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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음, 경매장을 이용하는 게 어떠냐.”
“경매장이요?”
“그래, 전 대륙의 물품이 흘러들어오는 게 경매장이지 않느냐. 없는 게 없는 곳이지.”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스승의 말에 경매장의 존재를 떠올린 라트는 손가락을 튕겼다.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 경매장에 방문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지 않은가. 그러나 튜토리얼 기간 중에는 경매장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기에 떠올리지 못했다.
멍청한 놈, 틀에 박힌 사고 때문에 경매장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매도한다.
경매장, 전 대륙에서 모인 아이템이 팔리는 곳. 운이 좋으면 전설급 장비는 물론, 최고 등급인 신화급 장비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전 대륙에서 모인 아이템을 팔기 때문에 당일에 바로 물건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그 다음날 물건을 배송해준다. 지구로 치면 인터넷 쇼핑 정도라고 할까?
제작사 측에서 유저의 편의 겸 사행성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으로 상점이나 상회를 이용해서 사는 것보다 10% 정도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 그대로 없는 물건이 없는 곳이었다.
“돈은 내 명의로 달아놓으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스승은 무려 셀룬 왕국의 연금술사 길드 마스터이자, 모든 연금술사의 정점에 선 자다. 2000골드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다. 거기에 전쟁 준비 덕분에 셀룬 왕국에서 지원을 받고 있을 거다.
그래서 라트는 별 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벤토리에는 900 골드가 남아있었지만,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럼 바로 가봐라. 운이 좋다면 낙찰되기 직전의 재료들을 몇 개 구할 수 있을 거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많이 사와도 된다. 나도 직접 엘릭서를 만들어보고 싶으니까 말이지. 케이네도 그럴 거다.”
“네. 아, 루샤 누나 월급 좀 올려주는 게 어때요? 엘릭서 소리를 들으니까 길드 상점에 팔 생각부터 하던데.”
“크, 크흠. 최근 바빠서 신경을 못써줬구나.”
헛기침을 하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스승의 모습에 라트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변명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바쁜 몸이었다. 지금도 라트와 대화하면서 순수한 철을 연성하는 걸 멈추지 않고 있지 않은가.
“수련생하고 프로보스트 분들이 총 출동해서 일하고 있는데도 바쁘십니까?”
“수련생은 순수한 철을 못 만드니, 순수한 철을 검날과 창날 모양으로 연성하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사범이라는 놈들이 만든 순수한 철은 그렇게 질이 좋지 않아서 말이다.”
“사저가 안 도와줬어요?”
제스맹처럼 순수한 철을 빠르게 연성하지는 못하지만, 케이네 정도라면 상질의 순수한 철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사저가 도와줬다면 스승이 이렇게 바쁜 와중에 순수한 철을 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한테 잘도 그런 일을 시키겠구나.”
“죄, 죄송.”
그것도 내 탓이었구나, 라트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면서 스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일을 내가 자발적으로 시킬 수는 없잖느냐.”
“그러다가 쓰러지시면 저희가 슬퍼할 거라는 생각은 안하세요?”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드는 일이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스승이 쓰러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스승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라트와 케이네에게 있어서 제스맹은 가족과 같았으니까.
“그래서 저걸 마시고 있잖느냐.”
“하아.”
제스맹이 가리킨 곳에는 비어있는 포션병과, 아직 비우지 못한 포션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런 걸 마시면서 체력을 충전하고 계시는 건가. 제대로된 식사는 하고 계신지 의심스럽다.
“걱정 말거라. 로이 놈 아니, 루아타 공작이 몸에 좋은 걸 보내오고 있으니까.”
라트의 눈빛에서 걱정을 읽었는지, 제스맹은 짐짓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라트의 입장 상 제스맹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스승이 이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저 때문에…….”
“네 탓이 아니다. 내가 어리석은 꿈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싶었을 뿐이다.”
