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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62화 (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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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눈을 뜬 것은 새벽 언저리, 달이 저물고 여명이 비추기 직전인 가장 어두운 때였다. 상체를 일으킨 라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옆에서 잠든 엘리를 바라보더니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실소하고 하면서 흐르는 황금과도 같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네.”

    자고 있는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라트는 살며시 웃더니,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충족한 덕분에 피로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너무 이르지.’

    이른 시간에 깼지만, 잠을 더 잘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간이라면 포탈이 열리지 않았을 터. 아무리 포탈이 빨리 열린다고 해도 지금부터 한 두 시간은 기다려야한다.

    ‘편지라도 써놓을까.’

    엘리에게는 직접 작별 인사를 하고 갈 생각이지만, 제스맹과 케이네를 보고 갈 시간은 없었기에 라트는 편지를 남기기로 결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탁자 위에 있는 촛불을 켜고,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막상 편지를 적으려고 하니까 딱히 적을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편지를 적었다. 그렇게 두 개의 편지를 모두 적었을 때 쯤, 엘리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

    “응.”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한 엘리는 조용한 미소와 함께 양 팔을 내밀었다. 그것이 안아달라는 신호라는 걸 알아차린 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아줬다.

    따뜻한 체온이 심장을 타고 흘러, 머리를 감싼다. 라트의 품에 쏙 들어간 엘리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볼에 키스를 한 후 사랑을 속삭였고, 라트도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사랑을 전하자, 마지막으로 애틋한 키스를 나눈 끝에 남녀는 떨어졌다.

    “가려는 거야?”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답하자, 엘리는 슬픈 눈동자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아, 이런 표정으로 그를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나야하는 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안기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지 않았나.

    ‘그리고 영원한 작별도 아니잖아.’

    언제일지는 모르나, 돌아오겠다고 말했으니 라트는 분명 돌아올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때,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족하다.

    “잘……. 다녀와.”

    나름대로 태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막 이뤄진 사랑을, 사랑하는 이를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어. 라트는 처연히 웃고 있는 엘리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랑받고 있으나, 사랑받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소녀.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해, 절벽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아가씨. 너무나도 안타깝고, 애처로워서,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사랑을 남겼다.

    “잘 다녀올게.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아프지 말고 있어. 끼니 거르지 말고. 알았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자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마를 매만지던 엘리는 그의 사랑을 느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슬슬 시간이 됐다. 탁자 위에 남긴 편지를 가리켜서 스승님과 사저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긴 라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사랑을 속삭이고 방을 빠져나왔다.

    엘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빠른 발걸음으로 공작저를 벗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택의 최상층에 있던 루아타 공작과 제스맹도 마찬가지로 라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네의 제자가 가는 군.”

    “자네 입장에서는 도둑놈이지.”

    “크흐흐흐.”

    도둑놈이라, 그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루아타 공작은 숨죽여서 웃었다.

    “도둑놈이자, 자네의 제자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며 건배하세.”

    “좋지.”

    술병이 탁자 위에 무수히 널려있으나, 그 둘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술잔을 기울였다. 투명한 액체로 가득찬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린 공작은 쓰디쓴 숨을 내뱉었고, 제스맹은 반쯤 술잔을 비우고 옆에 있는 조그마한 포션병을 집어 들었다.

    “자네, 괜찮나.”

    괴로운 표정으로 포션을 마시는 친우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공작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제스맹은 그저 웃을 뿐이다.

    “미안하네.”

    “내가 좋아서 승낙한 일이네, 로이. 자네가 미안할 것은 없어.”

    미안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친우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앞으로…….”

    공작이 슬픈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제스맹은 피식 웃으면서 슬퍼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비어있는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아, 필요한 재료가 있는데 구해줄 수 있는가? 제자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서 말이야.”

    “제자 사랑이 대단하군. 아니, 제자라기보다는 손자라고 해야 하나?”

    “손자 아니, 아들 같은 아이지. 그러니 라트를 잘 부탁하네, 사돈.”

    “하하하하하. 세상에 자네에게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제스맹의 노력을 알았기에 공작은 힘없이 웃으며 술잔을 비운다.

    *****

    “보자.”

    린느탐보프 왕국 중, 차리친 왕국과 국경이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동한 라트는 제일 먼저 상점에서 지도를 샀다. 몇 번을 말하지만, 2d와 4d는 전혀 달랐기에 지도가 없으면 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말을 사야겠다.’

    이곳과 목적지의 거리를 살핀 라트는 마차를 빌리는 것보다 말을 사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파르스에 있을 때, 엘리와 케이네에게 틈틈이 승마술을 배웠다. 기능에는 승마술이 등록되지 않았지만, 등자를 착용한 말이라면 몰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는 웬 승마술? 하면서 귀찮아했지만, 새삼 케이네와 엘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어서옵쇼.”

    지혜가 높기는 하나, 흥정하는 것에 귀찮음을 느낀 라트는 적당한 말을 고르고, 사료까지 합쳐 적당한 값을 낸 후 말에 올라탔다.

    성문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신분을 묻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며칠 전 제스맹에게 적당히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연금술사 패를 달라고 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왕국 전쟁이 발발하는 동안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이다.

    성문을 빠져나가, 말을 몰자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노르스 대륙 북부에 있는 셀룬 왕국과 달리, 린느탐보프 왕국은 남쪽에 위치했기에 상대적으로 날씨가 따뜻했다.

