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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무 위에 앉아서 끼니를 때울 겸, 미리 구비해놨던 육포를 뜯으면서 여유롭게 마을을 살핀다. 시골 마을이 그렇듯, 해가 저물자 대부분이 잠을 자기 위해서 집으로 들어가 아까까지는 분주하던 거리는 바람만이 휑하게 불어왔다.
‘슬슬 오겠지?’
마지막 남은 육포 조각을 입에 우겨넣은 라트는 나무에서 내려와, 재갈을 꺼냈다. 이대로 말을 내버려둔다면 분명 기병대가 마을로 향하는 소리에 말이 놀라서 소란을 피울 거다. 그렇게 되면 말을 버려야하겠지.
귀환 스크롤 10장짜리 한 묶음을 사고도 아직까지 700골드 정도가 남아있었으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다시 말을 사기 위해서 지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얌전히 있어.”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으나, 웬일인지 라트의 속삭임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 말이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손길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휘적거리는 것을 멈췄다.
“옳지, 착하다. 이제 조용히 있어라.”
말에 재갈을 물린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라트는 조용히 마을 주변으로 다가갔다. 아직 달이 완전히 하늘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가 잠든 시간.
땅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에 환희를 느낀다. 역시나, 이 세계가 현실이라고 해도, 자신이 기억하는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숨을 죽이고 이죽거린다. 어느 장소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인간이 아닌, 신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신과 같은 힘이 없지. 그래서 모든 사람을 구한다는 헛된 망상은 절대로 품지 않았다. 오로지 한 명, 한 명만 구하면 그만이다.
땅이 흔들리자, 아직 잠을 이루지 못했던 몇몇 이들이 집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500의 기병대, 이 세계에서 일개 전장, 나아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평가되는 병력이 마을 하나를 습격하기 위해서 몸소 나타났으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굳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런 후한 평가를 받는 기병대를 이용해서 저지르는 일이 고작 시골 마을 하나를 습격하는 것이라, 웃기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켈랑 왕국의 우방이라고 알려진 핀스크 왕국은 건실 해보이나, 그 속은 곪은, 썩은 나무와 같았다.
왕과 귀족의 비리 때문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들 사이에 흑막 집단이 스며들었고, 덕분에 내부로부터 곪아버린 왕국은 흑막 집단에 의해서 조종받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번 이벤트도 겉으로는 전쟁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진짜 목적은 그저 사람을 죽이고 땅에 피를 적시고 싶을 뿐이다.
“불태워라!”
돌진하는 말에 타고 있는 기병들은 별다른 이변 없이 마을 근처까지 도달하여 들고 있는 횃불을 집어던졌다. 나무와 풀로 만들어진 집들은 횃불에 만나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을 태우는 공포의 겁화와 함께, 많은 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 소리를 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밖에 나와 상황을 파악하더니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마침내 지상위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도망쳐, 모두 도망가란 말이야!”
용기 있는 이가 정처 없이 흐르는 비명 사이에서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에 대해 설파하자, 많은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을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 몇몇 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몇몇 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몇몇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챙긴다.
‘어디 있지?’
그 혼란 속에서 라트는 몸을 숨기고 열심히 눈을 굴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소년이 나타나겠지. 그 소년이 바로 이름 없는 소년, 이곳에서 죽음이 확정된 소년이었다.
적당히 마을 건물이 불타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기병대가 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학살을 알리는 돌격 명령에 랜스를 비스듬히 세우고 말을 몰기 시작한다.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대라고 한들, 저 모습에 공포를 느낄 진데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저들을 맞이하는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귓가에서 죽음이 속삭임을 느꼈는지 재산을 챙기던 이들도 고집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어, 목숨이 재산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진즉에 도망쳤어야지. 저들은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으아!”
“칼!”
도망치는 군중 속에서 한 소년이 넘어지자 소년의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물결과도 같은 인파에 휘말려 소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애타게 그를 부를 뿐이다.
“칼! 칼!”
“아빠!”
온 지상을 흔들며, 기병대가 돌격한다. 넘어진 소년은 공포에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풀린 듯, 일어서지 못한 채 다가오는 죽음에 소리를 지르며 항거한다. 그러나 겨우 그것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곳에서 죽는 이는 없겠지.
그렇기에 소년이 목숨을 구할 수 있던 것은 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만연하라.”
아직 불타지 않은 집에 무색의 연금술을 사용해서 소년을 들어 이쪽으로 데려온다. 갑자기 출연한 나무 기둥에, 그 기괴함에 기병대의 선두에 서던 이들이 멈칫하려고 했으나, 이내 나무가 사라지자 괘념치 않고 돌격을 계시했다.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눈앞에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박살낼 수 있다는 고집인가? 그것을 알 길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곳에서 볼 일은 없으니까.
나무 손아귀가 소년을 데려오자, 라트는 그의 뒷목을 쳐서 기절을 시킨 후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대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을 구하지 않겠다고,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생명이 죽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는 미지수다.
도덕관, 윤리관, 사회적인 시선. 그 모든 것이 이곳과는 달랐던 곳에서 자라왔기에 같잖은 영웅 심리를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아.”
눈앞에서 자식을 잃는 참척(慘慽)을 경험하리라고 생각했던 소년의 아비는 인파 속에서 빠져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내달리는 죽음에 굴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쥔다.