제스맹은 잠시 순수한 철을 연성하는 일을 멈추고, 라트에게 다가와서 따뜻한 미소와 함께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니까 그런 슬픈 표정 짓지 말거라.”
순수하게 제자가 슬퍼하지 않았음을 바란 제스맹은 이번에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노인 특유의 연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향기가 느껴지자 라트는 스승의 말대로 슬픈 표정을 지웠다.
“아. 루아타 공작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엘리자넷 공녀께서 널 아주 걱정하더구나. 케이네처럼 말이야.”
제스맹의 말에 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케이네보다 더 강렬한 반응을 보이면 보였지, 절대 케이네보다 약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소녀다. 어쩌면 마운트 자세를 잡고 복날의 개처럼 팰지도 모른다.
“그런가요.”
그러나 말도 없이 훌쩍 떠나서, 6개월 동안 연락도 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니까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복도 많은 놈.”
“하하하하.”
스승의 일침을 덮고 싶은지, 라트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공방에 울렸다.
“또 케이네를 울리면 가만 안 내버려둔다.”
“울었어요?”
“당연히 울었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연락도 안했으니까. 나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걸 알아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나는 네가 알아서 케이네한테 연락이라도 남길 줄 알았다.”
“바빴으니까요.”
“그래 뭐, 엘릭서를 찾으러 갔다면 전부 이해가 될 일이기는 하지.”
바빴다는 건 어디까지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봐라, 포탈을 이용하기 위해 도시를 들렸을 때 연락을 취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강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을 뿐이다.
그러나 순수한 연금술 학도인 제스맹은 그가 엘릭서를 하나 찾았다는 말에 모든 것을 이해하는 중이다. 케이네도 그랬지, 엘릭서를 찾았다고 말하자마자 분노를 사그라트리지 않았던가.
“혹시 6개월 동안 엘릭서를 찾는다고 노숙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 그제야 라트는 스승과 케이네가 어째서 자신이 연락도 하지 못했음을 이해하는지 깨달았다. 라트 같이 반칙을 쓰지 않는 이상, 보통 엘릭서같은 비보를 찾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도시에 들렸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6개월 내내 산같은 곳에서 노숙을 하면서 엘릭서를 찾았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좋아, 이 컨셉으로 밀고 나가자.’
6개월 동안 수차례 도시에 들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케이네가 다시 화를 낼 거다. 어쩌면 스승도 케이네를 울렸다는 명목 하에 화를 낼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침대가 그립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젊었을 적에는 노숙을 몇 번 했었는데. 굉장히 불편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먼 옛날을 회상한 제스맹의 모습에 라트는 살짝 몸을 뒤로 옮겼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스승에게 붙잡혀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될 거 같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스승님이라지만, 시시콜콜한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기보다는 경매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아, 내 과거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구나. 빨리 경매장으로 가보거라. 엘릭서를 만드는 걸 직접 보고 싶으니까.”
다행히도 스승은 옛 추억을 꺼내면서 회상에 젖는 것보다, 순수하게 무언가를 탐구하고 싶은 연금술 학도의 본능이 강했다.
“그리고 경매장에 다녀오고 나서 나한테 다시 오거라. 부탁할 일이 있으니까.”
“예. 다녀올게요.”
스승에게 인사를 남긴 후, 라트는 재빨리 공방에서 벗어났다.
“스승님하고 이야기는 끝냈어? 뭐라고 하셔?”
공방에서 나오자, 케이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진짜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면 타이밍이 좋았던 걸까.
“경매장으로 가보래. 돈은 자기 명의로 하라고 하셨어.”
“진짜? 그럼 누나도 갈래!”
“그래, 그래.”
경매장은 귀족에게도 굉장히 생소한 곳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지만, 반대로 돈이 없다면 무엇도 구할 수 없는 곳이니까.
