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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68화 (6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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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남자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누구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자, 라트는 눈을 찌푸렸다. 하긴, 나오라고 해서 나온다면 이 세상에 있는 암살자는 전부 나가 뒤지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거다.

    “귀찮게스리.”

    그쪽에서 나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찾아가면 그만이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나무가 빽빽이 둘러진 쪽이다. 아무 것도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는 저곳뿐이다.

    이 외로운 길의 유일한 동행을 죽여서, 굳이 자신을 외톨이로 만든 놈이다. 가능하면 꼭 대면을 하고 싶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라트만이 알고 있겠지.

    “안 나오면, 이쪽에서 가면 되지.”

    몇 명이나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무 어딘가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건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린 남자는 살기를 풀풀 흘리며, 사람이 숨어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후우, 지금이라도 나오면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살려줄지 고려는 해줄게.”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말이 죽은 것뿐이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데 별다른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즐기는 정신병자는 아니었기에 혹시나 필치 못한 사정이 있다면 살려줄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만한 값어치를 가진 물건을 뜯어낼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5초 준다.”

    남자가 시간을 세어간다. 5초, 4초, 3초, 제한된 시간이 흘러갈수록 대검을 잡고 있는 손에 더더욱 힘을 준다. 제한 시간 안에 나오지 않으면? 그 때는 진짜로 죽일 작정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을 뿐, 꺼려지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지 않은가. 3년 전만해도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무슨 미친 소리냐고 반박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교육된 윤리관만 남아있을 뿐, 법의 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을 죽인다면 모를까, 평민을 죽이는 것으로는 어지간해서는 잡혀갈 일도 없다. 심지어 귀족이라고 해도, 전쟁 중에 죽인다면 포상을 주면 줬지, 벌을 주지는 않는 시대. 몇몇 귀족들이 평민을 사람이 아닌, 가축으로 취급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해만 할 수 있지, 이해만.’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에게 동조는 하지 못하겠다. 눈앞에서 사람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귀족이 나타난다면 얌전히 그걸 구경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슬슬 몇 명이나 있는지, 어디 숨어있는지도 대충 파악했으니까.’

    마지막 남은 1초, 이 시간이 끝나는 순간 너희의 목숨은 없다는 걸 경고하기 위해 남자는 대검을 겨누고.

    “시간 끝…….”

    종언을 고하려는 그 순간,

    “잠깐, 잠깐만!”

    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허겁지겁 튀어나와, 양손을 들어 올려 적의가 없다는 걸 알린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오기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미안해 형씨. 며칠 굶는 바람에 말을 봤더니, 고기다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는 하하, 웃는 모습에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만 나오겠다, 이건가? 이 남자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 활도 없는 녀석이 잘도 말을 죽일 수 있었겠다.

    ‘얕보였나.’

    얕보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라트가 굳이 이런 관용을 베풀어주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말부터 죽였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부터 노렸다면 이렇게까지 자비를 베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거다.

    자비라는 것을 베풀어도, 항상 보답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물론, 말을 먼저 죽인 이유가 도망치는 수단부터 죽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 혼자만 있는 게 아닐 텐데. 다른 놈들은 죽여도 상관없다, 이거지?”

    싸늘히 들려오는 말에, 손을 들어 올리고 있던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에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이 숨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빨리 나와 숨어있는 4명.”

    적의를 보이고, 베풀어주려는 관용을 걷어찬 놈들까지 챙길 생각은 없다. 설마 저 남자에게 다가가는 순간 숨어있는 4명이 기습을 할 생각이었나?

    그런 하찮은 방법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 관찰력이나 직감 기능이 없어서 아무런 대책 없이 기습에 당했다고 해도, 미스릴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실력자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마지막 경고다. 다음은 없어.”

    ‘숫자까지 파악하고 있어.’

    라트가 숨어있는 사람의 숫자를 정확히 말하자, 남자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의 기감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적어도 오러 베너렛, 어쩌면 오러 익스퍼드일지도 모른다.

    그런 실력자가 이런 변방까지 온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남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생각한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백안이, 마치 모든 걸 꿰뚫어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먼저 말을 죽여서 퇴로를 끊고 그 이후에 남자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남자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서 기습 작전을 세웠건만. 숨어있는 이들의 숫자까지 파악할 정도라면, 기습은 실패다.

    이렇게 된 목숨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저 초록색 머리의 남자는 당장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 거 같으니까.

    “뒤지기 싫으면 잽싸게 튀어나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수풀 쪽을 향해 소리치자, 숨어있는 이들도 일이 범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끼고 별다른 소란 없이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일반인치고, 무장이 제법 괜찮은데.’

    헤지기는 했으나, 가죽 갑옷을 입고 있고 도끼와 창 그리고 활로 몸을 무장하고 있다. 평범한 마을 사람이라고 치기에는 무장이 너무 뛰어나. 그러나 정규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장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도적, 아니면 용병.”

