주일. 드디어 목적지인 산에 도착하자, 라트는 리오스를 말에 태우고, 마차를 버려둔 채 산길을 올랐다.
“리오스가 걸어도 되는데.”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말에 타고 있는 리오스를 바라보니, 청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물기에 머금은 것 같다. 왠지 귀도 좀 늘어져있는 거 같고.
“리오스보다는 오빠 몸이 더 튼튼하니까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치만.”
“이럴 때는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야.”
여린 소녀에게는 그게 어울린다. 사죄를 표하는 것보다, 귀엽게 웃으면서 감사를 표하면 그만이다. 그 귀여운 미소를 보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고 피로가 싹 가실 정도다.
“그, 가, 감사합니다아.”
‘아.’
수줍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어째서 남자가 딸자식이 생기면 딸 바보가 되는 지 알 수 있었다.
루아타 공작도 딸 바보라고 할 수 있나? 딸이 죽는 경우에는 미쳐버리고, 딸이 죽지 않았음에도 그런 분노를 보였으니 충분히 딸 바보라고 할 만 하긴 한데.
‘평상 시 엘리를 대하는 걸 보면 딸 바보가 아니라, 그냥 엄격한 아버지란 말이야.’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계속해서 산길을 오른다. 길이 해깔릴 때마다, 무색의 연금술로 나무의 꼭대기에 올라 시야를 계속해서 확인한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 걸어서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와아!”
라트가 손을 하늘 위로 올리자, 리오스도 그 행동을 따라한다.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옆으로 조금만 가면 강가 보이는, 집을 짓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조건의 장소. 그 옆에 조그마한 텃밭이 보이는 초록색 지붕에 나무로 만든 벽과 창문이 있는 집의 모습에 리오스가 입을 벌렸다.
“오빠, 엄청 예쁜 집이야.”
“그러네. 자, 내리자.”
리오스를 안아서 땅에 내려준 라트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말을 묶은 후 소녀의 손을 잡고 집 앞으로 걸아 가서, 살며시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설마 집을 비운 건가? 게임에서야 숲의 현자가 이 집에서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나무와 나무가 마찰하는 정겨운 소리와 함께 문이 살며시 알렸다.
“들어오라는 건가?”
문이 열린 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문을 열어준 게 분명하다. 이건 분명, 들어오라는 뜻이겠지? 불안을 지우고 리오스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태양이 질 시간임에도 집 안은 마법으로 만든 랜턴에 의해 대낮처럼 밝았다. 집 한편에 놓인 침대와 책상. 그 외에는 수많은 서적이 빼곡하게 꽂아져있는 책장만이 즐비하다.
조금 타이트한 녹색 로브를 입은 자는 책장 사이에서 책을 찾아보고 있다가, 라트와 리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마법인가?
그게 아니면 로브의 효과인가. 분명 로브의 모자는 얼굴을 반 정도 밖에 가리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에 가려진 듯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로 본량(本良)을 찾아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왔느냐?”
“너 여자였냐!?”
녹색 로브를 입은 자의 음색이 확실한 여성의 하이 톤, 그것도 굉장한 미성이었기에 라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분명 남자, 그것도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숲의 현자가 여자라니. 그것도 목소리로 따지면 젊은 여성이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실례라는 걸 깨달은 건,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라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도움을 청하러 온 이에게 실례를 저지르다니. 이건 분명한 자신의 실수다.
“흐음, 재미있구나.”
라트의 실수에, 그리고 사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녹색 로브의 여인은 책을 찾는 행위를 그만두고 흥미롭다는 듯, 라트는 바라보았다.
“왜 본량을 남자라고 생각했지?”
“아니, 그게.”
당연히 게임 상에서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라트는 숲의 현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내려서,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없다, 여자라면 분명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어.
조금 타이트 하게보이는 로브를 입고 있음에도, 그 흉부는 태초부터 무엇도 없었다는 마냥 평평했다. 잠시 빨래판이 연상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보통 현자는 영감님이라서요?”
“어째서 본량의 질문에 의문으로 답하는가.”
그거야 게임에서 댁을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아마도 숲의 현자에 대한 소문을 조금이라도 조사하고 갔다면 숲의 현자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온 것이 실수였다.
잠깐만, 게임 상에서는 아무리 숲의 현자 키워드로 조사해도 숲의 현자의 성별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럼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NPC가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인가?
“허참, 어이없는 인간이로다. 음?”
라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숲의 현자는 혀를 차더니 이내 라트의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 엘프구나.”
“에? 언니, 어떻게 알았어?”
분명 머리카락을 이용해 귀를 가리고 있었음에도, 단숨에 자신이 엘프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리오스가 놀랍다는 듯, 숲의 현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라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리오스가 귀엽다는 이야기야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그녀가 엘프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를 여행하는 엘프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상식의 괴리감을 이용해서 리오스를 데리고 다니는 중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고얀지고. 어린 아이야, 본량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그러나 현자는 리오스의 의문에 답해주는 것보다는 소녀를 꾸중했다.
하기야, 젊은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말하는 걸 봐서는 라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어린 리오스에게 반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그러나 리오스가 나쁜 의도로, 혹은 예의가 없어서 다짜고짜 반말을 한 건 아니다. 어린 아이의 특유의 애교였을 뿐이고, 라트가 지난 4개월 동안 그것을 묵인해왔기에 반말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죄, 죄송해요오.”
그렇기에 리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울먹였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니까. 조금, 친밀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것이 꾸중이었으니, 울먹일 만도 했지.
