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6 / 0229 ----------------------------------------------
1부
“앉지.”
방에 있는 거대한 소파에 주저앉은 백작은 맞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차는 없지만, 그건 이해해주게나. 물이 부족해서 말이야.”
“상관없습니다.”
차를 얻어 마시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글란츠 백작이 여기 온 것을 안 이상, 그를 이용해서 사라이 왕국이 핀스크 왕국을 견제하게 만들어야 한다.
왕국 전쟁 초반부에 핀스크 왕국이 멸망하지 않으면, 소름돋는 일이 벌어진다.
피가 땅을 충분히 적신 그 순간, 흑마법사들은 더더욱 많은 피를 원해서 이계의 괴물들을 소환하게 된다. 그들에게 장황한 목적은 없다. 단지 더더욱 많은 피가 이 대륙을 적시기를 원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단 말이야.’
흑마법사들이 이계의 괴물들을 소환하는데 성공한다면, 자동적으로 모든 왕국들이 전쟁을 그만두고,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있던 신전까지 나서서 괴물들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괴물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하면, 왕국 전쟁은 유야무야 끝이 나고, 왕국들은 분란을 일으키는 주인 없는 산맥에 관심을 끊고 폐허가 된 자국을 돌보게 된다.
주인 없는 산맥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
처음에는 단순한 흥미였다. 여식과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한 이 청년이 이 상황을 어디까지 추측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청년이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배짱이 있는 궁금해서 시험을 해보았다.
결과는 합격. 이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살기 속에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웃었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이야기를 할 자격은 충분하다.
“자네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나 당초 목적을 잊지 않았다. 백작이 청년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바로.
“내 여식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네. 도통 연락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제야 백작이 케이네를 칭찬하면서 씁쓸함 모습을 보인 이유를 깨달은 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연금술사 제스맹 기느투스 후작의 두 번째 제자, 맞지?”
“정확하십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항상 제스맹의 제자를 뜻하는 증표인 팔찌를 오른 손목에 차고 있었으니까. 이 팔찌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라트의 신분을 단숨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
외간상으로는 평범한 팔찌지만, 이 팔찌는 결코 평범한 팔찌가 아니니까.
“대연금술사의 두 번째 제자, 라트라고 합니다.”
마차 안에서는 백작과 이야기를 하느라, 자신의 소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한 라트는 고개를 숙였다.
“내 아이는 잘 지내고 있나?
“누나 아니, 사저는.”
누나라고 부르는 게 하도 익숙하다보니까, 라트는 순간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누나?”
“아, 그게…….”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라트는 백작에게 케이네를 처음 만난 날에 일어날 일을 기억이 나는 대로 말해주었다. 벌써 3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케이네와의 첫 만남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귀족의 자녀가 처음부터,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 충격적인 만남이었으니, 인상이 깊을 만도 했다.
“흐음.”
라트의 말을 전부 들은 백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누나라, 청년이 케이네를 그렇게 호칭할 때의 음색은 굉장히 부드러웠고, 애정이 흘러 넘쳤다.
“그 아이는 정상적인 가족을 원하는 것 같았으니. 자네를 동생처럼 여겼겠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은 흑심을 가지고 케이네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딸을 누나라고 여기고 있기고 있는 중이다.
“여식과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네.”
백작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라트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서 놀란 게 아니다. 케이네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서 놀란 거다.
케이네에게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제스맹에게 케이네가 왜 자신을 동생으로 여기는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차가운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망나니 같은 오빠, 가족의 따스한 정은 무엇 하나 느낄 수 없는 가정. 그래서 케이네는 진심으로 제스맹을 할아버지처럼 생각했고, 라트를 동생으로 여겼다.
“제가 사저에게 감사해야죠. 절 많이 챙겨줬는걸요.”
케이네 때문에 머리가 아픈 일도 벌어졌었고, 최근까지 그녀에게 연금술을 가르쳐줬지만, 이 세계에 온 직후 몇 달간은 케이네의 따스함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라트는 고개를 저으며, 백작이 감사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듣지 않아도, 자네 같은 이가 옆에 있다면 여식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알 수 있겠군.”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라트는 그저 웃어버렸다.
“케이네는 셀룬에 정착할 거 같은가?”
“예. 스승님의 후계자니까요.”
“그런가.”
백작은 또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아마, 관찰력 기능이 없었다면 그가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다.
“전쟁이 끝나면 찾아가보시죠. 사저도 그걸 원할 겁니다.”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고려해보지. 여식이 과연 내 모습을 보고도 기뻐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럴 겁니다.”
라트의 말이 근거 없는 확신임에도, 그것이 고맙게 느껴졌는지 백작은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런데 셀룬에 있어야할 자네가 어째서 여기까지 왔지?”
자, 여기서부터 문제다. 어떻게 할까. 침묵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백작은 자신을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자신은 타국의 사람이다. 이방인이다.
만약 라트가 케이네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면 백작은 정보가 세어나갈 것을 염려해서, 린느탐보프에 성공적으로 기습을 가하기 전까지 라트와 리오스를 감옥에 가뒀을지도 모른다.
“저는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몸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한 번 더 모리아를 팔아먹을 수밖에. 왠지 하늘에서부터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저주까지 걸었는데, 이름을 좀 팔아먹으면 어때서.
“모리아의?”
역시나, 모리아의 이름을 대자 백작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져 라트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더니,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Viva, 모리아. 찬양하도록 하자.
“젊은 나이에 대연금술사의 제자가 됐다면, 연금술에 굉장한 재능이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 됐군.”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자는 모리아의 계시를 수행할 때까지 사방팔방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백작은 라트가 전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연금술사인 그에게 모리아가 계시를 내린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나를 보살피는 바이올런과, 그대를 보살피는 애니그마의 축복을 빌지.”
