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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운명의 실은 연결된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운명의 실을 안보이게 할 수 있으며, 운명의 실로 연결된 두 사람의 합의 하에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존나게 친절한 설명 고마워.”
혹시나 알림창이 대답하지 않을까 싶어, 소리내서 말해보았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온 날을 제외하고 알림창은 단 한 번도 라트의 물음에 대답한 적이 없다.
마치, 이것이 진짜 게임이라는 것처럼 상황을 알려줄 뿐,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지금까지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지만, 마크의 연기에 속아서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라트는 입맛이 쓰다고 느꼈다.
“후우.”
다시 한 번 담배를 폐속 깊숙이 들이마시며 창문을 열었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구름이 자욱하게 낀 흐릿한 밤. 어둠이 머무는 도시 사이로 경비병들이 횃불을 들고 옹기종기 돌아다닌다.
엘리를 암살하려고 한 암살자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가. 라트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까마귀는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은 암살자 길드도 아니고, 호락호락한 집단도 아니었다.
엘리의 암살을 실패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라트라는 변수를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방심하고 있었을 뿐이다.
전 단주인 찰스야 루아타 공작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겠지만, 과연 저렇게 돌아다녀서 몇 명이나 붙잡을 수 있을까.
‘한 명이라도 잡는다면 용한 일이지.’
계속해서 담배를 태우며 바깥 상황을 관찰하던 중,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안 자욱이 퍼진 담배 연기와 어둠을 걷혔다.
“또, 또 담배? 미친 거 아니야?”
아가씨는 아직 눈에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청년을 바라본다. 청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보라, 붉은색의 인연으로 연결된 남녀가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고작 그런 일로 쓰러져놓고, 몸에 안 좋은 걸 왜 피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
엘리가 청년을 향해 걸어오는 것으로 대치가 깨진다. 라트는 쓰게 웃으면서 담배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투정을 부리고 모양새라고 하나, 그녀는 지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투정에 불평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나. 저런 미인이 걱정해준다는데, 그 어떤 남자가 토를 달 수 있을까.
“이 바보, 바보, 바보!”
청년의 듬직한 품속에 안긴 아가씨가, 손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애정이 가득 깃들어 있는 폭력이라 아프지 않아. 오히려 가슴이 충만해진다.
“고마워.”
한참동안 청년의 가슴에 자신이 느낀 슬픔을 새겨놓은 엘리는 돌연 태도를 바꿔, 젖은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본다. 이번에도 청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백마 탄 왕자님처럼 구해줘서, 약속대로 날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별 말씀을.”
서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달빛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단순히 입술의 온기를 느끼는 입맞춤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길다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후 서로의 입술에서 멀어졌다. 온기가 아직도 입술에 남아있어, 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는 여성의 모습을 보니,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두 번째도 담배맛 키스.”
“윽.”
엘리가 품에서 떨어지면서 새초롬하니 바라보자 라트는 침음을 삼켰다. 담배맛 키스라니. 듣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거북한데, 실제로 그렇게 느낀 사람은 얼마나 거북할까.
‘가글이라도 만들어야하나.’
“저기, 라트.”
“왜?”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던 중,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청년은 생각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이 붉은 실, 뭔지 알아?”
‘모르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아의 저주라니, 어지간히 게임을 많이 한 라트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저주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애매하고, 그래서 무서운 저주다.
설명을 해줄 요량으로 입을 열려고 할 때.
“아가씨. 공작님께서 라트님이 일어났다면 당장 모시고 오라고 하십니다.”
세스라가 열어진 방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스승님이랑 사저도 여기 왔어?”
“응.”
“그럼 가자. 가서 설명해줄게.”
“그래. 편한 대로 해.”
아가씨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트는 그녀와 함께 세스라를 따라서 공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몸은 좀 괜찮으냐?”
“예.”
상처가 생겨서 기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상처가 생겼다면 포션으로 치료하면 그만이었기에 라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잉, 담담하기는. 몸에 딱히 문제가 없어도 일어나질 않기에 네 사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넌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거다.”
제스맹이 혀를 차며 라트를 바라본다. 라트가 엘리를 암살하려고 하는 이들과 싸웠다는 소식에 그리고 또 기절했다는 소식에 케이네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기절한 라트를 보고 엘리와 함께 우는 모습이, 의사가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몸에 이상이 없으면 어째서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지 따져 묻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말로 괜찮은 게 맞느냐?”
물론 제스맹이 케이네를 울렸다고, 라트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진심으로 궁금했을 뿐이다. 일부러 담담한 척 하는 것인지, 진짜 괜찮은 것인지.
“스승님.”
“크흠.”
케이네가 제스맹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턱짓으로 공작을 가리키자, 제스맹은 헛기침을 하며 어서 공작에게 가보라고 손짓을 한다.
이번 일로 인해 가장 심기가 불편한 것은 루아타 공작이다. 심가기 불편하기만 할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스맹의 눈에는 공작이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필이면 그가 잠시 일이 생겨, 영지에 돌아갔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덕분에 가신 중 한 명에게 엘리가 암살기도를 받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황급한 나머지 포탈을 이용하지도 않고 광범위 텔레포트를 이용해 수도로 왔다고 했다.
‘그런 면모를 조금만 공녀님께 보여주면, 아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을.’
제스맹은 혀를 차면서 아직도 가시지 않은 불안에 이를 갈고 있는 친우를 바라보았다.
“딸아이가 다시 한 번 은혜를 입었군. 이제는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할지, 감을 잡지 못할 정도야.”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제스맹만이, 루아타 공작의 오랜 친우인 그만이 알 수 있을 뿐. 그는 평소와 같은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라트에게 말을 걸었다.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 친구를 구하고 싶어서 구한 것뿐이니까요.”