그러나 상대는 숲의 현자, 울먹이는 건 통하지 않고 더더욱 호되게.
“아니 그, 울라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으, 잠깐만. 사탕이라도 먹겠느냐?”
아니 잠시만요? 현자님, 아이가 우는 거에 약하셨습니까? 그리고 사탕이라니, 먹을 거로 애를 꼬시는 거냐. 어째 하는 짓이 아줌마, 혹은 할머니 같은데!
“사탕? 그게 뭐야? 아니, 뭐에요?”
“네가 좋아할만한 것이다.”
현자는 급히 책상 근처로 가서, 사탕이 들어있는 단지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사탕 하나를 집어 리오스에게 건넸다.
“자, 여기 있다. 먹어봐라.”
사탕을 본 적이 없는지, 리오스가 신기하다는 눈동자로 사탕을 바라보더니 현자에게 먹으면 되는 거냐고 묻자, 현자는 입에 넣고 깨물지 말고 혀로 굴리며 조금씩 녹여먹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탕을 입에 넣었고, 이내 울먹이는 표정은 사라지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파닥였다.
‘게임이었으면 페도들을 낚을 수 있는 절호의 스샷감이었을 텐데.’
로리콘이 아닌 라트조차도 순간 심장이 멈췄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귀여움이었다.
“입에 맞느냐?”
“응! 아니, 네!”
“후우.”
간신히 리오스가 울려고 하는 것을 멈추는데 성공한 현자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매만졌다. 그러더니, 조금씩 소녀의 귀가 있는 곳, 귀를 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머리를 묶고 있는 끈을 바라본다.
“인간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귀를 숨기다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쯧쯧.”
그녀는 혀를 차면서 장갑을 낀 손으로 리오스의 머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머리카락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면서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가 튀어나오는 모습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면서 잠시 그 귀를 만지던 현자는 이윽고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엘프를 데려온 자여, 그대는 어째서 이곳까지 왔는가?”
드디어 내 차례인가.
“현자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존대는 되었다. 처음부터 하대를 한 그대에게 존대를 듣고 싶지는 않구나.”
“죄송합니다.”
숲의 현자가 여자일거라고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 사실을 커뮤니티에 알린다면 수많은 유저들이 놀라겠지. 아니, 사기 치지 말라고 하려나?
게임 상 도트도 도트거니와 보이스도 없고, 게다가 NPC와 연애를 할 수 있는 월드 세리아에서도 숲의 현자는 연애가 불가능한 NPC 중 하나니까. 성별을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후후후.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오랜만에 인간을 만나서 조금 들떴을 뿐이다.”
낮은 웃음 소리와 함께 사탕을 먹고 있는 리오스의 머리를 쓰다듬은 현자는 말을 이어간다.
“본량은 비싼 몸이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하지. 그대는 본량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역시나 보상인가. 그러나 질문보다, 먼저 보상을 원하다니.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질문을 듣고, 합당한 보상을 달라고 말하는 게 보통 패턴인데.
“이 정도면 됩니까?”
“사실 이 아이를 보호……. 그 정도면 충분하다!”
라트가 인벤토리에서 차와 과자를 꺼내자 현자가 하던 말을 멈추고 흥분한 듯이 소리쳤다.
아아, 리오스 때문이었나.
엘프는 보기 드문 종족이니까, 끝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현자에게는 흥미로운 종족일수도 있다. 그런 엘프를 보여줬으니, 보상은 필요 없다고 말한 생각이었나 보다.
‘조금 이상하긴 한데.’
지구에서 게임을 할 때 엘프는 아니지만, 엘프처럼 희귀한 종족 중 하나인 호랑이 수인과 함께 숲의 현자에게 방문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런 패턴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엘프 한정으로 발생하는 패턴인가?
“마침 차가 떨어져서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게다가 이런 주전부리까지 챙겨오다니! 예의를 아는, 훌륭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로구나. 다시 봤다, 그대여.”
“하하하하.”
그러나 눈앞에 쌓인 차와 과자를 보자 흥분하여 목소리까지 떨면서 자신을 극찬하는 현자의 모습에 의문을 지워버렸다. 질문에 답해주는 대가로 차와 과자를 원하는 숲의 현자다운 모습이다.
“이것들을 주방으로 옮겨줄 수 있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자님.”
“잠깐만.”
그녀의 요청에 따라 차와 과자를 전부 인벤토리에 넣고 출입구의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가려고 할 때, 현자가 라트를 불러세웠다.
“그대가 어째서 나에게 존대를 하는 지 알아차렸다. 확실히 현자는 저절로 존대를 할 수밖에 없는 명칭이구나.”
존대를 하지 말라는 거, 진심이었나? 연애가 불가능한 숲의 현자는 숨어있는 시스템 중 하나인 호감도조차 올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유저는 현자에게 존대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하대는 선택지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에스페라니티타. 본량의 이름이다. 줄여서 에스페라고 부르면 된다.”
‘에스페라니티타?’
처음으로 숲의 현자의 이름을 들었음에도, 처음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보다는 의문이었다.
“에에! 언니!”
“쉿.”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리오스에게 주의를 준 현자는 라트에게 어서 주방으로 가라고 눈짓을 했다.
“그대는 어서 이것들을 주방으로 옮겨주어라.”
“알겠, 알았어.”
“그리고 주방에 간 김에 나와 그대가 마실 차도 좀 타서 오길 바란다. 이 소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최대한 천천히 오도록.”
“예이, 예이.”
숲의 현자, 에스페를 만난 첫날에 한 일은, 질문이 아닌 차를 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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