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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57화 (5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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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승부처, 하나의 단어가 라트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간다. 여기서 노인의 남은 한 수를 막을 수 있다면 자신의 승리다.

    ‘아 한 수가 아니라 두 수지.’

    어쨌든 반대로 노인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죽겠지?’

    죽음이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직도 게임처럼, 꿈처럼 느껴지고 있으니까. 게임에서 죽는다고 한들, 꿈에서 죽는다고 한들, 현실에서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게임도 꿈도 아니다. 오롯한 하나의 현실 속이고, 나는 그 현실을 부유하는 중이야.

    “어린놈이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노인의 거짓된 분노가 커져가자, 라트는 입술을 깨물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디로 올까.’

    여기서는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 첫 번째 숨겨진 수가, 뒤에서 오지 않기를 빌어야지. 평균적으로 그림자 까마귀의 전대 단주인 찰리의 첫 번째 숨겨진 수가 뒤에서 올 확률은 약 7%. 매우 낮은 확률이나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농락당한 쪽이 문제 있는 거지. 왜 나한테 그래?”

    주의에 주의를 요하면서도, 노인을 비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노인이 거짓된 분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척, 그의 앞에 숨겨진 덫을 놓는다.

    “이놈이!”

    노인이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라트는 살며시 손가락으로 가슴을 찔렀다.

    갑옷 때문에 손가락으로 찌른 느낌이 들지도 않았을 텐데, 라트는 인상을 구기며 침음을 삼켰다. 액체 금속이 그 행동에 반응하여 조그마한 침을 만들어 라트의 가슴 정중앙을 찔렀기 때문이다.

    [제 1번 온기리드 침술을 활성화하셨습니다. 체력이 초당 50씩 감소합니다. 동체 시력이 50% 증가합니다]

    케이네가 잘못 샀던 책을 연구한 결과, 액체 금속으로 만든 갑옷이라는 점 덕분에 평범한 인챈트와는 전혀 다른 인챈트를 갑옷에 불어넣을 수 있었다.

    침술을 전투에서 이용하기 위해서는 침을 꼽고 싸우는 것이 가장 효율이 좋았으나, 그렇게 하면 침을 꼽은 곳이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침을 뽑아야했다.

    그러나 갑옷이 변형되어 침을 찌른다면 침을 뽑을 필요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초당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이지만, 그만큼 효율은 뛰어났다.

    “후우.”

    담배 연기를 들이쉰다. 바람과 함께 살랑거리며 날아가는 낙엽이 느리게 보인다.

    ‘와라.’

    이 침술은 그렇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나중에 체력 회복력을 올려주는 효과를 가진 포션을 만들고, 그런 효능을 가진 기능을 얻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힘을 사용한 것은 밑천을 털지 않으면 눈앞의 노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까악!”

    ‘오른쪽!’

    귓가에 청명한 까마귀 소리가 들리자, 라트는 재빨리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러나 공기를 가르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곳을 향해 정확히 검을 베었다. 무엇인가가 베이는 촉감과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에 까마귀 시체가 나타나더니, 지상으로 유유히 낙하한다.

    “큭.”

    동시에 뒤쪽에서 조그마한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라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노인이 저만치 날아간다.

    라트는 재빨리 노인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낙법을 이용해 꼴사납게 넘어지는 꼴을 면한 노인은 입술을 씹으며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발에 박힌 것은 유리조각, 라트가 뒤쪽에 던졌던 포션병의 잔해물이었다. 이것이 발에 박혀서 0.5초 정도 반응이 느려졌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노인은 확실하게 손에 들고 있는 단검으로 라트를 찔러 죽였을 것이다.

    “어떻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했다. 포션병을 던져둔 것도,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분노를 보였음에도 철저하게 방비를 한 것도. 마치, 자신의 수법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안 거지?”

    “그건 댁이 알 바 없고.”

    ‘운이 좋았어.’