작위가 높은 귀족이나, 돈이 많은 상인이라면 모를까. 케이네같이 귀족이나, 작위를 받을 수 없는 자녀는 경매장을 이용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엘리는?”
분명 케이네는 엘리에게 라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갔다. 엘리가 라트의 귀환 소식을 들었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당장 한 대 때리러 온다고 해도, 받아줄 용의가 있었는데.
“바쁘니까 나중에 알아서 찾아오라고 하던데.”
뭐야, 그렇게 바쁜가. 하긴, 루아타 공작이 엘리를 열성적으로 교육시켰다는 건, 게임 상 루아타 공작 영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루아타 공작의 일지를 읽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어지간한 군인보다 딸을 빡세게 굴렸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엘리가 누구에게도 무시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딸을 굉장히 아꼈기에 딸을 잃었다는 슬픔에 미쳐서, 타국에서 푸른 귀신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모하지 않았던가.
‘지금 공작의 모습을 보면, 푸른 귀신일 때 모습이 상상도 안 된다.’
호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공작이라는 자리 때문에 딱딱한 말투를 사용하지만, 사람을 물건으로 보지 않고, 가치에 맞는 대접을 해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모습을 보이는 한 명의 아버지였다. 그런 공작이 월드 세리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학살 사건을 일으키는 주범인 푸른 귀신이 된다니.
‘대체 얼마나 엘리를 사랑한 거야?’
혹여나 나중에 라트가 엘리를 뺏어간다면, 라트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라트는 몸서리를 쳤다.
“왜 그래?”
“아니야. 6개월 만에 집에 오니까 좋아서.”
차마 후일, 공작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어서 몸을 떨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라트는 케이네의 질문을 얼버무렸다.
“아참. 엘리 완전 무서워 보이더라.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엘리는 누나처럼 쉽게 용서해주지 않을 거 같으니까.”
화가 난 엘리라. 엘리자넷 공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기 그지없다.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면서 죽는 NPC니까. 설정 상 성격이 쌔고 고집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라트에게는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엘리가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서울지 눈여겨보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섭다면 이후에는 엘리가 화를 낼 일을 줄이도록 해야겠따.
“그럼 누나는 날 용서하기로 했어?”
“그럼 어쩌겠니. 엘릭서를 찾았고 만들 수 있다는데. 6개월 동안 아무 연락도 안한 건, 화가 나지만, 그것보다는 엘릭서를 만드는 걸 보고 싶은 걸.”
‘역시 스승님이나, 사저나. 연금술에 미쳐있는 연금술사야.’
라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케이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왠지 더 잘생겨진 거 같아서. 6개월이나 못 봐서 그런가?”
뭐야, 그게. 케이네가 시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6개월 동안 못봤다고 그리움에 사무쳐서 내가 잘생겨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6개월 동안 뭐가 바뀔 게 있다고. 경매장이나 가자.”
“응. 동생이랑 데이트는 처음이네?”
이게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라트는 잠시 케이네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순수하게 동생으로써 누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의 발로였을 뿐이다.
“손 잡아.”
“꺄. 여자도 배려해줄 줄 알고, 우리 라트 다 컸네?”
케이네는 기특하다는 듯, 라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정작 라트가 내민 손을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응? 아니, 그게. 어, 음.”
그 날, 갑작스러운 키스 이후로 라트가 남자로 보이는 케이네에게 있어서 손을 잡는 행위는 생각보다 마음이 떨리는 일이었다.
제스맹은 케이네의 과거를 알기에, 그녀가 그저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 밤낮을 지새우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사실은 라트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잔 것이었다.
예전처럼 동생으로 대하는 일은 능숙하게 해낼 수 있지만, 손을 잡으라니!
‘우우!’
케이네는 부끄러움에 몸을 꼬았고 이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꼈다. 키스도 했는데 이게 뭐라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뭔데 그렇게 말을 못해?”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케이네가 자신의 손을 잡자 라트는 경매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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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처언..좀..