    그렇다면 나오는 경우의 수는 세 가지. 하나는 도적, 그러나 작은 마을도 보이지 않는 이런 곳에 도적이 있을 리가 없다. 전쟁의 규모가 커져서 피난민이 생긴다면 또 모를까. 아직 전쟁은 초반부에 지나지 않아, 도적이 생길 정도로 치안이나 민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두 번째는 용병, 전쟁이라는 달콤하나 치명적인 꽃에 이끌려, 자신의 목숨을 팔러가는 이들. 명성이 높은 용병단이라면 모를까, 이름 없는 떨거지들은 워낙 호전적이라서 여행자를 습격해서 금품을 갈취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 경우의 수는…….

    “헤헤, 저희는 사라히로 가고 있는 용병단입니다요. 나으리.”

    나으리라. 서슴없이 자신을 낮추고, 라트를 높이는 단어를 내뱉는 남자의 행태에 라트는 살며시 대검을 내렸다. 진짜 용병단인지 아닌지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고 관심도 그다지 없으나, 알아서 튀어나왔으니 자비를 베풀어줄 생각은 있었다.

    다만, 저놈들이 나에게서 앗아간 것은 확실히 돌려받아야겠지.

    “사라히로 가는 건 너희뿐이냐, 아니면 용병단이 전부 사라히로 가는 중이냐.”

    “전부 사라히로 가고 있습니다.”

    용병단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자신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용병단이라면, 이런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용병은 언제든, 어디서든 필요하니까.

    ‘알 게 뭐야.’

    왠지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지금 당장은 사라히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괜히 서브 퀘스트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아. 숲의 현자를 만나서 석판에 대해서, 그리고 신성 스탯에 대해서 물어봐야 한다.

    “용병단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말은 있겠지?”

    “예, 예. 그렇습니다. 나으리께 말 한 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아주 날랜 말로 드리겠습니다!”

    “이야기가 통해서 좋네.”

    그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이해한 남자의 태도에 라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이며 대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굳이 싸우지 않고, 사라히까지 가는데 사용할 말을 얻을 수 있다면 싸울 이유가 없다.

    인간 NPC를 잡는 것보다, 리젠 존에 있는 몹이나 산 속에 살고 있는 몬스터를 죽이는 게 훨씬 경험치를 많이 주니까.

    ‘역시 동물한테는 정을 주면 안 되나.’

    라트는 한숨을 내쉬며, 어느 사이에 시체가 된 말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살아있는 말을 주면, 이 고기는 너희한테 주지.”

    “아이고,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할 뿐이죠.”

    그렇지? 목숨 값으로 말 한 필이라니, 내가 봐도 굉장히 싼값이라고 생각해.

    “안내해.”

    자신을 기습한 다섯 명의 안내를 받아 수풀을 지나서 조금 걸어가자, 여러 개의 천막이 쳐져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만약 이들이 정말로 용병단이라면 정말로 모든 것을 걸고 사라히 왕국으로 가는 중이겠지.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으리? 대장님께 보고를 올려야 해서요.”

    “그렇게 하지.”

    라트는 남자의 말을 선선히 수락하고 관찰력을 이용해서, 주변을 살펴봤다. 몇몇 천막 안에서, 여자의 신음소리와 남자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용병이 항상 여자를 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직감 때문인지 약간 미묘한 감정이 들었으나, 위험 요소는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말을 받아서 이들과 헤어지면 사건은 해결, 라트는 지친 말을 대신해서 새로운 말을 받을 수 있고, 저들은 목숨을 구하고 고기를 먹을 수도 있으니 서로 윈윈이다.

    ‘왠지 천막이 안쪽을 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한참동안 바깥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트는 천막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의도적으로, 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가리고 있는 느낌이다.

    “나으리, 대장님께서 얼굴을 좀 뵙자고 하십니다. 천막이 없으시면 여기서 주무시는 게 어떠시냐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미려고 하는 의문을 잠식시키듯, 자신을 여기까지 안내한 남자가 라트에게 다가왔다.

    “말은?”

    “여기서 주무시면 내일 새벽에, 안 주무시면 지금 당장 드리겠습니다.”

    이 안에 들어간다고 딱히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지는 않고, 설령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었기에 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막 뒤에는 뭐가 있지?”

    가까이서 보니, 바깥에서 이 중앙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게 천막으로 시야를 가로막은 구조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대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슬쩍, 의문을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라트의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요.”

    거짓말이다, 이 남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직감이 속삭인다.

    그런데, 그게 뭐.

    이 남자를 추궁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천막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심증일 뿐이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 흑마법사들이야,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할 적이기 때문에 처리했을 뿐. 굳이 부딪칠 필요가 없는 이들까지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

    기나긴 여행 때문에 몸이 피곤해서 인가? 그렇게 하기에는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으면, 피해를 줬다고 해도 피해를 준만큼 보답을 해준다면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에 참견하려고 드는 이는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히어로이거나, 착한 호구에 불가하다.

    딱히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라트는 남자의 거짓말에 넘어가기로 하고, 안내에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추천 한 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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