“호의를 호의로만 받아들인다.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에 세상은 복잡한 것일세.”
호의를 보여준다면, 호의를 받은 쪽은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의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쪽은 불만이 생길 것이고, 호의를 받은 쪽은 그 호의가 당연하다고 여기기 마련이니까.
“보상 문제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혹시 자네가 일어나지 못한 게, 딸아이가 보인다고 하는 붉은 실과 연관이 있는가?”
여기서는, 다시 한 번 모리아를 들먹일 수밖에 없겠지? 하긴 이 붉은 실은 모리아의 저주니까. 그녀의 이름을 들먹여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가신 분들을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소 건방진 말일수도 있으나,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신들은 군말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말해보게나.”
“저는.”
“자네가 모리아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제스맹에게 들어서 알고 있네.”
잠시 놀라기는 했으나, 스승님이 그 말을 루아타 공작에게 했다면야 딱히 불만은 없다. 스승님이 라트를 위하면 위했지, 피해를 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설명이 빠르겠네요. 정신을 잃은 건 다시 한 번 모리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서.”
의사가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해서 각성 포션을 먹였는데도 라트가 의식을 찾지 못하자 굉장히 걱정했던 케이네는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리, 다른 사람들이 붉은 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봐.”
“음? 어, 알았어.”
다른 사람들에게 붉은 실을 보이려면 붉은 실로 연결된 서로가 동의를 해야 한다. 엘리는 곧바로 라트의 말에 따라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라트도 붉은 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호오.”
그러자 공작의 입에서 묘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제스맹과 케이네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눈빛으로 라트와 케이네를 연결해주고 있는 붉은 실을 바라본다.
“이건 운명의 실이라고 불리는 건데…….”
“역시 운명의 실이었나.”
공작은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눈을 감쌌다.
“알고 계십니까?”
“이래보여도 마법사라서, 호기심이 많아서 고대 서적을 떠들어보던 때도 있었다. 거기서 본 기억이 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엘리와 케이네 뿐. 그렇다면 스승도 운명의 실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저게 뭔데 공작님이 저렇게 허탈해하시는 거예요, 스승님?”
“저게 바로, 모리아의 유일무이한 저주란다.”
제스맹은 입술을 씹으면서 케이네에게 운명의 실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고, 엘리 역시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라트의 옆에서 벗어나 케이네에게 다가갔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가리고 있던 공작은 제스맹의 이야기가 끝나자 얼굴에서 손을 땠다.
“하하하하하.”
그리고 튀어나오는 것은 조용한 웃음. 너무나도 조용했지만, 라트는 그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래 오늘 내 딸아이가 죽을 운명이었나 보군. 그랬단 말이지. 푸흐흐, 크하하하하하!”
운명의 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공작은, 오늘 운명이, 모리아가 엘리의 죽음을 결정한 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웃었다. 눈앞에 있는 백안의 청년이 아니었다면, 딸이 필시 죽었을 거라는 사실에 웃었다.
조용히 시작된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광란의 하모니를 자아낸다. 그의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마력이 점점 휘몰아쳐 주변에 있는 사물에 금을 새긴다.
“이 찢어발겨서 고기를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새끼들이.”
딸을 죽이려고 한 이들을 향해 공작은 거침없이 분노를 표한다.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의 진실한 분노에 놀랐는지, 그렇지 않아도 큰 엘리의 눈이 더욱 커졌다.
“감히 내 딸을, 내 반쪽을.”
표현하지 않을 뿐. 공작은 부인과 딸이 세상에 전부였다.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이 세계에서 첩실을 들이지 않고 한 평생,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산 가정적인 사람이다.
이런 자가, 딸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렇기에 이 분노는 너무나 합당했고, 합당한 분노였기에 지금 보일 것은 아니었다.
‘와, 할 말이 없네.’
공작의 분노를 직접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분노한 공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라트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네와 엘리도 마찬가지다. 입조차 벙긋거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 뿐.
지금도 이럴 진데 이제는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는, 광기에 휩쌓여 푸른 귀신이라고 불리게 되는 미래의 그는 얼마나 무서울까.
“잠깐 실례하겠네, 로이.”
유일하게 살기가 뒤섞인 마력의 폭풍 속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던 제스맹이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공작은 황당한 시선으로 제스맹을 바라본다.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였으나, 제스맹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너무 직설적이고 충동적이어서 문제야. 나이를 먹어도 왜 그 모양인지. 물론 그것이 자네의 장점이기도 하네만.”
본래 공작은 충동적인 성격을 가진자다. 혹자는 젊었을 적의 공작을 다룰 수 없는 망아지와 비교하기도 했다. 결혼을 한 이후에는 중후함을 얻었으나, 젊었을 적에는 특유의 성격 때문에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공녀님은 살아있네. 그러니까 조금 진정하게나, 꼬마 로이.”
정당한 분노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러나 지금은 분노할 대상도, 이유도 없다. 딸이 살아있는 현실에 감사를 여기면 족하다.
정당한 분노는, 합당한 대상을 만났을 때만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기에.
“……내가 좀 흥분했군. 충고 고맙네, 늙은 제스맹.”
친우의 마음이 담긴 조언에 공작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진심으로 친우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리하여 공작의 분노는 끝을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이 글을 쓰기 앞서, 써놨던 글들을 연중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까 사과를 드리는 게 너무 미적지근 했네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서 사죄드립니다. 이번 글은 반드시 완결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