바이올런의 축복은 백작이 빌어주지 않아도 충분했다. 라트 본인도 바이올런의 영향력은 10이나 되고, 옆에 있는 리오스는 10을 넘어서 12나 되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의상 그냥 감사하다고 할 수밖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아니,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해도 감사하다고 해야지.
“그럼, 이제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해보게.”
라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물을 수 없다. 모리아의 계시를 받았다는 일은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계시를 내렸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니까.
“모리아의 계시를 받드는 중, 저는 린느탐보프에서 흑마법사들을 발견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인가?”
명백한 사실이다. 라트는 어디서 흑마법사를 발견했는지, 그곳에서 린느탐보프 곳곳에 흑마법사가 숨어있는 서류를 본 것까지 상세히 말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첩자에게 이 일에 대해서 알아봐도 좋다는 말을 곁들였다.
“사실이군. 스홀리트에 첩자가 숨어있기는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도 없겠어.”
라트의 얼굴에서 진실을 읽은 백작은 얼굴을 붉혔다. 흑마법사는 어떤 경우에도 척결 대상이기에 백작의 분노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린느탐보프와 무리해서 전쟁을 하려고 했는데, 잘 됐군. 흑마법사의 잔재를 발견하면 신전에 도움을 구할 수도 있겠어.”
백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자, 라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서부터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백작도 아직 본론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라트를 바라보는 중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이 도박이 흥인지, 흉인지가 갈린다.
“문제는 린느탐보프 왕국이 아닙니다.”
“흑마법사가 숨어있는데, 린느탐보프가 문제가 아니라고?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저는 일부러 스홀리트에서 발견한 서류를 놔두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린느탐보프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그쪽에 있는 신전에서 알아서 처리할겁니다.”
“그럼 어째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가.”
“가장 큰 문제는 핀스크입니다.”
“핀스크? 핀스크 왕국이 왜?”
목이 타기에 라트는 인벤토리에서 수통을 꺼내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리오스가 자신도 마시고 싶다는 듯이 손을 내민다. 라트는 소녀의 앙증맞은 손에 수통을 쥐어주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스홀리트에서 발견한 서류 중에는 핀스크의 왕실에 귀족이 잠입해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고 쓰여 있는 문서도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다. 그곳에서 발견한 서류 중에서 핀스크 왕국에 있는 흑마법사들과 관련된 서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이것이 사실인 척 말한다.
그런 서류는 없었지만, 핀스크 왕국에 흑마법사들이 숨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진실 속에 거짓을 은닉하여, 모든 것을 진실인 것처럼 말해, 백작을 속일 생각이었다.
“뭐, 뭐라고? 그 서류는 어찌했는가.”
“흑마법사들과의 전투 때문에 불타고 말았습니다.”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라트의 모습에 백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흑마법사들이 왕국 내에 숨어있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왕실에 잠입했다니. 핀스크 왕국이 흑마법사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로 전락하다니. 이야기의 흐름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자, 침음을 삼켰다.
“그 말, 사실인가?”
“진실입니다.”
과연 진실인가? 백작은 조용히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딱히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에 머리가 아파왔다.
왕실에 흑마법사가 잠입해서, 왕을 꼭두각시로 부린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신전에 알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전의 위세가 강하다고 하지만, 왕이 신전의 수사를 거부하면 신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심증은 있지만, 증거가 없기에 그들을 이단으로 몰수도 없고, 더욱이 정확한 증거가 없다면 신전은 나서지 않는다.
“백작님!”
그 순간, 한 남자가 급히 문을 열고 백작에게 다가왔다.
“이야기 중이니,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급한 전언입니다.”
“말하라.”
남자의 굳은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한다. 남자는 잠시 라트를 바라보더니, 백작에게 다가가 라트에게 들리지 않게 귓속말로 말을 전했다.
그 말을 전부 들은 백작은 미묘한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라. 당장은 이 남자와의 이야기가 우선이니까.”
“받듭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백작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라트는 남자가 무슨 말을 전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스홀리트에 흑마법사의 기지가 박살난 채로 발견됐다고 말했나보네요.”
“그래, 맞다.”
눈앞에 있는 청년이 그 기지를 박살낸 주인공이기에 백작은 굳이 전언의 내용에 대해서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라트의 말에 긍정했다.
“그렇다는 건, 핀스크 왕국에 관한 그대의 말도 사실이라는 소리군.”
처음 라트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첩보까지 들려온 이상 라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본 백작은 그가 전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기로 결정했다.
체념한 듯이 말하는 백작의 모습을 보고 이 도박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실히 체감한다. 진실 사이에 거짓을 숨기기는 했지만, 핀스크 왕국이 흑마법사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니까, 백작이 자신을 원망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 무엇을 바라는 거지?”
“신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 백작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그렇지, 부정하지 않겠네.”
그래, 증거가 없는 이상 신전은 한 나라를 풍비백산 내는 짓거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백작이라면, 수많은 전공을 세우는 루브그흐 폰 글란츠라면 이 혼란스러울 왕국 전쟁 중에 핀스크 왕국도 확실히 멸국의 길로 접어들게 할 수 있을 터다.
“린느탐보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신다면, 그 다음은 핀스크 왕국을 치셨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라트가 어째서 핀스크 왕국과 전쟁을 벌여야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백작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심각해졌다.
============================ 작품 후기 ============================
저녁노을로님 10장, 두개의날개님 5장, 반박불가님 5장, 조아라삶님 5장, 스톤핸드님 5장, Panial님 10장, HighMax님 50장.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으면 추천 선작 한 번씩 눌러주시고, 원고료 쿠폰 주시는 독자님들도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오늘은...아마도..오후에..한 편 더 올리지 않을까...예상합니다..예상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