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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60화 (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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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분노가 끝나자, 공작의 눈에 라트가 들어왔다. 딸을 세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줬다. 이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과 감사의 표시는 다르지.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라트에게 다가갔다.

    “고맙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고,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고작 그것, 그러나 그 의미는 크다. 한 나라의 공작이, 왕을 제외하면 두려울 것이 없는 자가 평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당황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지금 루아타 공작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그대에게 말하는 중이니까.”

    공작은 지그시 고개를 저으며, 라트의 부탁을 거부했다. 공작이 아닌, 엘리자넷이라는 사랑하는 딸을 둔 아버지로써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인 보상을 그에게 준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지고한 공작이 자존심조차 내팽개치고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한다.

    “딸아이의 죽음을 부정을 해줘서,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라, 그저 고맙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한심한 아비를 이해해다오.”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제발 고개를 들어주세요. 부담스럽습니다.”

    “고맙다.”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건가?’

    주위에 가신이 없다고 해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하겠습니다, 감사도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고개 좀 들어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공작이 고개를 들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자, 라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신들이 전부 나가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의 주군인 공작이 고개를 숙인 것에 소란이 일어났겠지.

    공작은 5분 가까이 라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짧지만,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귀족 캐릭터를 플레이 해본 경험이 있는 라트는 공작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높은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죽는 줄 알았어.’

    “그 노인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루아타 공작이나 제스맹이라면 모를까, 라트의 신분을 고려하면 노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기에 노인의 정체는 알고 있으나, 굳이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사로잡았다. 그리고 경비병의 화살에 맞아서 중상을 입은 놈들도 사로잡았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를 갈고 있으면서, 그들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죽이지 않겠다고?

    “고문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숙련된 암살자들입니다. 고문으로 정보를 불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공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어째서 몸소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인가.

    “그저 내 분이 풀릴 때까지, 살을 찢고, 폐를 찌르고, 뼈를 갈고, 눈을 뽑을 생각이다.”

    다시금 살기를 내뿜는 공작을 보고, 라트는 그가 어째서 사로잡은 이들을 고문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정보 같은 걸 불게 할 생각이 아니라, 단순히 분을 풀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다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소리일수도 있겠지만, 라트는 몇 년 전에는 살인이라는 행동에 자연히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딸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로이.”

    “흠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해주세요.”

    제스맹이 엘리의 핑계를 대서 루아타 공작을 말렸으나, 오히려 그 엘리가 먼저 나서서 루아타 공작에게 그들을 고문하라고 말하자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절 죽이려고 한 놈들이에요. 라트가, 하나 뿐인 친구가 절 구하려다가 죽을 뻔했어요. 그들에게 루아타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주세요, 아버님.”

    딸이 확고한 눈빛에 진심을 읽은 아버지는 조용히 자조했다. 과연 자신의 딸이다. 이럴 때는 비정하게 생각해야한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그들은 감히 루아타 가문을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렇기에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다. 그들에게 후회를 내리겠노라고.

    “그런데, 친구라니.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구나 엘리.”

    그러더니 공작은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돌렸고, 라트는 조금 불안해졌다. 왜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이 청년이 기절해서 돌아왔을 때, 아주 대성통곡을 해놓고. 내 평생 네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엘리의 얼굴이 사과같이 빨갛게 물든다. 왜 그걸 굳이 라트의 앞에서 말하는 건가.

    “이래서 딸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는 건가.”

    “아버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제스맹.”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공작은 딸을 무시하고 제스맹을 바라보았다.

    “자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봐야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하네.”

    “자식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있지 않은가.”

    “그래 뭐.”

    제스맹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첫 번째 제자를 바라보았다. 엘리와 마찬가지로 라트가 기절했을 때, 케이네도 펑펑 울었지.

    “확실히 딸은 키워봐야 쓸모가 없더군.”

    “스승님!”

    ‘왜 이렇게 불안하지.’

    슬며시 공작을 바라본다. 라트는 왠지 저 미소를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아. 이참에 그대가 루아타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은 어떤가. 운명의 실로 묶인 이상, 딸아이와는 땔 수 없는 관계가 됐다는 뜻이지 않나.”

    라트의 불길함을 증명하듯, 기어이 폭탄선언이 터지고 말았다

    “네?”

    “아버님?”

    “자네 지금 진심인가?”

    “말도 안 돼요!”

    공작의 폭탄선언에 제각각의 반응이 나타난다. 라트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중이고, 엘리를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였고, 제스맹은 친우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살핀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듯, 케이네는 정색하며 라트와 엘리 그리고 공작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음? 이 청년에게 마음이라도 있느냐?”

    “그, 그게 아니고, 라트는 아직 어려요!”

    공작의 물음에 케이네는 잠시 당황했지만, 간신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당황하기는 했는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엘리와 동갑이면 이미 성인이다만.”

    19살이면 성인이다. 충분히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고, 실제로 19살에 결혼을 하는 이들은 넘치고 넘쳤다.

    “그래도!”

    “하아. 그만해 누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네가 너무 흥분해있었기에 라트는 살며시 그녀를 말렸다. 제스맹도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젓는다.

    케이네가 타국의 귀족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한 나라의 공작이다. 목소리를 높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라트는 웃고 있는 공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이 과하십니다.”

    “장난이 아니다.”

    “제가 모리아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아시면서요? 내일이면 떠나야할 몸입니다만.”

    데릴 사위, 공작의 사위가 돼고 후에 공작이 될 엘리자넷 시르 루아타의 남편이 된다라. 나쁘지 않아, 편하게 살 수 있겠지. 그러나 아직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금 모리아의 핑계를 댔다. 이름을 좀 많이 팔아먹는 중이지만, 참아달라고 여신님. 이런 귀찮은 저주까지 내렸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럼 엘리는 열녀가 되겠군.”

    “예?”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그대를 막을 수는 없지. 그리고 그대가 죽으면 딸아이도 죽는다. 서로가 운명 공동체가 됐으니, 결혼은 고려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만.”

    막무가내로 말을 잇는 공작의 행태에 라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그의 속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운명 공동체가 된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저는 평민입니다.”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평민은 언젠가 위대한 자가 되기 마련이지. 역사적으로 그랬어. 미리 깊은 연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중이네.”

    ‘와, 할 말이 없게 만드네.’

    “진지한 농담은 그만두게나, 모두가 곤란해 하고 있지 않나.”

    라트까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친우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제스맹이 결국 입을 열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네 제스맹.”

    “그래도 그만두게나. 공녀님께서 부끄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얼굴이 터질 것 같으니까.”

    “음?”

    그제야 엘리가 얼굴을 가릴 정도로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확인한 공작은 격식을 잊어버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반쯤 농담으로 해본 말이긴 하지만, 역시 딸아이는 이 청년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 그것은 낭만적인 말이다. 공작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딸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더 하면 딸한테 한 소리 들을 거 같으니, 그만둬야겠군.”

    반은 진심이었으나 사랑하는 딸을 아직 남자에게 줄 생각은 없기에 반은 정말로 농담이었다.

    “국왕 폐하를 뵈러 갈 생각이네만,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같이 가지. 너희는 길드로 돌아가서…….”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하지 그런가? 자네도 오늘 밤은 나와 술 한 잔 하고.”

    “그래야겠군.”

    공작의 요청에 제스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일이 많았다. 친우는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아직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는 술 상대를 해줘야겠지.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같이 돌아가자꾸나.”

    “네.”

    한 명은 스승의 말에 긍정했으나, 다른 한 명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스맹은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라트를 붙잡아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어제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 중에 글을 올리느라, 뼈대가 써있는 파일을 복붙해서 올렸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스미마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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