    아슬아슬했다. 은신 마법을 사용해놓은 까마귀로 시선을 돌린 후 텔레포트 마법으로 상대방에게 기습을 가하는, 수많은 세월에 걸쳐 발전한 노인이 준비한 최후의 수단을 막아낸 라트는 침술을 해제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포션을 전부 마신 후 유리병을 아무렇게나 던진다. 쓸모가 없으니까. 그러나 라트는 포션병을 재활용할 수 있는 연금술사다. 그런 라트가 유리병을 뒤로 던질 때부터 찰리를 파훼하는 방법은 시작되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배틀 알케미스트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놈은 방심했다. 자신의 기준에 나를 재단했고 이것이 돌아온 결과다. 발에 유리가 박혔으니 암살자 특유의 날카로운 움직임은 보이지 못하겠지.

    “이번에는 내가 선언하지. 체크메이트, 늙은이.”

    반대로 라트의 몸은 정상이다. 아니 정상이 아니었다고 해도, 포션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훌륭한 외통수, 완벽히 당했다.

    “나도 늙었군.”

    설마, 이제 막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청년도 죽이지 못할 줄이야. 안타깝지만,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계속 싸운다면 죽일 자신은 있지만, 슬슬 경비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닌, 상대방의 편이었다. 그래서 조금 촉박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확은 있다. 저 청년의 힘을 알았으니 나중에는 완벽하게 암살 플랜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발이 이래서야 도망치는 것도 어렵겠지만, 청년의 시선을 한순간만 따돌릴 수 있다면 포션으로 발을 치료할 수 있겠지.

    “어딜!”

    노인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라트는 재빨리 노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폭탄처럼 보이는 저것이 진짜 폭탄이 아니라 연막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설마 저 자존심 높은 전 단주가 암살자의 기능 중 하나인, 도주를 시도하려고 할 줄이야.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 노인을 놓친다면 라트의 전력이 그림자 까마귀, 나아가 켈랑 왕국에 알려지게 된다. 그것은 사양이다, 그러나 방심한 덕분에 반응이 느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노인을 놓치게 된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트는 달리는 것을 멈췄다.

    연막을 터트리고,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던 노인이 자신의 어깨를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더니, 푸른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굳히고 만다.

    ‘끝났네.’

    주변이 뒤틀린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내뿜고 있는 루아타 공작의 모습을 본 라트는 더 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넷 시르 루아타에게 정해진 운명을 바꿨습니다. 모리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해진 운명을 바꿨기에 모리아가 유저와 엘리자넷 시르 루아타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유저와 엘라자넷 시르 루아타 사이에 운명의 실이 연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진 엔딩으로 향하는 첫 번째 조건의 일부를 달성하셨습니다]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눈앞에 수많은 알림창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던 라트는 별안간 정신을 잃은 듯, 쓰러졌다.

    *****

    “뭐야.”

    분명 조금 전까지 파르스의 시가지에 있었는데 이 흑색 공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허무의 공간을 마주하자, 라트는 잠시 몸을 떨었다.

    처음 느끼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트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더러운 해커 엔딩인가?’

    스크린샷으로는 몇 번 본 광경이지만, 2d 도트와 현실의 차이는 굉장한 괴리감을 불러 일으켰다. 바닥이 없는데도 바닥이 있는 느낌이다. 아니, 허공에 떠있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하다.

    알 수 없는 감각, 처음 느끼는 감정.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을 되찾아오려고 할 때, 검은색 인영이 라트에게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크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자기소개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정해진 운명을 바꾸셨군요.”

    그를 바라본다. 스크린샷으로 봐온 익숙한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 아닌 물음표로 되어있다.

    이 새끼 때문에 초반부에 공인되지 않은 에디터를 사용했음에도 게임을 마음대로 진행하지 못하던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그 덕에 불평을 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당연히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월드 세리아가 현실이 아닌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NPC이기도 하다.

    “댁 같은 사람 때문에 이런 엔딩을 집어넣은 겁니다. 댁이 죽는 데드 엔딩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잠깐만!”

    물음표 얼굴이 손을 들어올리자, 라트는 황급히 그를 말렸다. 아니, 무슨 놈의 NPC가 이렇게 성급해.