    ‘이대로 달리면, 저녁쯤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

    국경 근처, 이름 없는 마을이 습격당하는 건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고 이틀째 밤이다. 다시 말해 오늘밤 습격이 일어나고, 그걸 계기 삼아 핀스크 왕국과 린느탐보프 왕국의 전쟁이 발발했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전쟁의 나팔을 불기 시작한다.

    사라이 왕국이 전쟁은 나 몰라라 주인 없는 산맥으로 군대를 보내서 미리 거점을 손에 넣으려고 하자 차리친 왕국이 사라이 왕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셀룬 왕국은 암살 사건을 공표하며 켈랑 왕국에 전쟁을 선언하게 된다.

    단지 계기가 필요했을 뿐, 주인 없는 산맥에 있는 희귀한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모든 왕국의 고위층들이 주인 없는 산맥을 손에 얻으면 셰크티 제국에 버금가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헛된 망상에 빠졌으니까.

    그것이 달콤한 덫인지는 이 사건의 흑막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은 알고 있다. 게임의 거의 모든 시나리오를 꾀고 있는 하드코어 유저 중 한 명인 라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상급의 품질을 자랑하는 순수한 철이 매장된 광산이 주인 없는 산맥에 있다는 건 진실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희귀한 광물이 잠든 광산이 있는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흘린 정보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영원히 그 광산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이번 사건의 흑막집단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 대륙에 최대한 많은 이들의 피가 흐르게 하는 거다. 피가 강물처럼 흘러, 땅 끝에 스며들어 짙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원하는 집단이다.

    ‘싸이코 새끼들.’

    라트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왕국 전쟁의 뒤에 있는 흑막 집단을 보고 싸이코 집단이라고 평가했다.

    카르세이나 대륙 쪽에 있는 흑막 집단은 확고한 목적이라도 있지, 노르스 대륙 쪽에 있는 흑막 집단은 그저 많은 이들이 죽는 것을 바랄 뿐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단순히 게임이라면 그저 싸이코 집단이라며 웃어 넘길 수 있었으나, 게임이 아닌 현실로 닥쳐오자 그들이 얼마나 거대한 광기에 잠식된 집단인지 다시 한 번 고찰할 수 있었다.

    ‘당장 맞붙는 건 무리고.’

    광기 밖에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하지만, 아니 광기에 홀린 자들이라서 그런지 그들은 상당히 강했다.

    보통 유저가 최단 시간에 왕국 전쟁 퀘스트를 클리어하려고 해도 1년 동안 레벨 업을 하고, 명망 높은 동료를 최소 6명 이상 모은 후에야 그들과 상대할 가능성이 보일 정도다.

    그래 겨우 가능성이 보일 정도라는 거다. 자칫 플래그가 꼬여서 잔챙이가 아닌 간부를 만났을 경우에는 그대로 게임 오버.

    ‘안 돼, 안 돼.’

    2년 동안 레벨 업을 했고, 사기적인 기능과 무장을 갖추고 있다지만,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료를 모으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은 동료를 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어림잡아도 1년 반이나 걸린다.

    그럴 바에야 홀로 그들의 세력을 갉아먹으면서 강해지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딱히, 징그러운 남자 새끼들하고 파티를 이뤄서 매일 밤 같이 노숙해야하는 것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엘리가 보고 싶다.”

    떠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후회는 없고, 망설임도 없었기에 거침없이 말을 몰았다. 그렇게 해가 떠오르고 나서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달린 끝에 이름 없는 마을 근처에 닿을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라트는 말을 천천히 몰면서 근방에 말을 타고 온 흔적을 모조리 지웠다.

    황혼의 주황빛이 하늘을 뒤덮는 시간, 마을은 이제 막 일을 마치고 온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요란하기 그지없다. 이후에 일어날 참극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자 그럼.’

    우선 하루 종일 달려서 고생한 말을 마을 근처에 있는 나무에 묶어두고, 사료와 물을 주면서 갈기를 쓰다듬어 그 노고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500의 기병대. 상대하라고 하면 상대할 자신은 있었다. 이 이벤트에는 딱히 오러를 다루는 이가 없었기에 미스릴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기병의 랜스 차지에 맞는다면 몸이 날아가기는 하겠지만, 최소한 즉사는 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포션을 마셔서 상처를 치료하면 됐다.

    그러나 이 고정 이벤트가 라트 때문에 엉망이 된다면, 플래그가 꼬이지 않을까?

    눈길을 돌려 마을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일 수도 있는 이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확인한다.

    모르는 이들이다. 엘리와 같이 친한 이들이 아니야.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플래그가 꼬일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죽는데 구해야한다? 미안하지만, 개소리다. 엘릭서를 구하기 위해서 대륙을 돌아다닌 6개월 동안, 그런 생각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결국 어디선가 다른 사람이 죽기 마련이다. 모든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신 뿐. 하찮은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만 구하는 것도 벅찬 일이다.

    ‘칼인지, 쿨인지, 그 놈만 구하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소년을 구하는 이유도 오로지 운명의 실이 일반 NPC에게도 적용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다. 구하고 나서는 곧바로 귀환 스크롤을 쓰고 도착한 성에 맡기면 그만이다.

    비정하다면 비정할 수 있으나, 합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획을 짠 라트는 혹시나 사람들에게서 정을 느낄까봐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밤까지 그 주위를 서성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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