“주신 홀리여, 감사합니다.”
소년을 데려간 손아귀가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비는 애달픈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날카로운 창끝이 도래했다.
그 순간 라트는 말이 있는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병대가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나, 조금 후에는 눈앞에서 벌어진 수상한 현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할 거다.
말이 있는 곳에 도착한 라트는 기절한 소년을 내팽개치고 재빨리 사료와 물을 인벤토리에 넣고 말이 이곳에 있었던 흔적을 지웠다. 근방에 말을 타고 온 흔적을 지운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이곳은 적의 영토. 이 근방에 말을 타고 온 흔적만 지우면 라트가 어디서부터 이 마을에 왔는지 알 수 없다.
“좋아.”
대충 흔적을 전부 지웠다고 판단하자, 땅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을 주워들고 말에 오른 후 귀환 스크롤을 찢은 후, 말을 샀던 성으로 귀환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것으로 이름 없는 마을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소년의 운명이 바뀌었다.
“역시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리고 예상한대로 운명의 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하하, 시발.”
아니, 아직은 모른다. 소년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완전히 운명이 바뀐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약간의 희망을 가진 라트는 이 근처에 고아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리로 향했다.
도로변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말을 탄 채로 신전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전은 전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신성불가침 구역이다. 전쟁 중에 만약 신전을 건드린다면 그 즉시, 각 왕국에 있는 모든 신전이 교황의 이름을 빌어 전쟁을 선포하니까.
그렇기에 이곳에 이 소년을 맡긴다면 분명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다는 확신이 있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고아원에 들어가 원장에게 자세한 사정은 묻지 말아달라고 말하며, 기부금 10골드와 함께 아이를 맡겼다.
인자한 인상을 지닌 원장은 라트에게 무슨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받아드렸다. 기부금이 너무 많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3골드만 받아간 건 후문이다.
“시발, 좆같네.”
고아원 밖으로 나온 라트는 여전히 운명의 실이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일반 NPC, 대륙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NPC는 운명을 바꿔도, 저주를 내릴 필요도 없다는 건가. 여신 모리아의 처사에 입술을 씹는다.
죽음이 확정된 NPC 중, 엘리와 같은 네임드 NPC는 세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 중 엘리를 구했으니, 남은 NPC는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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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엔딩으로 가는 길
목표 : 정해진 운명을 바꾸고 운명의 실을 연결하라. 남은 운명의 실 : 1/4
보상 : 첫 번째 조건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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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해야할 운명의 실은 총 3개. 남은 네임드 NPC를 모두 구한다고해도 한 명이 모자라게 된다. 더 문제가 있다면, 그 중 한 명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이였다.
죽음이 확정된 네임드 중 한 명은 왕국에도 길드에도 속하지 않은 채 아크메이지 칭호를 받은 오만한 노인이었는데, 이가 죽는 이유는 마법과 마법사 그리고 신비의 신인 아르카나를 모욕하는 바람에 아르카나의 분노가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인벤토리에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후우.”
진짜 담배 덕분인지, 아니면 플래시 효과 덕분인지, 라트는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일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어떻게 구할 수 있다고 쳐도, 나머지 2개의 실은 도대체 어떻게 채워야하는 것인가. 설마 이거, 처음부터 깰 수 없는 퀘스트를 주고 엿이나 먹어봐라, 하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
월드 세리아 측에서 진 엔딩을 보는 것에 상금을 걸고, 그것이 화제가 된 이유는 명성이 높은 변호사들을 초청해서 진 엔딩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에 대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그들을 보증인으로 만들었다.
‘한 명이라면 모를까, 보증인을 선 변호사가 다섯 명이나 되는데 깰 수 없을 리가 없어.’
그럼 한 번 고민해보자. 어제 자신은 엘리를 정해진 죽음으로부터 구해, 그녀의 운명을 바꿨다. 그렇다면 죽음에서 구하는 것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척도일까.
‘그건 아니겠지.’
그러나 죽음이 척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척도일까. 이 세계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선역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자가, 악녀 포지션으로 자리 잡기도 하고, 멋진 악역이었던 자가 찌질한 선역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플래그, 운명이 정해놓은 무수히 많은 변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엘리와 나는 어떻게 운명의 실로 연결될 수 있었나.
잠시 그것을 고민하던 라트는 결국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운명조차도 정해놓지 못한 변수를 일으켜야한다. 죽음이 확정된 엘리가 살아남은 일처럼, 허락되지 않은 운명으로 그들을 인도해야했다.
“돌아버리겠네.”
라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런 식의 공략 방법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정해진 변수 아래, 유저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 변수를 초월하는 변수를 만들어내는 일을 그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변수가 워낙 많아서, 전 세계 유저들이 월드 세리아에 얼마나 많은 플래그가 있는지에 대해 지금도 알아가고 있는 중인데.
“일단 잠부터.”
머리를 쑤시는 두통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린 덕분에 피로가 몰려왔기에 라트는 고민을 접어버리고 잠을 청하기 위해 여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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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균님 1장, 스릉하님 5장, 조아라삶님 5장, lbh950님 10장, 님아좀헬프님 10장 후원쿠폰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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