    “음? 최후에 남길 유언이라도?”

    “나는 비공인 에디터는 사용하지 않았다만.”

    “네? 그럴 리가 없잖……. 어? 어어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듯, 들어올린 손으로 라트의 정보를 살펴보던 마크가 시시각각 침음을 내뱉었다.

    “진짜로 비공인 에디터를 쓴 흔적이 없네요?”

    마크의 물음표 얼굴이 느낌표로 바뀌었다.

    “버그가 터져서 튜토리얼 기간 중에 레벨 업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버그는 유저 책임이 아니잖아.”

    “맞습니다. 이야,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이야.”

    버그는 유저의 책임이 아닌, 제작사의 책임이다. 월드 세리아의 제작사 측에서 분명 이것을 명시해놨다. 게임 내에서 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마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제 실수입니다.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도록 하죠. 그리고…….”

    “잠깐만.”

    라트는 황급흐 마크의 말을 끊었다. 이것이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NPC다. 그렇다면 라트가 이곳에 온 이유도 알고 있지 않을까?

    “또 뭐죠?”

    “넌 이게 게임이라는 걸 알잖아. 근데 내가 너랑 대화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어째서요?”

    그러나 라트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도 태연하게 무엇이 이상하냐고 물어보는 마크의 반응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결국 이놈도 월드 세리아가 게임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는 NPC일 뿐. 라트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는 모른다는 건가.

    “싱거우시군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진 엔딩으로 갈 수 있는 퀘스트를 드리도록 하죠. 이 퀘스트를 유저에게 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감격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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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엔딩으로 가는 길

    목표 : 정해진 운명을 바꾸고 운명의 실을 연결하라. 남은 운명의 실 : 1/4

    보상 : 첫 번째 조건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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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엔딩으로 가는 길이라. 분명 엘리를 구한 덕분에 첫 번째 조건의 일부를 달성했다는 알림창을 보기는 했지만, 이게 진짜 진 엔딩으로 가는 조건일 줄이야.

    이러니까 진 엔딩을 보지 못하지. 평범한 조건으로는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

    미친 제작사 놈들, 이걸 지금 깨라고 만들어놓은 건가. 엘리랑 친해지지 않아서, 그녀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목표했던 진 엔딩을 보지 못할 뻔했다.

    ‘착하게 살라는 건가.’

    라트는 머리를 긁었다.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그가 선한 행동을 한 덕분에 조금이나마 진 엔딩을 볼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갔다.

    “그리고 유저 분을 멋대로 여기로 데려온 보상 말인데. 게임 밸런스에 크게 영향을 주는 보상은 좀 그렇고.”

    보상이라, 라트는 마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게임 내에서 전지전능하다. 에디터로 드래곤 아니, 마왕에 맞먹는 수준이 된 유저라고 해도 그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걸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보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지.”

    “너무 큰 게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는 가능합니다.”

    “소드 엠프레스 시리즈, 6번.”

    “엑?  공평함의 검인가요? 신화 등급 아이템을 달라고요?!”

    마크가 기겁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소드 엠프레스 시리즈는 소드 엠페러 시리즈와 함께 모든 검이 신화 등급이었다.

    라트도 양심이 있다. 신화 등급 아이템을 달라는 말은 하지도 않아. 그리고 오러를 깨우치지 않는 이상, 신화 등급이든 뭐든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기도 하고.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 만지게 해주기만 하면 돼.”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 작품 후기 ============================

    오타 제보 감사합니다...항상 원고료 쿠폰 주시고 추천 눌러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리고 있어여.

    백예님 10장, 레니카르델님 3장, niellee님 100장(님은 그만 쏘세요)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술(전통주)과 담배를 택배로 보내는 건 불법이랍니다....그러나 상자에 포장해서 보내면 안 걸린다고 하네요. 그러니 담배를 주실 분들은 저에게 쪽..읍읍!! 아닙니다, 아니에요. 무심코 본심이 나왔네요..후..

    그리고 주인공 = 글쟁이 설이 나왔는데. 아닙니다, 하고 바로 부정할 수가 없어서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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